•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코르친과 차하르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74-80)

28)심양장계무인년(1638) 9월 3일.

29)심양장계무인년(1638) 11월 17일 ;심양장계신사년(1641) 같은 날(4월 11일) 承政院開坼.

30)인조실록36권, 인조16년(1638) 6월 9일(경자). 貿牛使로 파견된 成釴의 활동과 의의에 대해 서는 이용범, 앞의 논문, 1965에 상세하다. 1643년의 貿牛와 이를 위해 파견된 譯官 趙孝信에 관 해서는심양장계계미년(1643) 같은 날(2월 10일) 承政院開坼 ;심양장계계미년(1643) 같 은 날(2월 14일) 承政院開坼 ;심양장계계미년(1643) 같은 날(3월 2일) 承政院開坼 ;심양장 계미년(1643) 6월 27일 承政院開坼에 단편적인 기사가 보인다.

31)효종실록, 효종대왕 묘지문.

1644년 명조가 이자성에게 멸망하자 明將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고 청군을 맞아들임 으로써 청조는 입관에 성공하였다. 조선으로서는 아마도 그 직전에 이미 대세를 짐작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643년 賓客 李昭漢이 심양에서 돌아와 다음과 같은 청국의 칙 서를 전달하였다.

짐이 지난해 겨울에 多羅伯楊 貝勒을 대장군으로 삼고 大臣 兎兒格을 副將으로 삼아 畿 內八高山, 漢人八高山, 蒙古八高山의 군병을 두 길로 나누어 南朝를 정벌하였다. 성문을 부 수고 들어가 북경을 넘어섰는데 그 결과 그들의 구원병 39陣을 격파하여 3府 18州 67縣을 손에 넣었고 귀순한 것은 1주 5현이었으며, 魯王 朱以沛, 樂陵王 朱弘植, 東原王 朱以源 등 6王은 다 군병의 손에 죽었고 노획한 사람과 말은 도합 92만이었다. 짐이 보건대 明朝는 軍門 洪承疇 등의 전군이 패몰한 이후 정예병이 이미 바닥났기 때문에 우리 군사가 승승 장구하여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던 것이다. 짐은 王과 화복이 서로 연관되기 때문 에 승전보를 알려서 함께 즐거워하는 뜻을 보인다.32)

만주인와 요동의 한인 및 투항한 한인, 그리고 몽골인의 공고한 연합으로 만들어진 청조의 입관은 시간문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입관 직후부터 이러한 몽골에 관한 이상 동향이 보고되기 시작하였다. 1646년 사은사로 파견되었던 이경석 등은 “북 경에서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대왕[할주:죽은 汗 洪太始의 형 貴榮介]의 사위인 蒙古 王이 瀋陽의 서쪽에서 살고 있었는데,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옛 땅으로 도망쳐 들어갔 다. 그래서 금년 5월 2일 청나라 사람들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十王[할주:죽은 한의 아우]으로 하여금 가서 치게 하였는데,’ …(중략)… 또 듣건대, ‘朱氏라는 어떤 사람이 몽고로 도망쳐 들어가 복수할 계책을 모의하고 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매우 걱정한 다.’고 한다”고 치계하였고,33) 1649년에는 冬至使 吳竣이 “宣大守將이었던 漢人 江姓인 자가 西㺚과 通謀하여 淸將을 죄다 죽였는데 그 근방의 7, 8고을이 다 투항하여 붙었 으므로 八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친다고 한다.”고 치계하였다.34) 또 1655년 衙譯 金三達이 伴送使 許積에게 전한 청조 내부 정세에는 청이 永曆帝의 南明 정권과 宣 府·大同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한 상황과 더불어 “매우 두려운 것은 몽고 군사가 날 로 성하고 부락이 매우 많은 것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은 大元㺚子이다. 우리 나라의 사신이 왕래하는 길은 몽고 땅과 멀지 않으므로 짐꾸러미에 더욱 신중해야 한 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35) 이것들은 조선 使行이 당시 청조 내부에서 떠돌던 소문을 수집하여 보고한 것으로, 조선은 이러한 소문에 근거하여 ‘서달’(몽고)이 청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역사상 어떠 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인지 일일이 특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수집한 정보 의 사실 여부를 확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 보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소문이 사행이 멋대로 조작한 것이 아닌 이상, 청조 내부의 사회 분위기 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사실이 아니거나, 또 32)인조실록44권, 인조21년(1643) 8월 16일(정축).

33)인조실록47권, 인조24년(1646) 6월 3일(무인).

34)인조실록50권, 인조27년(1649) 2월 5일(갑오).

35)효종실록14권, 효종6년(1655) 4월 11일(을축).

는 다소 과장되었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입장에서 청조의 정세가 아직 불안정하다고 판단한 것이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서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듣고 다음과 같은 의논이 이루어졌다.

(상이-필자주) 이어서 묻기를, “지금 남북의 근심 중에서 어느 곳이 급한가?”하니, 김자 점이 아뢰기를, “청국이 염려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생각은 어떠한가?”하 니,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왜가 염려되나 군사를 움직이려면 먼저 한 가닥 말썽부터 일으 킬 것이고, 蒙古가 혹 마음을 먹더라도 北京을 버려두고 우리에게 먼저 오지는 않을 것입 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청국이 버티지 못하고 義州 근처에 와서 우리가 接濟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장차 어찌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근심하는 것도 그것이다. 치밀한 대비책을 미리 강구해야 할 것이다.”하였다.36)

여기에서 조선이 근심했던 것은 몽골이 조선을 직접 침략하는 경우가 아니라, 몽골 의 공격을 받은 청이 후퇴하면서 조선에 해를 끼치는 경우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은 ‘영고탑 회귀설’의 기본 구조를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665년에는 새삼 몽골이 청조에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이 전해졌다.

蒙古의 여인이 일찍이 順治 황제의 황후가 되었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어서 본국으로 쫓 겨났는데, 그 뒤에 낳은 아들이 나이가 지금 14세입니다. 청나라에서 몽고에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끝내 보내지 않으므로 조만간에 반드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들 하고 있 습니다. 대개 몽고는 서북 방면에 있는데 지역이 끝없이 넓고 부락이 많아 강함을 믿고 명 령을 따르지 않는데다가 또 순치 황제의 아들이 인재여서 몽고 사람들이 왕으로 삼고 와 서 다툰다면 반드시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몹시 염려하고 있다고 합니다.37)

순치제는 모두 6명의 몽고 출신 처첩을 맞이했다. 그 중 둘이 황후가 되었고, 이들 은 모두 코르친 부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순치제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황후는 책봉된 지 3년만인 1653년(순치10) 결국 폐위되고 말았고, 두 번째 황후 인 孝惠章皇后도 폐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황태후의 뜻에 따라 겨우 폐위를 모 면했다. 실록에 기록된 위의 기사는 구체적으로는 첫 번째 황후를 폐위한 사건을 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38)

사실 이 사건은 누르하치 이래 가장 빈번하게 통혼관계를 맺으며 강고한 동맹을 유 지해 온 코르친 부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1659년(순치16) 순치제가 몽고의 額駙와 公 主를 북경에 불러들이면서 특별히 폐후의 아버지인 科爾沁親王 吳克善과 郡王 滿珠習 禮 형제를 지명하여 불렀지만 이들은 전염병을 핑계대고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은 폐 후 사건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39)

36)인조실록50권, 인조27년(1649) 2월 13일(임인).

37)현종실록10권, 현종6년(1665) 3월 6일(임진).

38) 순치제의 폐후 사건에 관해서는 다음 기록을 참고.淸世朝實錄卷77, 順治10年 8月 丁亥 ; 庚 寅 ; 卷78, 順治10年 9月 癸巳朔 ; 丁酉 ; 丁巳 ; 趙爾巽 等撰,淸史稿卷214, 列傳1, 后妃, 世 祖廢后 ; 孝惠章皇后 , 中華書局, 1976.

그런데 이와 비슷한 내용의 사건이 약 10년쯤 후의 숙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황제(강희제-필자주)에게는 東․西의 두 황후가 있다. 이른바 西后는 蒙王의 딸이요 東 后는 한인의 딸인데, 황제가 黑舍氏에게 매혹되어 서후를 本國으로 내치자 아이를 임신한 채 가서 이미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몽고에다 군사를 청하여 正軍 1만 4천을 얻어 서 남방으로 보냈더니, 戰陣에서 죽은 자와 水土에 익숙지 못하여 죽은 자가 반을 넘었다.

몽고에서는 그의 딸이 내침을 당한 것을 한하고 있는데다가 兵馬의 折傷이 이와 같아서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므로 앞으로의 일이 염려스럽다.40)

이 기사에서 黑舍氏는 아마도 강희제의 첫 번째 황후인 孝誠仁皇后 赫舍里氏를 가 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 외 강희제의 황후에 관한 내용은 모두 사실에 부 합하지 않는다. 강희제는 모두 53명의 처첩을 맞이했는데 그 중 몽고 출신은 불과 2명 에 불과했고, 이들도 순치제 때와 마찬가지로 모두 코르친 부 출신이긴 했지만, 한 사 람도 황후가 되지 못하였다.41) 그러므로 위 기사는 삼번의 난이 발발한 직후의 불안 정한 청조의 국내 정세 속에서 몽골에 대한 위기의식이 순치제 시기의 폐후 사건을 끌어 들여 강화되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이 “나이 70이 된 漢人 曲科”

라는 사람을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볼 때, 역시 청조 사회 내부에 퍼져있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청조 치하의 한인의 정서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강희시기에는 청조가 몽고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이 더욱 빈번하게 전해졌 고 있었다. 1667년 陳奏使 許積과 동행했던 南龍翼이 전한 청나라 士人의 말에는 “유 독 청나라 사람들이 밤낮으로 걱정하는 것은 단지 西㺚에 있다”42)는 내용이 있었고, 1668년 사은사 일행은 “喜峰口의 蒙古 部落이 배반한 사정에 대한 글”43)을 보고하였 다. 그리고 1669년 정월에는 “몽고가 청나라와 틈이 생겼다는 소식”44)이 전해졌다. 이 일련의 정보 보고는 아마도 “몽고에서 도망쳐 온 崔吉이라는 사람”이 전한 다음과 같 은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몽고의 왕은 바로 順治 皇帝의 매부이다. 그의 처가 살아생전에 왕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심양에 가지 마십시오. 가셨다간 반드시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처가 죽자 왕이 그 말을 생각하고 한 번도 심양을 찾지 않자, 청나라가 사람을 보내 꾸짖 기를 “심양에는 그대 조상의 무덤이 있는데 어찌해서 한번 와 성묘하지도 않는가.” 하니 39) 杜家驥,淸朝滿蒙聯姻硏究, 人民出版社, 2003, p.269.

40)숙종실록1권, 숙종즉위년(1674)) 11월 7일(병인).

41) 청조가 순치조까지 주로 몽골 코르친 부 출신의 황후를 맞이했던 사실에 비춰보면, 이것은 청 조 통혼정책의 큰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강희시기에 들어서면서 황실 내부 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향력이 큰 만주 大臣의 가문과 혼인을 맺어야 할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순치제의 폐후 사건으로 인하여 코르친 부와 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杜家驥, 앞의 책, pp.266~268)

42)현종실록13권, 현종8년(1667) 1월 12일(정해).

43)현종실록15권, 현종9년(1668) 10월 13일(무인). 희봉구 몽고 부락의 배반은 이듬해에 곧 사 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청이 몽고를 두려워한다는 인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현종실록16권, 현종10년(1669) 3월 4일(정유).

44)현종실록16권, 현종10년(1669) 1월 27일(신유).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7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