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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백제의 관음신앙

동아시아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데에는 서역승들의 왕래 속에 이 루어진 불전(佛典)의 한역 작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관 음신앙의 확산 또한 마찬가지이다.139)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힐경(維摩詰經)』,

139) Chün-fang Yü는 관음신앙이 아시아의 국가들에서 뿌리내리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대보적경(大寶積經)』 등에서 회중 가운데 자리한 여러 보살들 중 하나였던 관음보살은 서진의 축법호(竺法護)가 『정법화경(正 法華經)』을 한역(286)하면서 중국 사회에서 독존적으로 신앙되기 시작했다. 이 후 구마라즙(鳩摩羅什, 344~413)에 의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역출되 면서 관음신앙은 더욱 견고하게 대중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140) 또 『청관세 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經)』, 『십일면관음경(十 一面觀音經)』, 『마하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화엄경(華嚴經)』 60 권 본이 동진 14년(418)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 의해 번역되었고, 정토계 경전으로 강승개(康僧鎧)가 『무량수경(無量壽經)』을, 유송(劉宋)의 강량야사(畺 良耶舍)가 『관무량수경(觀無量壽佛經)』을, 담무갈(曇無竭)이 『관세음보살수기 경(觀世音菩薩授記經)』을 번역하면서 관음신앙의 다층적인 토대가 구축되었 다.

이와 같이 관계 경전의 유포와 함께 관음신앙이 중국 사회에 확산되는 양상 을 양(梁) 대 승우(僧祐, 445~518)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광세음경』, 『관세음경』이라는 별행의 독립 경전이 대중들 사이에 유통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141) 『관음경』은 『법화경』의 「보문품」을 독립시켜 만든 경전이다. 『관음경』이 독립적으로 유통되었던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 속에서 그만큼 관음보살의 가피에 대한 당대 민중들의 신앙이 절 실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중국불교 안에서 문헌 상 가장 초기의 관음 신앙자로 확인되는 인물은 법현(法顯, 약 337~422)이다. 법현은 인도에 들어

요인을 두 가지로 제시했는데, 첫째,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짐 12세기까지 관음보살은 석존 다음으로 대중들의 지속적인 귀의를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주변의 다른 불교국가 들에도 환영받았다는 점을 들었다. 둘째, 베다브라만 전통, 힌두이즘과 함께 공존했던 인도 불교의 성격 상, 불교가 타문화권의 토착 종교들을 배타적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특징으로 관음보살은 캄보디아, 베트남, 자바에 서는 ‘세상의 주(Lokeśvara, Lord of the World)’로, 미얀마에서는 ‘세상의 보호자 (Lokanātha, Protector of the World)’로, 티벳에서는 ‘눈으로 보는 (spyan-ras-gziga, One Who Sees with Eyes)’로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았지 만,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두루 알려지고 숭배되었다(Chün-fang Yü,

Kuan-Yin: The chinese Transformation of Avalokitesvara, 2-3).

140) 『묘법연화경』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경전으로서, 이 에 대해 동아시아 불교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분량의 사경이 이루어졌다. 또 둔황에서 발굴된 문헌들을 통해 볼 때 시기적으로 7세기 중반에 가장 대중화되었던 경전임을 알 수 있다(Miyeko Murase, “Kuan-Yin as Savior of Men: Illustration of the twenty-fifth chapter of the Lotus sūtra in chinese Painting.” 39).

141) 정병삼, 「통일신라 관음신앙」, 22.

가 구법 활동을 펼치다가 413년 귀국하여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해로를 통해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을 때 관음보살의 가피 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142)

또 관음신앙의 확산과 함께 고난구제(苦難救濟), 치병(治病), 성불조력(成佛 誘導), 불사보조(佛事補助), 악업해탈(惡業解脫), 혼사성취(婚事成就), 자손획득 (子孫獲得) 등에 관한 영험설화들이 두루 창출되었는데,143) 특히 북위(北魏) 말에서 북제(北齊)에 이르는 전란기를 거치며 관음신앙이 일반에게 한층 널리 유포되었다. 이처럼 불교의 전래와 함께 관음신앙이 중국 사회에 일찍이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법화경』 「보문품」의 영향이 결정적이라고 할 것이다.

관음을 구고구난의 성자로 묘사하고 일심칭명만으로도 각종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교의는 시대적 혼란기에 민중들의 귀의를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불전의 한역과 신행의 대중화를 이끌며 융성했던 남북조 불교는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삼국 불교의 성격과 신행의 특징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대 체로 고구려는 북조의 불교를, 백제는 남조의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고 있 다.144) 구고구난의 신앙 기제로 「보문품」 관음 신앙 또한 자연스럽게 한반도 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관음신앙과 관련하여 불교 전래 초기나 삼국 통일 이 전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현전 자료들은 많지 않다. 다만 불상, 불화 및 다양한 불구들과 함께 당대 중국 사회에서 유통되었던 한역 불전들이 유입되 면서 관음 관련 경전 또한 전래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 관음신앙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현전하는 국내의 자료가 없다. 일본 의 「정법사연기(頂法寺緣起)」에 성덕태자(574~622)가 고구려 광명사 소재의 여의륜관음상을 해안가에서 건져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려국 광명사상 (高麗國 光明寺像)’이라는 일곱 글자가 적혀있어 고구려 관음신앙의 자취를 유추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145) 또 고구려에 유학했던 일본 승려 행선(行善)

142) 『高僧法顯傳』(T51.2085, 866a1~6): 商人大怖 命在須臾, 恐舶水滿 卽取麤財貨擲著水 中. 法顯亦以君墀 及澡罐幷餘物 棄擲海中. 但恐商人擲去經像, 唯一心念觀世音 及歸命 漢地衆僧. 我遠行求法, 願威神歸流得到所止. 如是大風晝夜十三日 到一島邊.

143) 차차석, 「관음신앙의 중국적 變容과 그 문화적 특징」, 138.

144) 소수림왕 2년(372) 전진 부견왕의 사신 순도가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것이 고구려 불 교의 초전 기록이다. 이후 소수림왕은 성문사(373), 이불란사(375)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주석시켰다. 두 절이 한국 최초의 사찰로 기록되고 있다. 백제의 경우 인도 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A.D 384년(백제 침류왕 1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서해 법성포에 도착한 것이 초전 기록이다.

145) 김영태, 「삼국의 관음신앙」, 93.

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가 고구려에 구법 유학했던 시절 폭우를 만나 홍 수에 휩쓸릴 위기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니 마침 어떤 노인이 배를 저어와 구 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146) 수난의 구제를 모티브로 한 영험담이라는 점에서

「보문품」 소의의 관음신앙이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불교 신앙과 관련된 현존 자료들은 대체로 『법화경』 신앙 사례이다.

따라서 「보문품」 기저의 관음신앙이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불교 안에서 『법화경』 신앙이 성행한 것은 중국 남조 해양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동진 구법승이었던 백제승 발정(發正)의 일화를 들 수 있다. 경전 신앙의 차원에서 『화엄경』 지송자와 『법화경』 지송자의 대결 구도가 나타나고 있는데, 법화행자가 암송한 것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이며, 그 과정에서 노구로 현신한 관음보살의 역할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발정이 귀국하던 시기 월주 지역에 「보문품」에 근거한 관음신앙이 성행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기록은 제나라 육고의 『관세음응험기』에 수록되어 있는데 역 시 중국 남조 불교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무령왕 대에 남조의 문물 이 직수입되면서 불교문화가 함께 들어왔고 그 영향이 백제 사회에 넓게 확산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단항로를 따라 소량시대(簫梁時代)에 보타도에 서 성행하던 관음신앙을 발정이 백제에 전래해 왔다고 볼 수 있다.147)

한편 『청관음경』을 소의로 한 백제 관음신앙의 면모를 일본 선광사 창사 연기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청관음경』에 설해지는 ‘일광삼존불 (一光三尊佛)’, 즉 생신여래가 처음에 인도에서 신앙 되다가, 이후 백제에 비 천(飛遷) 하였으며, 다음에 일본에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다.148) 『청관음경』 신 앙을 보여주는 중국 남조의 연호가 새겨진 양류관음상이 발견되고 있는 점을 통해 볼 때, 남조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백제에 『청관음경』 신앙이 유입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普通) 2년이라는 연호가 새겨진 양류관음상이 확인되고 있는데, 발정이 양(梁)에 유학 갔다 돌아오던 시기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은 백제에 기근과 역병이 창궐했던 시기로, 치병의 공능이 있는 양

146) 『元亨釋書』 16 力遊 9; 『續日本記』 8; 『扶桑略記』 6 元正天皇條; 『本朝高僧傳』 67 원유 8. 등에 수록. 이 설화의 배경과 시기가 고구려로 나타나고 있는데, 행선의 귀환이 고구려 멸망 50년 뒤인 71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행선의 구체적 행적에 대해 선 논의의 여지가 있다(김영태, 「삼국의 관음신앙」, 96).

147) 송화섭, 「중국 보타도와 한국 변산반도의 관음신앙 비교」, 306-07.

148) 「善光寺の緣起」(김영태, 「삼국의 관음신앙」, 103에서 재인용).

류관음을 백제왕실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149)

또 태안의 북쪽 지역에 6세기 말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삼존상은 중앙에 관음보살이, 좌우에 아미타 또는 석가모니와 약사여래를 배치한 독특 한 양식이며150), 삼존상이 위치한 산의 이름이 보타락가산(Potalaka)의 음역 인 백화산(白花山)이라는 점에서 백제 불교 안에서 관음영장 신앙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해동고승전』 「석마라난타」 조에 “삼한의 염부제에 관세음보살의 궁전이 있는 월악이 있다.”151)는 언급도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융성했던 정황을 보여준다.

일본의 관음신앙과 연결하여 백제 관음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 으로 위덕왕 42(595)년 백제 공장(工匠)이 일본의 남해만에 떠내려 온 침수향 목으로 관음상을 조각하여 길야(吉野) 비소사(比蘇寺)에 안치했다는 일화가 있 다. 또 일본 백제사의 본존이 관음상이었는데, 이 절은 백제의 고승 혜총(惠 聰)과 도흔(道欣), 관륵(觀勒) 등이 성덕태자의 명으로 처음 주석하였기 때문에 백제사라고 명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덕왕 44년 3월에 도일하여 일본 묘 견(妙見)신앙의 개창자로 알려져 있는 임성(琳聖)태자 역시 관음신앙을 함께 전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으로 가져간 관음금상(觀音金像)을 거기에 살게 된 그의 후손들이 수호본존으로 삼았으며, 현재 일본의 산구시 신복사 소장의 목 조 십일면관음입상도 임성태자가 백제에서 가져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밖 에도 추고(推古) 원년(593) 4월 백제의 금동 구세관음상을 관파 사천왕사의 금당에 안치하였으며, 현재 내량의 약사사 동원당 본존 관음상도 백제에서 건 너간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현 법륭사(法隆寺)에 안치되어있는 세계적인 관음목상(觀音木像)을 백제관음(구다라관음)이라 부르고 있다.152) 이러한 기록 들을 통해 백제에 관음신앙이 매우 융성하였으며, 6세기 후반에는 일본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9) 강희정,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 57-60.

150) 최연식, 「月出山의 觀音信仰에 대한 고찰」, 220.

151) 『海東高僧傳』(T50.1065, 1017c08~12): 三韓在閻浮提東北邊 非海島矣. 佛涅槃後六百 餘年乃興 中有聖住山 名室梨母怛梨(唐言三印山)峻峰高聳. 觀世音菩薩宮殿在彼山頂 卽 月岳也. 此處聖住未易殫書 然百濟乃馬韓之謂矣.

152) 김영태, 「삼국의 관음신앙」, 10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