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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관음신앙의 교의적 기반과 특징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다양한 경전들이 유입되었지만, 관음신앙의 정착 및 신행의 토착화와 관련하여 주요한 토대가 된 것은 『법화경』과 『화엄 경』이다. 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법화경』 「보문품」

기저의 관음 신앙이 삼국 및 신라 사회에 우선 유통되었으며, 삼국 통일을 전 후한 시기에 화엄 사상가인 의상에 의해 화엄 수행자의 실천 방편으로 관음 신행이 현창되면서 신라 관음신앙의 새로운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 다. 이와 병행하여 확산된 미타신앙 안에서 정토왕생을 돕는 조력자로 등장하 는 관음보살의 면모도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중·하대로 진입하면서 밀교 변 화관음 신앙의 영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신라 시대 전반에 걸쳐 관음신 앙은 법화, 화엄, 정토, 밀교의 다층적 토대 위에서 신행의 특징을 구축해왔음 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관음신앙의 실천적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 토대는 무엇보다 『법화경』 「보문품」과 화엄 사상이었으며, 이를 기반 으로 신라 민중의 신앙적 귀의처로서 관음보살의 위상과 기능이 정립되었다고 할 것이다.

(1) 『법화경』 「보문품」 기저의 타력 독존 신앙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서 불교를 접하였으며, 공인 이후에 중국의 북조와 남조불교를 직접 수용하였다. 점차 남조 불교와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볼 수 있는데,153) 양 무제의 사신(捨身) 행위를 본받아 법흥왕과 진흥왕이 말 년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것이다.154) 양 무제는 열 렬한 법화 신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천감 17년에 무제의 윤언(綸言)에 의해 주현(州縣)마다 각기 『법화경』을 조성하였다.”155)는 기록을 통해서 그가 법화

153) 법흥왕이 양(梁)에 사자를 파견한(502)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를 공인하고(527년), 그 다음해(528년)에는 살생을 금지하고 있다. 진흥왕 대 들어서는 남조 국가와 교류가 더욱 적극적이었다. 진흥왕 26년부터 진평왕 대까지 사신 및 승려 파견 기록을 보면 진 (陳)에 보낸 것인 7번, 북제(北齊)에 보낸 것이 일곱 번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법흥왕 이후 신라 왕실의 불교에 북조보다 남조의 영향이 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박광연,

「신라중고기 법화신앙」, 72).

154) 신종원, 「신라의 불교전래와 그 수용과정에 대한 재검토」, 189.

155) 『法華傳記』(T51.2068, 81a26~27): 梁天監十七年 依武帝綸言 每州縣各造法華經.

신앙을 적극적으로 현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최초의 유학승으로 알려진 각덕(覺德)이 양(梁)에서 불교를 배우고 549년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고, 565년에는 명관(明觀)이 진(陳)에서 불경 1,700여 권을 들여왔다는 기록도 신라와 남조불교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 준다.156) 이 과정에서 남조에서 유행했던 법화 신앙이 신라 사회에 자연스럽 게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법화신앙의 유통은 관음신앙과 직결된다는 점 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후 중고기 불교 안에서 「보문품」 기저의 관음신앙을 추동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법화신앙자로서 직접 천태 지의에게 배우고 신라로 돌아왔다고 하 는 연광(緣光)에 대한 기록이 『홍찬법화전』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연광은 수대 인수 연간(601-604)에 천태 지의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면서 지의로부 터 깨달음을 인정받고 『법화경』을 강의하였으며, 그 후 천태 별원에서 마하지 관을 닦는데 힘쓰다가 신라로 돌아와서 고향에서 『법화경』을 홍통하였다고 한 다. 『삼국유사』의 「낭지승운보현수」조에서 낭지(朗智)는 법화신앙자로서 삽량 주 영취산에 은거한 채 원효(元曉)와 지통(智通)을 가르친 스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진골 귀족의 노비 출신이었던 지통이 661년(문무왕 원년)에 출가하고자 낭지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통해 그의 이름이 경주의 하층민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57) 이처럼 7세기 초 신라불교 안에서 법화 신앙은 유학 승려들의 활동에 힘입어 대중성을 확보하였고, 원효 등 엘리트 승려들의 주목을 받으며 신앙 기반을 구축하였다.158)

『법화경』을 소의로 하는 신행 실천의 양상은 크게 관음신앙과 보현신앙으로 나타난다. 남북조시대 『법화경』 지송과 연구를 주도했던 구마라즙 문도 가운

156)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조: 十年, 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逸佛舍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 陳遣使劉思與僧明觀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157) 남동신, 『원효』, 111.

158) 7-8세기 신라 승려들이 『법화경』 관련 논서를 많이 찬술하고 있는 것에서도 신라 법 화신앙의 융성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원효의 『법화경종요』 1권, 『법화경방편품 료간』 1권, 『법화략술』 1권, 경흥의 『법화경소』 16권, 순경의 『법화경료간』1권, 현일의

『법화경소』 8권, 도륜의 『법화경소』 3권, 태현의 『법화경고적기』 4권 등이 있다. 의적 의 것으로도 『법화경론술기』 3권, 『법화경집험기』 외에 『법화경강목』 1권, 『법화경료 간』 1권이 더 있다. 원효의 『법화경종요』와 의적의 『법화경론술기』밖에 남겨진 것이 없 어서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제목을 봤을 때 대부분 논서들이 『법화경』 주석서 또는 요약본이다(김영태, 「삼국시대의 법화신앙과 그 수용」, 11-40; 박광연, 「의적의 『법화경 집험기』 편찬 배경과 특징」, 274).

데 승찬, 혜심 모두 『법화경』 독송을 업으로 하였으며 보현보살이 앞에 나타 나는 감응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지의의 천태교학은 항상 선관의 병행을 강조 하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지의가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보현관경)』

을 중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의와 더불어 『법화경』 연구의 대가로 꼽히 는 길장 또한 보현보살을 존숭하여 장막 앞에 별도로 보현보살상을 두고서 마 주 앉아 좌선하며 실상의 이치를 관하는 등 보현행을 강조하였다. 낭지 역시

『법화경』을 독송하며 보현보살의 감응을 기대하였다고 한다.159) 그런데 보현 신앙은 『법화경』 독송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반 재가자의 신앙이 되기 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 민중들이 경전의 독송, 억념 등의 수행을 할 만큼 의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보현신앙은 출가자의 전유물이 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0)

이에 비해 관음신앙은 위난에 처했거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관음보 살의 도움을 구하는 타력 신앙으로서 문자 해독력이 약한 일반민들까지도 수 용할 수 있는 신앙 기제였다고 할 것이다.161) 그리고 이처럼 『법화경』 「보문 품」을 기저로 하여 신라인이 주체가 되는 관음신앙의 사례가 7세기에 이르러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자장(자장의 출생과 관련된 기사를 들 수 있다. 자장(慈藏)의 부친 김무림(金茂林)이 진덕왕대(647-654) 국사에 참여했 던 진골 귀족으로 아들을 낳고자 하는 원력을 담아 천부의 관음상을 만들었으 며, 이를 통해 자장을 낳았다는 것이다.162) 이구양원의 시혜자로서 관음보살 에 대한 신앙을 보여주는데, 타력적 구호자로서 관음보살의 기능과 역할에 대 한 보문품적 이해가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는 보살상의 조 성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표1 > 현존 7세기 신라 보살상163)

159) 박광연, 「의적의 『법화경집험기』 편찬 배경과 특징」, 82-83.

160) 박광연, 「의적의 『법화경집험기』 편찬 배경과 특징」, 90.

161) 『법화경』의 관음신앙과 보현신앙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석도경(釋道冏)이 있 다. 석도경은 늘 『법화경』을 독송하며 보현재(普賢齋)를 열고, 보현상(遍吉之像)을 장엄 하기에 열중하였다. 그런 그가 얼음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정성껏 관음보살에 귀의하여 살아났다고 한다(『弘贊法華傳』, T51.2017, 14a9-b5).

162) 『삼국유사』, 권4 의해편, 「慈藏正律」.

163) 박광연, 「신라 중고기의 법화신앙」, 77-78.

시기 상명(像名) 형식 도상

7세기 초반

국립경주박물관 금동보살입상 독존

국립경주박물관소장 금동보살입상 독존

삼양동출토 금동보살입상 독존 관음

7세기 중반

선산출토 금동보살입상(국보183) 독존 관음

선산출토 금동보살입상(국보184) 독존 관음

호암미술관소장 금동보살상 독존 관음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보살입상 독존 관음

숙수사지출토 금동보살입상 독존 관음?

영월출토 금동보살입상 독존 관음?

호암미술관소장 금동보살입상(보물780) 독존

삼척출토 금동보살입상 독존

배동삼체석불 우협시보살상 삼존 대세지

배동삼체석불 좌협시보살상 삼존 관음

삼화령미륵삼존불 우협시보살상 삼존

삼화령미륵삼존불 좌협시보살상 삼존

선도산마애불 우협시보살상 삼존 대세지

선도산매애불 좌협시보살상 삼존 관음

영주가흥동삼존불 우협시보살상 삼존

영주가흥동삼존불 좌협시보살상 삼존

7세기 후반

군위삼존불 우협시보살상 삼존 대세지

군위삼존불 좌협시보살상 삼존 관음

안압지출토 삼존판불우협시(1) 삼존

안압지출토 삼존판불좌협시 삼존

안압지출토 삼존판불우협시(2) 삼존

안압지출토 삼존판불좌협시 삼존

계유명아미타불비상 우협시 삼존 대세지

계유명아미타불비상 좌협시 삼존 관음

계유명 아미타삼존천불비상 우협시 삼존

계유명 아미타삼존천불비상 좌협시 삼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