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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및 신라 관음영험담의 유통 양상

한국불교 안에서 가장 최초로 확인되는 영험집은 의적이 7세기 후반에 집록한 『법화경집험기(法華經集驗記)』197)이다. 대체로 중국의 영험기를 채록 한 것으로 31편의 이야기를 선집하였다. 앞에서 거론한 『관세음응험기』는 물 론 『금강반야영험기』, 『집신주삼보감통록』 등에서 법화영험담을 뽑아서 이를 4편으로 분류하여 편찬했다.198) 의적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금산사 에 주석하였다. 이때 『법화경집험기』를 편찬하면서, 이 책의 하권에 육고의  관세음응험기의 부록으로 실렸던 백제의 승려 발정(發正)의 이야기가 싣고 있다.199) 발정의 설화가 중국 영험집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부기 의 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최소한 6세기 전후로 백제에 적잖은 영험 담이 존재했으며, 그것이 중국의 초기 영험담과 함께 엮어져 동아시아에 두루 퍼져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주지하다시피 백제에는 법화 신앙이 융성하였다. 양(梁)에서 활동하다 성왕 때 귀국한 발정(發正), 천태종 2조로 불리는 남악 혜사(慧思, 514~577) 문하 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하고 위덕왕 때 귀국한 현광(玄光), 그리고 혜 왕, 법왕, 무왕 초기까지 활약한 혜현(慧現)의 존재가 백제 불교 안에서 법화

197)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영험전인 『법화경집험기』는 1980년 이전까지 유실되어 전하 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가 일본 동경대학도서관에 필사본이 소장되어오고 있음이 확인되 었다(이기운, 「신라 의적의 『法華經集驗記』(Ⅰ)」, 39).

의적의 『법화경집험기』는 고려사회에서는 유통되지 않은 듯하다. 의천의 『신편제종교장 총록』에 실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총록』에는 『법화경』과 관련한 영험전으로는 ‘傳 10권 慧詳述’만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혜상의 『홍찬법화전』으로 『법화경』에 대한 감응사례를 원상, 번역, 강해, 수관, 유신, 송지, 전독, 서사 편으로 나누어 수록하고 있다. 중국의

『고승전』, 『속고승전』 등에서 채록한 것으로 동진으로부터 당까지의 사례들이다(김영미,

「고려 후기 『법화경』 영험담 유포와 그 의의」, 111).

198) 김상현, 「의적의 『법화경집험기』에 대하여」, 21. 특히 당대 도선(596-665)이 찬술한

『집신주삼보감통록』에서 많이 발췌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은 도선이 664년에 편찬한 것 으로 의적의 『법화경집험기』와의 간극은 의외로 짧다. 7세기 후반에 활약한 의적은 일 반적으로 현장(602-664)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도선의 문하에 출입했을 가능 성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의적은 도선의 집록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와 이 책을 펴 낸 것으로 판단된다(정환국, 「나려시대 불교 영험서사의 유형과 서사적 특질」, 139-40).

199) 박광연, 「의적의 『법화경집헙기』의 편찬 배경과 특징」, 282.

사상 및 신앙이 활발하였음을 말해준다.200) 『법화경집험기』의 찬술은 전교의 차원에서 법화경 강독의 영험함을 믿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 라고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법화영험담의 양태는 대체로 전쟁 등 현세의 환란에서 구원을 받는 유형과 저승체험 및 생환의 주제로 대별되는데, 의적의 『법화경 집험기』는 후자를 대폭 수용하고 있다.201) 즉 『법화경』 독송의 공덕으로 죽어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해줄 수 있고,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할 수 있음 을 강조하는 내용을 많이 싣고 있다. 이는 통일 전쟁 이후 어수선한 신라 사 회에서 신라 백성과 유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적의 『법화경집험기』 이후에 해동의 영험담이 본격적으로 채록된 것은 고 려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우선 진정국사 천책의(1206-)의 『해동법화전홍록』을 들 수 있다. 이 영험집은 1236년 이전에 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원의 침략으로 대몽항쟁의 차원에서 팔만대장경이 조성되던 때였다.

이와 함께 ‘호국’의 기치 아래 불교 관련 저술이 잇따랐다. 또한 고려시대 법 화영험전의 찬집과 유통이 이루어진 것은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되면서 법화신앙이 홍통되게 된 시대 정황을 반영한다고도 할 것이다.

이어 14세기 후반에 찬집된 요원의 『법화영험전』202)은 나려불교사에서 형 성된 법화영험서사의 전통을 다시 잇고 있다. 천책의 『해동법화전홍록』과 함 께 12세기 초에 고려사회에서 유통되었던 『홍찬법화전』의 교감본이 이 책의 중요한 전거가 되었다.203) 『법화영험전』의 서문에 의하면 요원은 주로 당 혜 상의 『홍찬법화전』, 송 종효의 『법화경현응록』과 고려 진정국사 천책의 『해동 전홍록』을 읽어보고, 그 가운데 기이하고 특이한 것들을 뽑아 수록하였다고

200) 박광연, 「의적의 『법화경집헙기』의 편찬 배경과 특징」, 283.

201) 정환국, 「불교 영험서사의 전통과 법화영험전」, 50.

202) 현재 전해지는 『법화영험전』의 판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皇明嘉靖十三年 甲午六 月日 全羅道高敞 文殊寺重鋟本’(卍續藏經 134)이며, 또 하나는 ‘順治九年 壬辰二月日 全羅道 寶城郡 五峯山 開興寺 重刊本’(한불전 6)이다. 즉 전자는 조선 중종대(1534)이 며, 후자는 효종 3년(1625)으로 100여년을 전후로 간행되었다(오지연, 「법화영험전의 신앙유형 고찰」, 384).

203) 이것이 정확히 언제 고려로 수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전하는 『홍찬법화전』에 는 12세기 초에 고려에서 교감본이 나온 정황이 부기되어 있다. 『홍찬법화전』 권5와 권 10 말미의 내용에 의하면, 본서는 중국에서 저술되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널리 전해졌 으나 나중에 중국에서는 판본이 없어지고 오직 고려에만 초본(草本)이 남아있어서 그것 을 가져다 오자(誤字)를 잡고 내용을 검토하여 다시 판각한 것이라고 한다(정환국, 「불 교 영험서사의 전통과 법화영험전」, 141-42).

한다.204) 따라서, 이 세 가지 저술은 『법화영험전』의 주요 출처가 된다. 그 밖 에도 『영서집(靈瑞集)』, 『사부관음전(謝敷觀音傳)』, 『법원주림전(法苑珠林傳』)』

과 여러 고승전 등 총 20여 종의 저술을 출처로 하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인용된 것(76회)은 『홍찬법화전』이다. 이 땅 민의 독자적인 신앙 사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해동법화전홍록』을 비롯해 『홍찬법화전』,

『법화경현응록』 외에도 『관세음응험기』, 『해동고승전』 등 중국과 해동의 영험 담을 두루 망라하여 종합적인 집성을 시도하였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205)

이처럼 고려 시대 불교 문헌의 찬술과 관련하여 김대문(金大門, 7세기 후 반~8세기 전반)의 저작으로 알려진 것들 중에 고승전과 계림잡전(鷄林雜 傳) 등을 주목해 볼 만하다. 두 저작 모두 현존하지 않아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고승전의 경우 해동의 고승들을 입전한 고승전 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해동고승전의 전신이 될 만하다.206)

『해동고승전』은 『해동법화전홍록』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215년에 각훈이 10 책을 찬술한 것이다. 해동전홍록은 사부중의 영험 사례가 중심이었을 것으 로 판단되는데, 이에 비해 해동고승전은 고승들의 사적에 두어 편찬된 것으 로 보인다. 이 두 저작은 앞선 시기 신라의 김대문과 의적의 1차 집성에 이은 고승전과 영험기의 2차 집성이라는 점에서 신라 및 고려로 이어지는 불교 문 학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저작은 다수가 일실되고 일부분 만 남아있어 그 전모를 알 수 없다.207)

한편 계림잡전과 관련하여 14세기 요원의 법화영험전 등에 출전을 ‘계 림고기(鷄林古記)’로 밝힌 사례들이 보인다. 여기서 ‘계림’은 신라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신라 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 영험담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 다. 또한 이와 같은 류의 저술로 현존하는 수이전(殊異傳) 일문(逸文)을 볼

204) 허흥식은 『민장사기』나 『해동고승전』과 같은 우리나라 저술에서 인용되었거나 출전이 표시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 관련 영험담들 또한 『해동전홍록』에 실렸을 가능성이 크다 고 보았다(허흥식, 『진정국사와 호산록』, 50-52). 『법화영험전』에서 출전을 실제로 『해 동전홍록』이라고 밝힌 것은 8편이지만,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인용사례가 더 있을 가능성 을 배제할 수 없다.

205) 정환국, 「불교 영험서사의 전통과 법화영험전」, 144.

206) 정환국, 「나려시대 불교 영험서사의 유형과 서사적 특질」, 139.

207) 정환국, 「나려시대 불교 영험서사의 유형과 서사적 특질」, 140.

수 있는데, 제목과 내용을 통해 볼 때 수이전 역시 기속의 변괴담이거나 불가 영험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말여초 시기에 수이전을 기점으로 다수의 응험기가 유통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중국에서 5세기를 전후로 하여 고승전과 불가 영험담이 성립된 것과 마찬가지로 삼국 및 신라 불교 안에서도 7세기를 전후로 하여 고승전의 찬술이 시도되었고, 또한 사부중의 불가 영험 담이 성립되어 하나의 서사 유형으로 자리했을 것으로 보인다.208)

이상의 검토를 통해 볼 때 동아시아 불교 신앙에서 영험담이나 기이담의 발 생은 관음신앙의 전개를 통해 그 단초가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각종 재난 에서 칭명이나 경구의 암송이라는 간명한 신행을 통해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 을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은 일반 민중의 실존 속에서 타력적, 유신론적 신행이 형성되는 바탕을 제공했고, 그에 따라 실제로 관음보살의 영응을 체험한 신앙 사례들이 창출되면서 신이나 기이를 주제로 하는 영험담이 불교문학의 한 갈 래로 노정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육도(六道)로 정형화된 불교 세계관이 수용되면서 생천 또는 지옥 등 내세와 연결된 생사관이 자리매김한 것도 명계 에서의 구제와 같은 신앙 담론 들이 유통되면서 『법화경』 등 경전을 매개로 한 타력 신행이 확산되는 기반을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중국불교 안에서 형성된 이와 같은 신앙 담론 들을 발췌하여 대중 교화를 목적으로 이 땅에 편집 유통시키고자 했던 가장 우선적인 사례가 『법화경집험기』(7세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험담의 유통은 『삼국유사』를 통해 보듯, 이 땅 민들이 주체가 되는 다양한 영험 사례 들이 창출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탑의 건립이나 불보살 성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그 정당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연기 영응 설화들이 창출되면서 불교문학의 영역을 구축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불교 안에서 영험집의 편찬 유통이 가장 활발 했던 시기는 고려시대 후반이다. 이는 남북조시대 혼란기에 민중들의 귀의처 로 각종 영험담이 활발하게 창출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혼 란했던 고려 당대의 정치사회적 정황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책 의 『해동전홍록』(13세기)과 요원의 『법화영험전』(14세기)은 의적의 『법화집험 기』를 필두로 신라 고려로 이어지는 법화영험 서사 전통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208) 정환국, 「나려시대 불교 영험서사의 유형과 서사적 특질」,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