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관음보살 수용의 초기적 특징

불보살이 이 땅 민들의 신앙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외래의 신 성이 갖는 생경함과 부정합적인 요소들을 상쇄시키는 기제들이 동원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이 땅을 전불지(前佛地) 혹은 불연국토(佛緣 國土)로 상정하는 담론의 형성이라고 할 것이다. 대체로 한반도 내 특정의 장 소가 이미 불보살의 주처이자 전세에 인연이 있던 장소라는 형태의 서사로 나 타난다. 이는 불보살을 이 땅의 신성으로 치환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관음보살 또한 전래 초기에 중국을 넘어 멀리 인도에서 출현한 외래 신성으로 서의 이미지가 강했을 터이며, 따라서 이 땅의 신격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관음보살의 성지가 조성되는 인연을 밝히는 창사 연기설화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확인되는 창사 연기설화 가운데서 통일 이전 창출되거나 유통된 관음관련 기사들에서 관음보살은 대체로 해양을 통해 이 땅에 인연처를 찾아 도래하는 외래 신성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양 도래의 서사가 많이 나타나 는 것은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라는 지정학적 요건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 는데280), 특히 백제의 영토였던 서해안 지역에서 많이 확인된다. 살펴보면 다 음 표와 같다.

< 표5 > 서해안 지역 관음 성지 연기설화281)

280) 해양을 통해 외래의 신성이 이 땅에 유입되는 서사들은 『삼국유사』에서도 두루 확인 된다. 석탈해 신화에서 궤를 실은 배가 가락국 해안에 닿았다가, 다시 인연처를 찾아 결국 아진포에 표착하는 내용이 있다(『삼국유사』 권2, 기이편, 「탈해왕」). 또한 신라 진 흥왕 때에 장육존상을 주조할 황금을 실은 배가 석가 삼존상을 안치할 인연 국토를 찾 아 신라의 해안에 표착하는 내용이 나타난다(『삼국유사』 권3, 탑상편, 「황룡사 장육」).

유점사 관련 설화에도 금강산으로 53불이 배를 타고 와 주처를 찾아 흩어지는 설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이곡은 ‘금강산 동남쪽에 유점사(楡岾寺)에 대종(大鍾)과 53 불(佛)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신라 시대에 53불이 이 종을 타고 서쪽 천축(天竺)으 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고성의 해안에 정박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유점사까지 와서 멈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李穀, 『가정집』 제5권, 「동유기」).

281) 이들은 대체로 서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관음사찰들에 대한 창사 및 중창의 내력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사료비판의 관점에서, 관음 성지로서의 위상을 강조하거나 사격 을 고양하기 위해 후대에 견강부회된 측면을 배제할 수 없지만, 통일 이전 7세기 초 백 제 해안가를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유입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수용 초기 관음보살 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을 확인하고, 통일 이후 이 땅 본연의 신성으로 관음보살의 존 격이 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설화들과 비교하여 신라 관음성지 연기 서사의 변이를 추적할 수 있는 모티브들이 담지 되어 있다는 점에서 검토의 의미가 있다.

장소 및 시기 모티브와

설화의 성격 성현유형 시기

관음사/백제 해양도래/창사연기 관음금상 396년

위의 표에서 확인되는 사찰들은 모두 한반도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음보살 성지이다. 이처럼 서해안 자락을 따라 관음성지가 현성될 수 있었던 데에는 백제 불교의 초전자인 마라난타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마라난 타는 관음 신봉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진을 거쳐 침류왕 원년(384)에 배를 타고 백제에 도래하여 왕도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서해안의 항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가람조성의 조건이 좋은 인연처를 찾아 불교 전파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282) 백제는 사단항로의 뱃길로 양과 문화교류를 했으며, 불교 전래와 함께 남조를 통해 수용된 대표적인 불교 신성이 관음보살이었음을 알 수 있 다. 『해동고승전』 「석마라난타」 조에는 백제의 성주산(聖住山)과 월악(月岳)에 관음보살의 영장(靈場)이 있음을 전하고 있는데283), 역시 일찍이 관음신앙에 유행했던 정황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백제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관 음영장이 많이 건립되었던 정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사찰과 관련된 창 사 연기설화들은 대부분 해양을 통해 도래한 외래 신성인 관음보살을 인연 주 처에 봉안한다는 구조를 보여준다.

가장 이른 시기의 관음 도래담으로 전라도 곡성의 관음사 창건설화를 들 수 있다. 이 설화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增補校正朝鮮寺刹史料』 상(上) 「玉果 縣聖德山觀音寺事蹟」에 실린 것이다. 여기에 ‘진국(晋國) 사람이 영강(永 康)284) 정해(丁亥)년(396) 5월에 옥과현으로 관음신앙을 전래하였다.’고 기록

282) 마라난타는 동진의 건강에서 출발하여 사단항로(斜斷航路)를 이용하여 영산강 하구 유역에 위치한 법성포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절강지역과 백제 사이의 사단항로 는 동성왕대에 개척되었는데, 웅천 천도를 단행한 이후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 해양세 력을 회복하고자 서해남부의 신항로를 개척하여 남조와의 문화교류를 도모했던 것이다 (송화섭, 「변산반도의 관음신앙」, 77).

283) 『해동고승전』 「석마라난타」 (T50.2065, 1017c8~12).

성덕/홍장 대참사/백제 해양도래/창사연기 우전국왕(금인),

나한상

627-649 년

내소사/백제 불사(佛事) 목수, 觀音鳥 633년

월명암/ 백제 해양도래/창사연기 비구, 비구니, 동자부처

실상사/통일신라 해양도래/창사연기 석상 689년

되어 있다. 시대적 배경에 따른 연대 추정에 신빙성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백제 시대에 해로를 이용한 관음신앙 전래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285)

설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복합되어 있다. 하나는 대 흥 땅에 사는 맹인 원량과 그의 딸 홍장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조선 시대에 이 르러 심청전이라는 소설문학 장르로 확장 재생산된다. 다른 하나는 옥과현의 처녀 성덕이 바닷가에서 우연히 홍장이 보낸 배를 만나 관음금상을 발견하고, 성덕산에 절을 세워 그 상을 봉안했다는 창사 연기담이다. 여기서 홍장과 성 덕은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비정되고 있다.286) 현 성덕산에 관음영장이 건립되 는 과정을 해양 도래의 모티브를 동원해 제시하고 있다. 홍장과 성덕을 관음 의 수응으로 비정하는 사고는 백제 지역에 지속적으로 『법화경』 신앙이 확산 되면서 「보문품」기저의 관음화신 관념이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진 신으로서 관음보살의 상징성은 성덕의 등에 업혀가던 관음보살상이 성덕산에 이르러 갑자기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가 없어 그곳이 인연 주처임을 알고 봉안 했다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관음상 자체의 위신력이 부각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성덕산은 관음보살의 영장으로서 신성성을 담보하게 된다.

이처럼 이방 신성인 관음보살이 바다를 건너와 이 땅에 인연 주처를 찾아 자리매김하는 서사들이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서해안 변산반도 지역에 집중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6세기 초에 이루어진 절강 지역과 사단항로의 뱃 길을 통해 이루어진 활발한 문화 교류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에서 보 듯 대참사(大懺寺), 선운사(禪雲寺), 월명암(月明庵), 실상사(實相寺) 내소사 등 6-7세기경에 창건된 이들 사찰은 백제의 불교가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초 전 된 이후에 서해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점차 내륙으로 확대되어 갔음을 보여

284)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 후연(後燕)의 왕인 열종(烈宗: 396년 ~ 398년)의 연호.

285) 성덕산 관음사 창건 설화는 백제시대의 사실이지만 구전해오다가 조선 후기(영조 5 년, 1729년)에 기록으로 채록된 것이다. 현재 성덕산 관음사 연혁에는 창건 시기를 분 서왕 3년(30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백제에 불교가 공전되기(384) 수 십 년 전의 일이다(송화섭, 「변산반도의 관음신앙」, 78). 김영태는 설화에 나타난 ‘진 (晋)’이라는 국명을 통해, 당대 충남 대흥과 전남 낙안 및 곡성 일대가 포함되는 동국은 당연히 백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동진(東晋, 317~420)시 대이기 때문이다(김영태, 『삼국시대 불교신앙 연구』, 217). 창사 연기담이 조선 시대에 까지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성덕산 관음사가 지속적으로 관음보살 영장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며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286) 「玉果縣聖德山觀音寺事蹟」, 『增補校正朝鮮寺刹史料』 上, 224-48(오대혁, 「‘관음사연 기설화’와 형성기 『심청전』의 불교사상」, 73-75 참조).

준다.287) 그리고 이 사찰들이 모두 관음신앙을 표방하고 있다.

우선 대참사의 연기설화를 살펴보면 도솔암 앞에 있는 법화굴에서 수도하던 의운 화상이 산 아래 죽도 포구에 표착한 석선에서 불경과 불상, 나한상을 모 셔왔다는 내용이다. 성덕산 관음사 창건담과 마찬가지로 중국 남조를 거점으 로 형성된 관음신앙이 해양을 건너 해동의 인연처를 찾는 서사를 보여주고 있 다. 대참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대참사의 개산조사는 신라시 대 의운(義雲)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대참사사적기』에는 창건연대를 정관 (627-649) 년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의운화상은 법화굴에서 수도하던 중 선운 산 아래 죽도 포구에 들어온 석주를 맞이하여 금인으로부터 불경, 불상, 나한 상, 아주(牙籌), 금자보인(金字寶印)을 받아 봉안하여 현재의 대참사를 창건하 고 있다. 의운의 꿈에 나타난 아주를 든 금인의 모습이 현 선운사 영산전 좌 측 벽에 그려진 관세음보살도에 등장하는데 이는 대참사가 관음사찰로 건립되 었음을 보여준다.288) 석주에 실려 있던 불상은 관음보살상으로 추정할 수 있 다. 법화굴에서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운은 법화행자이면서 동시에 관음신봉자 였을 것이다. 우전국왕으로 묘사된 금인은 관음보살의 화신에 비정될 수 있을 것이다. 『법화경』 「보문품」에 제시된 화신의 유형 가운데 ‘국왕’이 있기 때문 이다. 관음성지로서 대참사 건립의 당위성과 신성성이 「보문품」을 기저로 한 관음 성현의 관념을 토대로 구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월명암 창건 연기설화에도 이와 유사한 구조가 확인된다. ‘관선불(觀仙佛)’

이란 마을에 목선 한 척이 떠내려 왔는데, 한 승려와 동자부처가 타고 있었 다. 그들이 하선하려 하니 물 위로 바위가 솟아났고, 하늘에서 오색찬란한 빛 이 발산하더니 앳된 여승이 나타나 바라를 두들기고, 불현듯 동자부처가 앉아 있었다. 동자부처는 스님의 안내를 받아 월명암으로 갔다는 이야기이다.289) 여기서 ‘관선불’이라는 마을 명칭은 이곳이 관음보살의 영장임을 의미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월명암이 예로부터 관음보살을 모신 성지로 여겨져 왔음을 추정케 해준다. 내변산의 월명암은 오늘날에도 관음보살 성지로서 대 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로 알려져 있다.

연기설화의 내용은 관선불 마을에 표착한 목선에 실려온 동자부처를 월명암

287) 송화섭, 「변산반도의 관음신앙」, 78.

288) 송화섭(2002), 위의 논문, p. 79.

289) 양규태, 「석선을 타고 온 실상사 관음보살」, 『변산에 가면 문화를 만난다』,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