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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진신상주 신앙 건립의 의미

(1) 화엄법계관에 근거한 관음신성의 토착화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지 신앙의 초기적 전개의 과정에서 관음보살은 이 땅의 인연 주처를 찾아 도래한 이방

신성으로 인식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통일 이후 신라 사회에서 관음보 살의 신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승 교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외래의 이방 신성이 아닌 이 땅 본연의 신성으로서 관음보살 상주의 관념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진신성현의 관념을 바탕으 로 의상에 의해 건립된 낙산 관음 성지 신앙이 원형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것 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삼국유사』 탑상편의 「낙산이대성」 조는 의상이 자 내증을 통해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는 서사를 담고 있다. 『화엄경』 「입법 계품」의 관음 주처 사상을 모티브로 본래 이 땅에 상주하는 관음보살 진성의 관념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의상전교」조에 의하면 661년 신라가 백제를 병합한 후 중국에 건너가 구법 활동을 하였던 의상은 스승 지엄의 사후 중국 각 지역을 편력하 다가 670(1)년 귀국하였다. 의상은 신라로 돌아온 후 동해 해변가에 관음상주 처를 건립하고 이어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에는 의상이 문무왕 16년에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의상은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아 교화를 펼치며 제자들을 양육하였 으며, 이처럼 의상에 의해 형성된 해동화엄은 부석종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 치원의 『법장화상전』에는 의상의 교학이 십산(十山)에 펴졌다고 전하고 있 다.294) 이처럼 왕경이 아닌 지방에 화엄전교의 터를 건립하면서295) 화엄사상 가로서 의상의 실천성이 드러나는 것은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통해서이다.

『삼국유사』는 낙산 관음성지 건립의 기사를 부석사 창건담과 별개로 서술하면 서 의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신라 동북방의 특정 해안을 관음보살 진신의 상주처로 확증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옛날 의상(義湘)법사가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 294) 전해주, 『義湘 華嚴思想史 硏究』, 281.

295)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시기 신라는 통일전쟁의 막바지에 진입해 있었고, 왕경을 중심 으로 하는 중앙 교단은 법상 유식 계열의 승려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문무왕 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유가계가 여타의 불교 사상들에 대해서 배타적이었다 는 것은 『宋高僧傳』 「원효전」에서 원효가 백고좌 법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고 언급한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석길암, 「義湘의 行路와 사상적 변화에 대한 고찰」, 98). 이와 함께 일체의 경론과 사상의 회통과 종합을 지양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따라 서 화엄 사상 전문가였던 의상이 신라 왕경의 불교인들에게 쉽게 수용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황이 의상이 동북방의 명주지역을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요 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김복순, 『신사조로서의 신라 불교와 왕권』, 133, 139).

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고 듣고 낙산(洛山)이라고 이름 하였으니, 대개 서역(西 域)의 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 하 는 것은 백의보살(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려 지은 것이다. (의상이) 재계(齋戒)한지 7일째 새벽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龍天)의 8부(八部)가 굴속으로 인도하였다. 허공을 향해 예배드리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東海)의 용 역시 여 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 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상(像)을 빚어 모시니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엄연히 하늘이 낸 듯 했다. 대나무가 다시 사라졌는데, 그제야 그 땅이 진신의 주처임을 알았다. 이 로 인해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고 하고, 법사는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 고 떠났다.296)

내용에 의하면 의상이 관음을 친견한 동해 해변굴이 위치한 지역을 ‘낙산’

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는 대개 서역에 보타락가산이 있는 까닭이라고 하고 있다. 현 낙산사가 위치한 동해변의 지형학적 조건이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타나는 관음보살의 주처와 유사한 데서 착안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의상 이 서역에 백의보살의 진신이 머무는 보타락가산이 있음을 알았고, 그 이름을 빌려서 ‘낙산’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이는 인도에 실재해 있는 관음상주처 인 ‘보타락가산’을 의상이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전범으로 신라의 낙산 성지

296) 『삼국유사』 권3, 탑상편, 「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 昔義湘法師始自唐来還, 聞 大悲真身住此海邊崛内, 故因名洛山, 盖西域寳陁洛伽山. 此云小白華乃白衣大士真身住䖏 故借此名之. 齋戒七日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引入崛内. 叅禮空中出水精念珠一貫給 之湘領受而退. 東海龍亦献如意寳珠一顆師捧出. 更齋七日乃見真容. 謂曰, “於座上山頂 雙竹湧生, 當其地作殿冝矣.”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塑像而安之, 圎容 䴡質儼若天生. 其竹還没. 方知正是真身住也. 因名其寺曰洛山, 師以所受二珠鎮安于聖殿 而去. 後有元曉法師継踵而來欲求瞻禮, 初至於南郊水田中有一白衣女人刈稲. 師戱請其 禾, 女以稲荒戱荅之. 又行至橋下一女洗月水帛. 師乞水女酌其穢水献之. 師覆弃之更酌川 水而飮之. 時野中松上有一青鳥呼曰, “休醍□和尚.” 忽隠不現. 其松下有一隻脫鞋. 師旣 到寺觀音座下又有前所見脫鞋一隻. 方知前所遇聖女乃真身也. 故時人謂之觀音松. 師欲入 聖崛更覩真容, 風浪大作不得入而去(본 연구의 텍스트로서 『삼국유사』의 본문과 이에 대한 해석은 한국사DB(http://db.history.go.kr.)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필자의 관점에 서 첨삭 조정하였다. 이하의 사례에서도 동일함).

를 건립한 것임을 전제하는 언급이라고 할 것이다.

의상은 재계를 통해 신라 국토 안에 상주하는 관음보살을 자증(自證)하고 있다. 그리고 자증의 내용은 화엄경설이 기반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 계 후 일주일 만에 의상이 좌구를 물 위에 띄우자 용천 팔부의 신중이 그를 해변굴로 인도했다는 화소는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바다 위의 산, 보배 장엄, 샘과 못과 시냇물을 갖추었다.’고 하는 관음보살 주처에 대한 묘사와 유 사하다.297) 40 『화엄경』의 게송에서 용천 팔부 등 화엄성중(華嚴聖衆)으로 표 상되는 관음보살의 권속(眷屬)에 대한 묘사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금강굴에는 갖가지 아름다운 마니보배로 장엄하였고, 용맹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나는 항상 보석 연화좌에 앉아 있노라. 천, 룡과 아수라 대중과 긴나라, 가루라왕, 나찰 등, 이러한 권속들에 항상 둘러싸여, 나 는 항상 대비문을 설하노라.298)

이를 통해 볼 때, 의상을 해상의 굴로 인도해 간 용천 팔부 역시 관음보살 의 권속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 신앙의 영역에서 용천 팔부의 신중은 무한한 힘을 가지고 불법을 옹호하는 신중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의 수행 궤적에서 용과 신중이 그를 위호(衛護)하였다는 설화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는 데, 의상이 당에서 종남산 도선율사에게 초청받았을 때도 신병들이 그를 호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99) 또한 부석사 건설과 관련하여 전해진 선 묘룡의 설화를 볼 수 있다.300) 위의 낙산 설화에서도 수호신중으로 출현하고 있는데, 이는 화엄수행자로서 의상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금강굴에 대응되는 해변굴, 마니보배의 장엄 같은 화소는 허공과 용왕으

297) 『華嚴經』(T10.279, 366c3~9): 善男子。於此南方 有山 名補怛洛迦 彼有菩薩 名觀自 在 … 卽說頌曰 “海上有山多聖賢  衆寶所成極淸淨 華果樹林皆遍滿  泉流池沼悉具足  勇猛丈夫觀自在 爲利衆生住此山 汝應往問諸功德 彼當示汝大方便.”

298) 『華嚴經』(T10.293, 733c9~19):  爾時觀自在菩薩摩訶薩 欲重明此解脫門義 爲善財童 子而說偈言 “善來調伏身心者 稽首讚我而右旋 我常居此寶山中 住大慈悲恒自在 我此 所住金剛窟  莊嚴妙色衆摩尼  常以勇猛自在心  坐此寶石蓮華座  天龍及以脩羅衆  緊 那羅王羅刹等 如是眷屬恒圍遶 我爲演說大悲門.”

299) 『삼국유사』 권3, 탑상편, 「前後所藏舍利」.

300) 『송고승전』 「의상전」에는 처음 의상이 도해 상륙하여 머물던 중국 등주 단월가의 딸 선묘(善妙)가 신심을 발하여 용으로 변하여 신통력을 발휘함으로써 대사의 귀국선을 무 사 항해시켰으며, 귀국 후 부석사 창건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宋高僧傳』, T50.2061, 729a16~b15).

로부터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보주에 대응되는 모티브임을 알 수 있다.

해변굴 안으로 인도를 받은 의상이 ‘허공을 향해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서 술에서 허공은 화엄법계관에 근거하여 법신불에 대한 묘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에서 여래의 법신을 열 가지 비유로 교설하고 있는데, 그 중 에 허공과 광명이 있다. ‘허공으로는 여래의 존재 양상을 보이고, 광명으로는 법신의 작용과 덕상을 보인다.’301)는 경설이 그것이다. 이같이 법계에 대한 화 엄적 인식에서 허공은 법신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의상의 자내증 안에서

‘허공에서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었다.’고 한 것은 의상의 재계에 대한 법신의 감응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또한 동해(東海)의 용이 의상에게 여의 보주 한 알을 바쳤다는 것은 신라 재래의 신령 중 하나인 바다용이 의상의 법 력에 감복하여 화엄 신중의 체계 안으로 섭화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 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이어진 7일의 재계 후에 의상은 마침내 관음의 진용을 본 것으로 묘 사되고 있다. 진용을 드러낸 관음은 의상에게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 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고 계시한다. “과 연 그 자리에 쌍죽이 솟아났고, 불전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봉안하니 돋아났 던 쌍죽이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의상이 봉안한 관음상이 진신으로서의 위상 을 갖고 있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즉 쌍죽은 관음 진신의 신성성을 매개하 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신라 동북방의 해변가가 관음보살 진신 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으로 상정되는 데에는 화엄경설에 제시된 보살 주처의 관념과 그곳을 장엄하는 화소들이 기반이 되고 있다. 즉 의상의 자내증을 통 해 경설에서 묘사된 관음 주처를 신라국토 안에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화 엄경』 「입법계품」에 묘사된 보타락가산이 신라국토 내에 실재하는 정토로 증 험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상이 관음보살의 진신을 형상화한 관음상을 봉 안함으로써 마침내 성현의 완결성이 구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현은 절 대적 실재를 계시하는 존재론적 세계를 창건하며, 어떤 방위의 설정도 확립될 수 없는 균질적이고 무한한 세계에서 절대적인 고정점, 하나의 중심이 성현을 통해 드러난다.’302)고 하는 엘리아데의 성현관을 통해 볼 때, 의상의 종교체험 안에서 관음보살의 성현으로 드러난 동해 낙산은 그 자체로 신라국토에 건설

301) 전해주, 『화엄경의 이해』, 118.

302) 엘리아데(Mircea Eliade), 『성(聖)과 속(俗)』,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