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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형성에서 EU 사례의 시사점

가. 유럽공동체의 형성과정

1940년대와 50년 유럽이 당면한 초미의 과제는 무엇보다 제2차 세 계대전으로 인해 피폐화된 유럽 각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미-소 양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압도적인 헤게모니 하에서 유럽이 한 조각의 영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역내 국가들의 갈등을 가능한 한 조정하고 상호협력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의 원인이 다양한 형태로 왜곡된 민족주의와 불 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고와, 이러한 국가들 간의 무한경쟁을 유발 한 민족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이 유럽통합을 촉진시키는 유력한 이념적, 사회・심리적 기초로서 작용했다.

이러한 조건을 배경으로 유럽국가들 간의 협력을 증진하고 유럽통 합을 촉진시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유럽통합의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는 유럽통합 필요성 등이 주로 비제도적 평화주의자나 체제비 판적인 사회주의자들에 제기된 반면, 유럽의 지배층과 자본주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과 이로 인해 유럽통합이 단순한 이상 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힘을 얻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역 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목표로 49년에 창설된 ‘유럽협의회(the

1 60년대 말에 완료할 목표로 한 ‘관세동맹’을 형성한다.

2 관세장벽을 넘어선 재화, 용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교류를 목표로 한 ‘공동시장’을 구축한다.

3 농업생산물에 대한 공동정책과 시장 창출을 위해 노력한다.

4

제반통합정책을 실행하기 위한 정치적 제도들을 창설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제도들은 이후 유럽공동체의 정치적 매커니즘의 기본 골격을 이룬다. 즉 ‘무권력의 내각’으로서 유럽공동체의 집행부 기능을 담당하는 ‘유럽공동체 집행위 원회’, ‘회원국 각료들로 구성된 ’각료회의, 유럽의회‘ 및 유 럽법정’ 등이 이 시기에 구성된 것이다.

European Council)’은 이 시기 유럽 통합의 시발점을 이룬다. 그러 나 이 협의회는 그 상징적인 의미는 크지만, 53년부터 발효한 ‘인권과 기본 자유를 위한 유럽협약’을 통과시킨 것을 제외 한다면 별다른 성 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1957년 3월의 ‘로마조약’ 체결은 유럽통합사의 획기적인 전 환점을 이룬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58년 1월 ‘유럽공동체(EEC)’가 창설되었고 초국가적 기구들을 갖춘 부문별 통합의 일환으로 ‘유럽원 자력 공동체(Euratom)’등이 창설되었다.

<표 Ⅱ-2> ‘유럽공동체’의 핵심적인 내용

자료: 김세균, “유럽공동체 시장통합의 정치경제학”

이 시기에는 한편으로는 ‘탈냉전’과 데탕트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 는 유럽경제의 안정적 성장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조건을 반영해 유 럽통합과정은 최대의 성공을 기록한다. 무엇보다 68년 이후에는 관세 동맹이 완전히 실현되었고, 유럽차원에서는 대외 무역정책과 공동 농 업시장 등이 실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통합의 진전과는 달 리 각 국경제의 불균형 발전과 각 국 유럽정책의 ‘민족주의적’ 성격 등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통합은 크게 진척되지 못했다. 65년에 ‘각료

회의’ 결정방식을 전원합의제에서 다수결제로 하자는 안을 프랑스가

반대한 것에서 드러나다시피, 보호주의적 정책을 견지하려는 프랑스 와 무역자유화 등을 적극 추진한 서독간의 정치적 갈등 역시 유럽통 합과정을 지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서유럽의 경제는 74-75년과 80-82년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자본 주의의 경제위기로 인해 침체와 위기를 경험하며 79년 이란 혁명을 기점으로 국제관계 역시 ‘신냉전국면’으로 이행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상대적 안정국면에 부각되지 않았던 유럽공동체국가들 간의 불균등 발전과 차이들을 전면으로 부각시켰으며, 또 이를 심화시키는 방향으 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73년에 이르러 영국이 아일랜드와 스코트랜 드와 더불어 가입하고 81년에 그리스가, 86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 가입함으로써 유럽공동체가 명실상부하게 서유럽 전체를 포괄하 는 국제조직으로 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외연적 진전이 있었지만, ‘통

합’보다는 개별국가 단위의 자구노력이 정책순위의 우위에 놓이게 되

면서 유럽통합과정은 중대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70년대 유럽통합 논의의 중심은 경제 및 통화동맹의 문제였다. 그 러나 위기과정의 전개에 따라 통화 불안정 등이 크게 촉진되면서 69 년 헤이그 회담에서 제안되었던 ‘경제통화동맹안’의 시행이 좌절되었 다. 나아가 78년에 ECU(European Currency Unit)를 결제단위로 하

는 ‘유럽통화체계안’이 제출되었지만 독일과 프랑스 간의 심각한 입장

차이로 인해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공통의 외교 정책 수립을 위한 ‘유럽정치협력기구’가 69년 헤이그 회담의 결의에 따라 구성되었고, 79년에는 ‘유럽의회’의 직접선거가 처음 실시되었다.

위기과정으로 확대된 국가별 정책과 유럽공동체 정책 간의 긴장관 계는 유럽통합의 진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접근의 필요성을 높이는 것이기도 했다.

70년대의 위기국면에서 유럽공동체는 더 이상 미래지향적인 정치 전망을 지니지 못한 프로젝트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85년 이후 수많

은 정부협상과 제안 및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의 백서 등을 통해 준 비되어 온 ‘단일유럽의정서(SEA)’가 86년에 조인되고, 이 의정서가 87년까지 12개 회원국 의회에서 비준되어 그해 7월1일 자로 시행되면 서부터 파산직전까지 내몰렸던 유럽공동체는 실로 혁명적인 희망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게 되었다.

<표 Ⅱ-3> ‘단일유럽의정서’의 기본내용

1 정치적 통합목표의 강화: 공동체 관계들의 전체를 ‘유럽연합’

으로 전환시킨다.

2

57년의 로마조약에서부터 예정되어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던 유럽공동시장을 완성한다.(92년12월31일까지 시장통합 완성을 목표)

3 연구, 기술 분야와 환경 분야에 까지 공동체의 활동을 확대한다.

4 ‘유럽정치 협력기구’에 조약적 기초를 제공함으로써 외교, 안 보에까지 협력을 강화한다.

5 ‘각료회의’에 다수결원리를 도입하고 ‘유럽의회’의 기능을 강화 함으로써 공동체 내의 정책결정과정을 개혁한다.

자료: 김세균, “유럽공동체 시장통합의 정치경제학”

‘단일유럽의정서’에 결의된 유럽공동체의 구조 및 목표변화 가운데 중핵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1992년까지 역내시장을 완수하겠다는 시장통합의 문제이다. 제시된 계획은 국가별 통합과 자유무역지대의 구성을 거쳐 관세동맹 단계에 이른 유럽경제통합과정을 공동시장 건 설에 기초한 경제통합의 완성단계로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이 결정에 따라 유럽의 경제통합과정은 원래 예정한 일정에서는 약간 뒤 쳐지긴 했지만,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오늘날에는 단일 통화체계의 구축과 ‘유럽중앙은행’의 창설을 통한 ‘유럽경제통화동맹’

의 건설을 목전에 두고 있을 정도로 급진전되고 있다. 이를 통해 회

원국 전체 또는 주요회원국들을 중심으로 단일경제권으로 완전히 통 합하는 과정이 유럽통합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시장통합을 중심으로 유럽통합과정이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70년대 중반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장기적인 구조적 불황에 빠져들면서부터 이전의 일군단위의 포드주의적 축적모델이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80년대에 이르면서 새로운 과 학기술혁명 성과를 생산과정에 도입하는 것에 기초하여 이른바 포스 트포드주의적 유연적 성장, 세계화 등이 폭넓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탈규제,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사유화, 유연화 등을 내세우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된 신자유주이적-신보수주의 세력 의 정책에 의해 뒷받침 받았다. 이와 더불어 지구화 과정은 유럽각국 들 간의 경제적 융합을 더욱 촉진시키기 시작했고, 노동력 사용의 전 유럽적 수준에서의 유연화 요구 등이 자본 측으로부터 강력하게 제출 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경제영역에서 서유럽의 국제경쟁력의 약화 및 성장률 둔 화 등 70년대 중반이후부터 제기되어온 ‘유럽경화증’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경제통합 없이는 미국과 일본과의 경쟁에서 유럽이 패배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경제통합에 다시 박차를 가하도록 만든 직접적 인 배경이 되었다.

세 번째, 이를 배경으로 각국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세력 및 유 럽의 초국적자본 들이 주축이 되어 유럽의 경제통합을 가속적으로 촉 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견해 차이를 해 소하고 단일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은 그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직접 적인 계기를 이룬다.

80년대 중반 이후 경제통합과정이 가속을 붙게 된 것과 더불어 정 치・사회・기술 등 사회과정 전반의 통합과정 역시 크게 진척되어 1993년 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