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철학, 문학과 더불어 인문학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역사학 역시 I장에서 제기한 두 가지 문제 해결 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인류가 축적해온 다양한 경험과 유산을 우리 자신 의 지식과 지혜로 삼아 인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 이런 지식과 지혜를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성 을 이해하고 자아발견을 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당위성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 이를 통한 사
회에서의 역할 인식은 개인으로서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시키게 된다. 즉, 역사 교육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의 교양교육에게 요청되는 인성의 재정립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교육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 과정에 영향을 미친 주요 흐름들을 파악함으로써 현대 사 회와 현대 세계의 특성과 복잡성을 넓은 시야에서 이해하고(이로써 단순한 인과론이나 관습적 지혜에 대해서도 비판적
접근이 가능함),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세상사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나아가 세상의 현재와 미래
의 방향성에 대한 지침도 얻을 수 있다.
역사 교육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 축적에도 매우 유용하다. 역사교육을 통해 어떤 역사적 사 건이나 현상에 대해, 매우 다양한 유형(문자, 시각 및 오디오 자료나 고고학 자료 등)의 여러 사료와 가능한 다양한 설 명들을 제공하고, 이를 이해·설명하도록 가르침으로써 모든 학문에서 필요로 하는 다음과 같은 역량을 갖출 수 있다—즉, 정보의 홍수 속에서 중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능력, 비언어적 자료를 다루는 능력, 진실과 허위 판 별력,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윤리적·도덕적 판단력, 읽기 능력, 계량적 및 수리 문해능력, 미디어 문해능력, 외 국어 능력, (사회적) 상상력과 추리력, 분석력, 비판적 사고력, 해석력, 판단력,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이런 능 력들을 동원하여 무질서하고 이질적인 사료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는 종합적 사고력, 길고 큰 흐름이라는 역사 적 맥락 속에 한 사건이나 현상을 위치시켜 복잡·다양한 원인들 간의 상호 관계를 설정하면서 설명하는 능력, 그 결과를 제시하는 스토리텔링을 포함한 문학적 표현력(쓰기와 말하기), 즉 의사소통 능력을 길러준다. 또한 역 사 텍스트 통해 다른 시기와 지역의 사람들에 대한 공감력, 다양성에 대한 이해력, 그리고 세상을 보는 글로벌 및 로컬 시야와 인식도 제공한다. 이런 역량들은 기본적으로 계몽된 시민성 고양과 민주주의 내의 정치 생활 에도 필수적이다. 따라서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방법론을 채택하고, 다학제적 접근법을 쓰는 종합 학문이다. 이런 역사 역량들은 다양한 직업 역량으로 바로 전환된다. 이런 면에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도 역사 교육, 교양으로서의 역사교육은 필수적이다.
미국 대학의 사학과는 전문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과 리써치의 발전에만 관심이 있지, 교양교육으로서의 위와 같은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콘텐츠와 교수학습법을 개발하여 전교생에게 제공하는 데는 큰 관심을 기울 이지 않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대학의 역사교육은 교양교육을 담당하는 단 과대학에서 교양교육으로 이뤄지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럼, 이런 역사 역량을 어떤 역사 콘텐츠에 담아서 가르쳐야 할까? 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각 대학에서 제 공할 교양으로서의 역사는 단 한 과목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2009년 에 9개 대학의 역사 교양교육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2008년도에 이들 대학은 3-24개 과목을 개설하였 는데, 학교별로 과목수와 과목명에서 편차가 크고, 종래의 통사, 시대사, 분야사가 주제사로 바뀌고 있는데(최 근 미국 대학에선 지역사가 확대되는 추세임), 역사관련 교양과목 편성에서 계열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개론 성격의 기본과목, 시대사나 분야사의 심화과목, 주제사의 흥미과목을 각기 다른 범주로 묶고 각 범주별로 하나 이상의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거리가 먼 주장이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2017학년도 1, 2 학기에 필수교양 영역에서 19 과목, 선택교양 영역에서 6과목, 합계 25개의 역사 과목을 제공했는데, 1-4학년 총 수강인원 16,000여 명 중 에, 오직 2281명(필교 1918명, 선교 363명)만이, 즉 14.3%만이 수강했다. 이 수치를 4년 치로 환산한다고 해도, 연
세대학교 학생 중 재학 중 역사 과목을 단 한 과목이라도 수강한 학생은 57.2%에 그치고 만다. 이런 상황은 다 른 대학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어떤 대학도 역사를 중핵교과의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 곳은 없고, 기껏해야 배 분이수제 내에서 선택하도록 설정해 놨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역사 역량을 어떤 콘텐츠에 담아 한 과목으로 전달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한국사, 동양사, 서 양사 중 하나를 통사로 가르치면, 한 학기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 가르치기가 매우 벅차다. 그럼, 시대사나, 지 역사, 혹은 주제사나 접근 방법에 따른 역사(예: 정치사, 경제사, 사상사, 문화사 등)를 가르치면 되나? 서울대, 성균 관대, 포스텍, 한동대 등 국내 대학들은 극소수 예외(경희대)를 제외하곤 통사, 시대사, 지역사, 혹은 주제사나 접근 방법에 따른 역사를 함께 제공해 놓고 이 중에서 1개 정도를 선택하여 수강하게 하고 있다. 이 방법 중 어떤 것을 택하든 그 과목이 다루지 않는, 시기, 지역, 주제, 접근방법에 대한 역사 지식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 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양교육학회의 2017년 춘계 전국학술대회에서 서양사 분야에 한정하여 이 논 의를 해보았지만, 글로벌 역사나 문화사를 가르치자는 제안 외에는 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사실 이 제안 들도 타 방법론이 제공하는 역사 지식들을 희생시키기는 마찬가지다.
그럼 역사 지식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해보자. 모든 중요 역사 지식을 한 과목 안에서—사실은 아무리 많은 역 사 과목을 제공한다고 해도—다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자. 정보화 사회에서 역사 지식은 인 터넷에 넘쳐나고 있다. 오히려 ‘fact’에 ‘fiction’이 섞인 ‘faction’이 넘쳐나서 문제다. 결국, ‘역사 역량’이냐, ‘역사 지식’이냐를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면, ‘역사 역량’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 역사 지식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다면, 어떤 콘텐츠를 택할 것인가? 주제사를 지역사와 섞되, 주제에 따라 다양한 접근법을 동원하고 주제를 가능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선택함으로써 역사 지식의 손실도 가능한 축소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즉, 현대 글로벌 세계의 주요 특징들을 주제로 선정하고, 그 역사적 뿌리를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추적해오도록 하면, 주제에 따라 다양한 관련 지역이 선택될 것이며 또 적 절한 연구 방법론들이 동원될 것이다. 마지막 단계로 해당 주제의 한국에서의 역사적 전개를 다루도록 하면, 역사 지식의 손실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지구촌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잡으면, 고대 그 리스와 로마, 근대 유럽과 미국, 그리고 현대 한국이 해당 지역으로 선택될 것이고, 정치사, 사상사, 문화사 등 의 방법론이 적용될 것이다. 또 다른 주제를 잡으면, 지구촌의 다른 지역과 시기에 대한 공부가 보완(혹은 중첩)
될 수 있고, 다른 방법론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교과목은 강의 위주로 이뤄져선 안 되며, 적절한 교수학습법이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 역사 교육에 서 중시되는 것은 학습 내용이 아니라 내용의 인지다. 즉, 지식의 습득 결과가 아니라 습득 과정이다. 인지심리 학에 따르면 모든 교육 단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은 ‘능동적 학습(active learning)’이다. 즉, 학생이 역사적 이해를 가장 잘하는 방법은 교수자가 전달하는 것을 머릿속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료를 가지고 스스로 인지하면서 하나의 역사적 설명과 해석을 구축하고 토론해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적 절한 교재 개발, 사료 선정, 평가 방법 개발 등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국내의 한 연구는 역사적 사고력 향상이라는 교육목표를 갖고 문제중심학습(Problem-Based Learning)을 실험적으로 시험해보기도 했다.
이런 강의 콘텐츠와 교수학습법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만들기 매우 어렵다. 각 대학교의 교양대학과 사학과 와의, 혹은 몇 개 대학교의 교양대학 소속 교수자들 간의 긴밀하고 적극적인 협업이 필요하다. 물론 대학 차원 의 재정적·행정적 지원 역시 필수적이다. 차제에 한국교양기초교육원에서 교양으로서의 역사(, 철학, 문학) 과목
개발 프로젝트를 만들어 보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한국 대학의 여러 여건을 고려할 때, 이런 역사 과목의 개발이 보다 현실적이긴 하지만, 전술한 최근 교 양교육의 경향을 고려한다면, 다른 형태의 과목 개발도 고려해봐야 한다. 전술했듯이 교양교육은 인문, 사 회, 자연, 예술의 융합 교육이며, 그에 따라 이런 기초학문 분야의 전통 학문 분과를 넘어선 통합(integrated)
과목의 제공을 권장하고 있다. 실제로, 예일대는 ‘인문학과 예술(Humanities and Arts)’ 영역에서 2과목 이 상을 택하도록 배분이수제를 운영하고 있고, 하바드대는 2019년 가을학기부터 ‘역사, 사회, 개인(Histories, Societies, Individuals)’ 영역에서 한 과목을 수강하도록 배분이수제를 운영하고 있다. 컬럼비아 대학은 ‘현대문 명(Contemporary Civilization)’이라는 과목을 중핵교과로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경희대가 ‘인간의 가치 탐색’이라는 인문학 중핵교과목 속에 역사를 녹여내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교과목의 개발과 운영에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재정적·행정적 지원은 물론 다양한 많은 전문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각 대학교의 교양대학과 문과대/인문대의, 혹은 몇 개 대학교의 교양교육연구소 간의 긴 밀하고 적극적인 협업이 필요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현재 진행중인 ‘자연과학’ 교과목 개발에 이어 인문학 (혹은 더 큰 범주의 다학제적인) 과목 개발 프로젝트를 만들어 보길 강력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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