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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학의 융합과 ‘시적 과학’의 언어

3-1. 존재와 당위를 이어내는 이야기

12) 앞의 책, p.508.

초월의 언어로는 삶의 물질적 조건을 해명할 수 없으며, 과학적인 환원의 언어로는 자연과 생명의 복잡성을 반영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되, 두 언어 사이에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좌표들만이 인간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에 기반하면서도 과학 너머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시적 과학의 영역이 필요합니다. ‘시적 과학’은 물질이면서도 자신의 기원과 미래를 상상하고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정신’이기도 한, 인간 존재의 패러독스를 전제한 개념입니다. 따라서 시적 과학은 애매한 중간의 언어가 아니라, 닫힌 패러독스 에서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생산적 언어를 의미합니다.

‘시적(poetic)’이라는 관형어는 실제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단일 지식체계를 넘어서는 대안으로 탐구되고 있습니다. 과학적 정합성에 기반한 논리만으로는 삶의 다면성이나 모순성을 포괄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했 기 때문입니다.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문학적 상상력이 법학과 같은 합 리적인 논증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시적인 것들이야말로 사물을 온전하게 보게 하며, 고귀한 가치들을 상상 하게 하는 힘이라고 주장합니다.14) 과학적 탐구방법의 한계에 부딪힌 심리학에서도 과학의 새로운 행태인 시 적 과학의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시적 과학(poetic science)’은 인간의 살아있는 경험을 특징짓는 애매성, 복잡 성, 깊이를 반영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설명합니다.15)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에서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대표적인 과학자입니다. 그래서 ‘시적’이라는 말도 자주 언급하는데 ‘시적’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는 이해 할 수 없는 ‘진화’와 같은 신비에 찬 자연 질서의 특성을 가리킵니다.16) 또한 시와 과학은 서로 좋은 영감을 주 고 받을 수 있는데,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익한 비유와 은유와 같은 시적 감수성을 포함한 과학을 ‘좋은 시적 과학’이라고 지칭합니다.17)

맥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시적’이란 용어는 공통적으로 단일 학문체계를 더 풍요롭게 하거나, 또는 그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복합적인 본질을 투시하려는 생산적인 방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티끌 같은 존재 안에 숨겨진 우주의 광대함과 찬란함을 발견하는’ 시 장르 자체의 본질과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 다. 요컨대 ‘시적’이란 한정된 지식을 다른 어떤 국면으로 전이시키고 확장해 나아가는 것, 너머의 세계를 상상 하며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련의 사고 작용을 지칭합니다. ‘시적’ 추동력과 만나게 될 때, 원자화된 과학 은 인간의 얼굴을 부여받을 수 있으며,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입체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직조해 수 있습 니다. 시적 과학의 언어는 제한된 세계를 벗어나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시 현실의 패러 독스에 용기 있게 대면하게 합니다.

시적 과학의 언어는 지식을 가치로 전환시킵니다. 다시 말하면, 과학을 인간의 이야기로 재구성합니다. DNA 연구는 20세기 과학의 꽃이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의 눈부신 도약이 이루어졌습니 다. 유전자는 생명의 비밀을 품은 성배였고, 우리를 결정하는 생명의 설계도였기에 새로운 창조신화로서는 군 림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생명이 단순한 인과관계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며 유전과 환경 전체를 포함한 생명 시스템이나 후성유전학으로 논의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유전자를 둘러싼 지식의 좌표가

14) 마사 누스바움, 박용준 역(2013), 『시적 정의』,궁리.

15) Mark Freeman(2011), Toward Poetic Science, Integrative Psychological and Behavioral Science, 45. pp. 389396.

16)  진화의 여정은 어떤 인위적인 마법보다 더 아름다운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시적 마법(poetic magic)이라고 표현했다. 리처 드 도킨스, 김명남 역(2015),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김영사, pp.52-53.

급변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분절된 지식만으로는 과학 내부에서도 소통이 어려울뿐더러, 과학에 대한 무소불 위의 신화나 도그마로 빠져들 위험도 있습니다.18)

그런데 이 생명과학의 전개를 ‘결정된 것과 결정되지 않은 것들’ 이라는 이야기 구도로 조망해보면, 개별 지 식들은 고유한 목소리를 내며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전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 니지만, 유전자가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과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사이에서 개인들은 고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의 문제는 어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이디프스는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데, 테베로 가는 길목에서 스핑크스를 만납니다. 스핑 크스는 발이 넷이며 둘이기도 또 셋인 것은 누구냐는 유명한 수수께끼를 냅니다. 생로병사의 운명을 짊어진 인 간의 길을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오이디프스는 정답을 맞추었지만, 정작 자신의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생로병 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 지는 개인이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DNA는 개인의 기원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지만, 인간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 아름다움과 추함, 약함 과 강함 그리고 정해진 것과 정해져 있는 않은 가능성들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DNA라는 과학 지식은 시적 과학의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이야기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때 시적 과학의 언어는 과학 지식이 지시해주는 견 고한 운명과 그 안에서 만들어갈 수 있는 삶의 가능성 사이에서 균형적인 좌표를 찾아갈 수 있게 합니다. 시적 과학의 언어로 존재와 당위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하며 융합이 한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3-2. ‘경이-너머-관계’의 감수성

지식의 무대는 바뀌어 전혀 다른 개별 지식 체계들이 오늘 이곳의 무대에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일상의 미시적 영역은 물론이고 인간 정체성 파고듭니다. 신과 유전자가, 예술과 AI가 공존하는 일상에서, 인 문학과 과학의 융합은 자유학예교육의 영원한 이상을 실현시켜줄 시의적 과제입니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 에서 기원하여 이제 그 별에 대해서 사유하게 된” 인간이라는 특별한 종이, 지식의 통합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 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따라서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볼 수도 있습니다. ‘신성한 동산’으로 상징되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과 유일함을 어떻게 가장 작은 물질의 단위를 상징하는 ‘실’로 잘 이어낼 수 있을 까? 혹은 그 견고한 실로 인간의 고유함을 어떻게 유연하게 직조해낼 수 있을까? 기쁨의 동산과 실타래 사이 어딘가의 인간 개개인의 좌표가 있을 것이고, 그 좌표를 찾기 위해서 이 둘을 연결하는 공통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융합의 실제적인 과제인 셈입니다

융합이라는 화두를 ‘영원한 이상’이라는 역사적 지평에서 조망해 볼 때 진리에 대한 구심력을 가능하게 했 던 특별한 감수성의 토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통해서 특별한 가치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그 기저에는 대자연에서 느꼈던 놀라움과 그 놀랍고 광막한 우주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했던 인간 고유의 감수성이 있습니다. 한 청동기인이 남긴 별자리 암각화는 그 흔적입니다. 명멸하는

18) 유전자에 관련된 과학 지식의 변화와 이야기의 가능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논문 참조

별빛을 이어 그려낸 특별한 별자리는 경이로운 우주를 마주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던 사 유의 기록입니다.

나는 해변에서 뛰놀면서, 진리의 넓은 대양이 내 앞에 발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는데도, 때로는 보다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으면서 즐거워하는 소년 같았다고 생각한다. 아이작 뉴턴의 <마지막 말> 중 19)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소용돌이 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티끌 같은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한 모습에 취해, 나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심장은 바람 속으로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 <시> 중 20)

과학자는 자연의 카오스를 설명해낼 특정한 질서를 발견합니다. 뉴턴이 발견한 중력의 법칙은 카오스의 바 다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조개껍데기입니다. 뉴턴은 말년에 자신이 작은 조개껍데기를 들고 대양 앞에 서 있는 소년이었다고 회고합니다. 작은 진리의 빛을 밝혀 들고 인간은 그 너머 대양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뉴 턴의 우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과 같은 또 다른 우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시에서 “티끌 같은 존재”

가 우주라는 “심연의 일부”임을 느끼는 도약의 여정과도 흡사합니다. 별자리 암각화, 뉴턴의 조개껍데기, 그리 고 네루다의 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발견의 바탕에는 ‘경이 – 너머 – 관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수성 이 내재해 있습니다.

자연에 ‘경이’(wonder)를 품고, ‘너머’(the beyond)를 꿈꾸며, 세계와 새로운 ‘관계’(relationship)를 만들어가는, ‘ 경이-너머-관계’의 감수성은 지식을 만들고 그것을 연결하며 진리의 바다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영적이면서도

19) 요하네스 비케르트, 안미현 역(1998), 『뉴턴』, 한길사, pp.162-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