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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정권 외교정책의 시기별 특징

Dalam dokumen 김정일 정권 10년: 변화와 전망 (Halaman 77-116)

1. 유훈통치기(1994.7~1998.8): 고슴도치 외교 가. 목표 : 체제유지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은 소련의 해체, 한국의 북방외교 그리 고 국제사회의 핵사찰압력 등으로 인해 경제난 심화와 외교적 고립 그리고 안보위기의 3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북한지도부는 체제유지를 최우선적 과제로 인식하 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김정일은 경제난과 안보난에 대한 위 기감을 표출하였다.26) 그리고 북한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95년

‘고난의 행군’ 시기를 선포하고, 군사중시정책을 통해 내부 체제 결 속에 주력하였다. 이후 북한지도부는 ’97년 ‘총돌격전, 3대진지 강화 론’을 제시하였고, ’98년 ‘경제건설’이 ‘최대의 힘을 넣어야 할 주되 는 전선’임을 강조하면서, 체제유지의 관건으로 경제난 해결에 적극 나섰다.

나. 전략 : 편승전략

이 시기 북한이 추진한 외교정책 특징은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26) 김정일, “비공개 연설(1996.12.7)”, 조선일보 , 1997. 3. 19.

(1) 정치: 유인외교 추진

북한은 김일성 사후 주변 4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미관계 개 선, 대중관계 강화, 대러관계 조정, 대일 접근‧적대 병행을 통해 주 변 4국의 대한반도 영향력 확대경쟁을 유발하는 ‘유인외교’정책을 추 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미관계에 있어 북한은 「북‧미 기본합 의문」 채택(1994.10.21)에 대해 ‘김일성 유훈’을 관철한 커다란 성 과27)로 평가하고,28) 대미관계 개선을 적극 추진하였다.29) 김정일 은 체제유지 및 경제난 타개를 위해 김일성 유훈을 따라 전통적인

‘반미주의’를 ‘通美주의’로 전환,30) 대미관계 개선을 외교정책의 기

본목표로 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북한은 한‧중 수교(1992.8)이후 중국과

27) 북한으로서는 기본합의문 채택을 통해 중유공급과 경수로지원이라는 경제 적 실리, 연락사무소 개설합의라는 외교적 성과, 대북한 핵무기 불사용 및 불위협의 공식적 확약이라는 안보위기 극복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 기 때문이다.

28) 북한은 북미기본합의문을 ‘한반도 핵문제 해결과 북미 관계발전을 위한 하나의 이정표이며, 두나라 국가수반들이 보증한 무게있는 문건’으로 간주 하였다.

29) 김일성은 1994년 신년사를 통하여 “자주권을 옹호하는 자본주의 나라들 과도 선린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밝힘으로써 대미관계 개선 의사를 천명하였다. 로동신문 , 1994. 1 .1

30) 북한은 북미 제네바합의(1994.10.21)를 통해 대미관계를 개선하였으며, 제 뉴욕회담(1996.5.4~9)에서 미군유해공동조사단 구성 및 조사작업을 통한 연내 공동발굴에 합의함으로써 대미 관계개선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러 한 대미접근 정책 연장선상에서 식량난 및 경제난 타개를 위해 대외경제 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우와 아태 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이종혁 등을 미국에 파견하여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추가완화 조치와 식량원조를 확보케 하였 다. 이에 미국은 1996년 2월과 6월에 각각 2백만 달러, 6백만 달러분의 대북식량지원을 결정하였다.

의 관계에 있어 다소 소원한 양상을 보였으나, 김일성 사망 이후 방 문 및 초청외교31)를 강화함으로써 친선‧동맹관계를 밀접하게 유지 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관계에서 북한은 제8차 북‧일 수교 협상(1992.11)이 결렬된 이후 대미협상에 주력하는 한편, 일본의 핵무장‧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군사대국화 문제 등을 중심으 로 대일 비난의 강도를 높였으나, 김일성 사망 이후 수교교섭 예비 회담을 재개(1994.8)하고, 북한은 일본 연립3당의 방북대표단과 「 조‧일회담 재개를 위한 합의서」를 체결(1995.3.30)하였다. 북한은 경제난 타개를 위해 보상금 획득과 경제협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일 수교협상에 적극 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북한벌목공의 한국 인도, 한국전쟁관련 문서 공개, 북한 핵 문제 등으로 소원한 관계에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 이전부터 대러 방문 및 초청외교를 재개하여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관계회복을 추진 하였다.32)

요컨대 북한은 ‘유인외교’정책을 통해 김정일정권의 안정적 출범 과 장기 지속화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31) 방중 외교의 사례: 외교부 부부장 송호경(1994.8), 부주석 이종옥(1994.10) 부주석 김병식(1995.1) 부총리 김복신(1995.1) 당비서 황장엽(1995.2) 당 부부장 이희규(1996.3),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정각 상장(1995.10) 부총리 홍성남(1996.5), 부총리 김윤복(1996.7) 등 초청 외교의 사례: 국방부 부 국장(1995.3), 군사과학원 정치위원 張工 중장(1995.9), 국무원 비서장 羅 幹(1996.7), 인민해방군 가무단(1996.8) 등.

32) 방문외교: 대외경제위 부위원장 김정우(1993.8), 외교부 부부장 이인규 (1994.5) 대외경제위 부위원장 한수길(1994.11), 당 부부장 박경선(1995.1) 등; 초청외교: 외무차관 파노프(1994.9), 자유민주당 당수 지리노프스키 (1994.10), 부총리 이그나텐코(1996.4) 등.

(2) 군사: 동맹외교 지속과 대미 군사접촉 시작

북한은 전통적 혈맹인 중국과의 동맹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 하였다. 1995년 10월 25일 북한은 ‘조‧중 친선을 대를 이어 강화‧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일관한 립장이며 확고 한 의지’라고 강조하였다.33) 1996년에 들어와서는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 체결 35주년(7.11)을 맞이하여 사상 최초로 중 국군함을 남포항에 맞아들이는 등 동맹관계 강화에 적극 나섰다.

또한 북한은 미국과의 단독적인 군사접촉 외교도 시작하였다.

북한은 제1차 미군유해송환협상(1996.1, 하와이)에 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박임수 대좌 등 군부 인사들을 파견함으로써 미 국방부 부차 관보급 인사와의 접촉을 시작하였다.

(3) 경제: 제한적 대외개방정책 지속34)과 원조(도입)정책 추진

북한은 김일성 사망에 따른 정치적 불안과 핵문제에 따른 국제 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해외시장 개척과 서방국가들과의 경 제협력을 위해 적극 나섰다. 북한은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개 발의 활성화를 위해 이를 ‘김일성 유훈’으로 제시하고, 제반 법령 제

33)“조중친선은 영원불멸이다”, 로동신문 , 1995.10.25.

34) 북한은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예컨대 식 량난 해결을 위해 식량원조 도입정책을, 에너지난 해결을 위해 중유 및 경 수로 도입정책을, 생필품난 해결을 위해 외자 도입정책을 전개하고 있는 것 으로 분석된다. 허문영, 북한의 경제정책 변화와 남북경협 활성화 방안 (민족통일연구원, 1996) pp. 21-53.

정 및 투자환경 개선 그리고 해외자본 유치에 적극 노력하였다. 북 한의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동 지역에 대한 외자와 해외교포자 본 및 남한기업의 투자유치를 위해 1995년 5월 심천, 8월 북경, 9 월 북경에서 각각 대규모 투자설명회를 가졌고, 또한 공식 및 비공 식 투자유치단을 미국과 유럽에 파견하였으며, 1996년 9월 13~15 일에는 UNIDO, UNDP와 함께 현지에서 17개국 407명이 참가한 대규모 「국제투자포럼」을 개최하여 2.82억 달러의 투자계약을 유치 하였다.

이 시기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최초로 서방국가들 및 국제기구 에 식량원조를 요청하였다. 북한은 1995년 5월 이성록 국제무역촉 진위원장을 일본에 파견, 일본이 보유중인 쌀 잉여분 일정량(60~

80만톤)을 일정기간 대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 서 한국쌀도 “아무런 전제와 정치적인 조건없이 원조하거나 대여한 다는 제의가 있으면 검토하고 싶다”고 언급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 으로부터 쌀 15만 톤을 무상으로 지원받은 바 있다.

(4) 대미외교

이 시기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로 표출시켰던 대 미 정면돌파 전략을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 조응하여 1994년 10 월 「북‧미 기본합의문」을 통해 미국과 타협을 추구하는 편승 (Bandwagoning)전략으로 전환하였다. 열악한 전략적 환경 하에 서 핵무기 개발로 안보위기를 정면돌파 하려던 북한은 탈냉전시대를 맞이해 안보위협 당사국과의 직접적 관계개선 및 정책적 조율을 통

해 정치‧군사적 체제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확보하려는 전략으로의 전환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 수단: 협상 중심

(1) 핵무기

1994년 10월 21일 「북‧미 기본합의문」이 채택된 이후, 동년

11월 1일 북한은 핵활동 동결을 선언하였고, 11월 28일 IAEA 상 주 감찰단은 영변‧태창 핵시설 운영중단을 발표하였다. 이후 1995 년 12월 15일 북한은 KEDO와 경수로 공급협정에 합의하였고, 1996년 4월 베를린에서 제1차 북‧미 미사일회담에도 응하는 등 핵 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 대미 협상 :

(가) 협상목표 : 정상화‧재분배 협상

김일성 사후 북한은 군부중시의 위기관리체제를 통해 체제안정 을 꾀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남북대화를 거부한 채 우호적 국제환 경 조성을 통한 대외관계 개선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최악의 체 제위기 국면은 벗어났으나35) 총체적 불안정 요인이 상존하였다.36)

35) 북한은 ’97년에 ‘엄중한 전쟁위험이 제거되게 되었다’고 주장함. “위 대한 당의 영도따라 새해에 총진군을 다그치자”, 로동신문 , 1998. 1.

이 시기 북한의 대미 협상목표는 김정일정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경제제재 해제 및 지원확보를 통해 유효성(효율성)을 제고하는 한편, 정치‧군사적 체제보장을 확보함으로써 연대성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대미관계의 재편을 모색하되, 협상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생존기반을 다지려는 것이라 하겠다. 중기적으로는 북한 주민의 김정일정권에 대한 지속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 에서 대미 경제교류‧협력의 활성화를 통한 경제적 번영이 최고목표 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기적으로는 김일성 정권의 정당성 출발 점이자 김정일 후계정권의 정당성 기반이 되는 ‘조국통일(공산화통 일)’의 기반 조성을 위하여 대미 관계정상화를 통한 주한미군의 완 전철수가 최고목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의 대미협상 목표는 외양상 ‘정상화협상’(Normalization agreement) 으로 나타나나, 실제로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공 산화통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재분배협상’(Redistribute agreement)을 겨냥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나) 협상전략 : 문제해결 전략

이 시기 북한‧미국 관계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은 1994년 10 월 제3단계 북‧미 고위급회담을 통해 산출된 북‧미 기본합의문이 다37). 이후 북한은 기본합의문 이행의 일환으로 미국과 1995년 12

1.

36) 식량난 가중과 만성적 경제침체, 주민의 체제이탈 현상 및 탈북자 증가, 관료의 보신주의와 부정부패 증가, 과중한 군비증강의 부담 등.

Dalam dokumen 김정일 정권 10년: 변화와 전망 (Halaman 77-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