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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공조 논조의 시기별 변화

Dalam dokumen 김정일 정권 10년: 변화와 전망 (Halaman 125-131)

I. 서 론

Ⅱ. 민족공조 논조의 시기별 변화

김정일은 민족이란 핏줄과 언어가 같은 사람들의 집단으로, 같 은 지역에서 살아도 핏줄과 언어가 다르면 민족이라 할 수 없고, 해 외에서 살아도 동포들은 다 같은 조선민족이라고 말하였다.2) 북한 의 ‘민족공조’론의 기원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의 ‘민족대단결’ 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지만, 지난 10년 ‘민족’에 대한 북한의 논 조는 시기별로 변화되어 왔다.

2) 스탈린이 언어, 지역, 경제생활의 공통성, 문화생활의 공통성 등 4가지를 민족 의 기준으로 삼은 데 대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다고 김정일은 반박하였다. 김정일, “민족문제에 대한 올바를 리해를 가질데 대하여(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 과 한 담화, 1960.10.4),”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9).

1. 체제수호와 공식 승계, 1994-1998

1994년 김일성 사후부터 김정일이 공식승계하는 1998년까지 북한의 ‘민족’은 과거의 ‘민족대단결’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즉, 북한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통일방안의 3대원 칙의 하나로서 ‘민족대단결’론을 제시한 이래, 1980년 「고려민주연 방공화국창립방안」과 1993년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등에서 ‘민족대단결’론을 유지하여 왔다.

‘민족대단결’론이 1980년대 후반 이후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소

련 및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체제위기의 극복을 위한 것이 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김정일은 “조선민족제일주의 정신을 높 이 발양시키자”는 논문에서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 심”을 주창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체제의 고수와 통일위업 완수를 강조하였다.

북한이 말하는 민족대단결은 “민족전체가 당파와 소속,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로 굳게 단결하여 조국의 통일과 통일 된 조국의 번영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다. 단지 1990년 이전에는 통일 3대원칙의 하나로서 거론되었으나, 1990년대에는 “조국의 자 주적 평화통일의 근본전제이며 또한 그 본질적 내용”으로서 북한의 대남정책 에 있어 가장 중요한 준거개념으로 사용되었다3)

김일성 사후 김정일의 ‘민족’에 대한 강조는 더욱 강화되었음을 1997년부터 연이어 나온 김정일의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 김태일전상인,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과 북한의 대남 정책 민족통일연구원 통일정세분석 93-04.

1997년 6월 19일 발표된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 수할 데 대하여”에서 김정일은 체제위기의 현실을 감안, 계급문제 해결보다 민족성을 부각하면서 민족주의가 체제의 중요한 이념적 좌 표임을 강조한 바 있다. 체제수호와 공식승계의 명분축적을 위해 강 경일변도의 대남공세 대신 민족주의 기치아래 대남정책을 다변화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8월 4일 발표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세칭 「8‧4노작」)에서 김정일은 자주‧평 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을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투쟁강령 이라고 강조하면서, 김일성의 통일노선을 지켜나갈 것을 강조하였 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건부의 남북관계 개선 및 대외관계 개 선을 주장하였다. 즉 남한에게는 반북대결정책을 연북화해정책으로 바꾸고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과 일본에 대해 서도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버린다면 관계가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1998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북한은 “남조선에서 근본적인 변 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였으며, 4월 18일 “온민족 이 단결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자”(세칭 「4‧18서한」)은 「8‧

4노작」을 통해 언급된 김일성의 1948년 연석회의 주도 내용을 보 다 정교화시켰다. 「4‧18서한」에서 김정일은 「민족대단결 5대방침」

제시를 통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 3원칙에 대응하고, 김정일의 통일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5대방침은 민족자주, 애국애족, 남북관 계 개선, 반외세, 내왕‧접촉‧대화‧연합 강화이었다. 비록 「5대방침」 이 조건부 대남유화정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기존

의 논문과 한가지 다른 점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는 한편, 국가보안법, 안기부법 폐지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대신, “반통 일적인 법률과 기구폐지”라는 간접적 표현방법을 구사하였다.

요컨대 북한이 「10대강령」과 「5대방침」 등에서 강조하고 있는

‘민족대단결’은 통일의 맥락에서 이며, 반미‧반정부 투쟁을 위한 통 일전선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세적 의 미의 통일전략이라기 보다는 사회주의권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이라 는 체제위기 속에서 남한의 흡수통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한 방어 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경제적 실리 추구, 1998-2002

1998년 김정일의 공식승계 이전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 노 력 속에서 남한을 철저히 배제하는 소위 ‘통미봉남’ 정책을 유지하였 다. 그러나 김정일의 공식승계를 계기로 전술적 변화를 보였다. 즉 시급히 필요한 식량과 외화의 획득을 위해 기존의 전투적인 대남전 략보다는 유연한 대남전략을 전개하여왔다.

‘민족대단결’ 역시 통일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반외 세적‧반정부적인 것이었으나, 통일전선전술의 개념을 확대하여 남한 자본가들과의 협력을 위한 명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특히,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남한의 적극적인 대북 포용정책에 편승하여 실리차 원의 전술적 변화를 보였다. 북한의 태도변화는 대북 비료지원을 논 의하기 위한 차관급회담(1998.4.11-4.17)의 수용과 금강산관광사 업을 시작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남한정부에 대한 불신과 서해교전 등으로 북한의 태도변화가 대 남정책 변화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였으나, 마침내 북한은 체제안정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감한 대외관계 확대에 나서고 남한의 대규모 대북 경제지원 메시지 및 현금제공에 고무되어 남북 관계개선에 나서게 되었다.

2000년 남북은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5개항의 「6‧15남북공동선 언」을 채택하여, 자주적 통일, 남북한 통일방안의 유사성 인정, 당 국간 대화 개최, 남북경제교류협력 확대,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 결, 김정일 답방 등에 합의하였다. 북한은 「6‧15남북공동선언」이

“민족자주통일선언으로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것을 온세상에 천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남북관계의 진전을 강조하였다.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통일의 방법과 형태 및 남북협력에 대한 당국간 공조의 가능성을 열었다.

2001년 부시행정부의 등장 이후 북‧미관계가 긴장되면서 북한 은 보다 적극적으로 민족공조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 3월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대통령이 북한에 대하여 강경발언을 한 것 등과 관련하여, 북한은 남북한이 화합하여 통일하려는 것을 달가워하진 않는 미국의 ‘반통일정책’으로 규정하고, 남북, 해외 전 체동포가 이를 저지하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4)

2002년 신년공동사설에서 북한은 ‘민족공조’란 용어를 처음 사 용하였으며, 2002년 2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대북문제와 테러

4) 「평양방송2001. 4. 3; 4. 19.

문제 등에 대한 한미협력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하면서 한국의 국제 공조에 대하여 반발하였다.5)

3. 핵위기 돌파, 2002 - 현재

2002년 핵위기 이후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보다 적극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이전의 민족공조가 남북통일의 맥락과 남한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확대를 위한 것이었던 데 반해서, 핵위기 이후는 보다 적극적으로 반미를 위한 민족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북핵 위기를 미국과 북한의 갈등이 아닌, 미국과 ‘조선 민족’의 갈등으로 규정하고, 반미‧반전을 위한 민족공조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선군정치와 우리민족제일주의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까지 도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정부, 정당, 단체 연석회의(2004.1.19)에 서 “올해 민족제일주의 기치 밑에 조선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를 실천으로 해결하고 자주통일의 활로를 열어나가기” 위해 우리민족제 일주의 고취, 미국의 민족 이간 책동에 맞서 민족공조 실현,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반미성전, 6‧15 공동선언의 철저 구현, 선군정치 지지 등 5개 항목을 제시하면서, 민족공조를 강조하였다.

또한 남한 당국과 정치인에게 ‘민족공조의 길’에 들어설 것을 촉구하

5) 김 대통령은 회담에서 한미동맹 관계는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 안정에 긴요하 "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테러 전쟁에 동맹국으로서 가능한 지원과 협력을 아끼 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하였다. 특히 양국 정상이 한미동맹관계를 기존의 대북 공조 뿐 아니라 테러문제 등 범지구적인 차원에서까지 협력하는 글로벌 파트너 '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인터넷 연합뉴스」 2002. 2. 20 (2004.2.26 검색).

는 등 공조의 대상에 남한정부를 포함시킴으로써 과거 통일전선전술 과 차별성을 보였다. 13차 남북장관급회담(2004.2.3-6)에서 한국 이 ‘우리 민족끼리’이념을 저버렸다고 비난하고 ‘우리 민족끼리’를 공 동보도문에 삽입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북한의 김영성단장은

‘민족공조에서 기본은 책임있는 당국자 사이의 공조’이며, 당국 공조 를 높은 단계로 이끎으로써 민간급 공조를 추동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조의 주요 과제로써, 핵문제와 관련한 북한측 입장 지지와 남북경 제협력을 남북 당국이 책임지고 진척시킬 것을 지적하였다.

요컨대,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당국간의 공조까지도 포함되는 등 그 범위가 확대되었고, 노골적으로 한국의 반미를 요구하는 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을 ‘우리 민 족끼리’의 이념으로 규정하고, 정상회담부터 줄곧 미국이 이를 방해 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한‧미 이간을 부추기고 있다. 남한의 탄 핵사태 역시 친미보수세력이 한 일이며 미국이 그 배후에 있다고 주 장하면서, 반미선동에 몰두하고 있다.

Dalam dokumen 김정일 정권 10년: 변화와 전망 (Halaman 12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