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에게 존재자 전체의 물러섬으로서의 무는 세계가 붕괴되는 것 과 함께 현존재 자신이 스스로에게 무상한 것으로 경험되는 것을 가리킨 다.47)
모든 사물들과 우리 자신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WM,
111) [···] 그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존재자의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존
재하는 인간인―우리 자신이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WM, 112)
무를 현존재의 자기가 몰락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서 기인한다.
인간 현존재는 그 자체로 완결된 실체와 같은 것으로 있지 않으며, 자 신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도상에 있는 자이다.48) 우선 대개의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die Selbstentfremdung, GA 63,
15)된 자이며, 삶을 살아가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자기화(die
Aneignung)해야 하는 것을 과제로서 갖는 존재자이다. 현존재는 세계-내-
존재인 한에서, 일상의 현존재의 자기 이해를 규정하는 것은 특정한 세계 이해이다. 그리고 일상의 현존재의 세계 이해를 점유하는 것은 공공의 세 계 해석이다. 공공의 세계 해석을 척도로 삼아 존재자와 관계하고 자기 자신의 행위 가능성 일반을 입안하는 우선 대개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 는 자들은 비본래적 현존재이다. 비본래적 현존재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 은 잡담을 나누고, 호기심을 충족하지만, 정작 모든 사태가 애매하게 남겨 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말을 모방해서 말하거나 확대해서
47) 이와 관련하여 무는 세계의 무이면서 동시에 공공의 세계지배 속에서 존재자와 자기 를 이해해 온 비본래적 현존재인 세인-자기의 무화이기도 하다. 나아가 필자의 해석이 푀겔러와 로잘레스의 무 해석에 동조하면서도 그들의 견해와 갈라서는 지점이 무를
‘세인-자기의 무화’로도 해석한다는 점이다.
48)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도상에 있는 자로서 있다.” (GA63, 17).
말하고[잡담], 세상 사람들이 보는 바대로 보고 새로운 흥밋거리와 볼거리 를 찾아 헤매기에 그들의 관심은 모든 곳에 펴져 있지만, 동시에 어떤 것 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호기심]. 또한 잡담과 호기심으로 점철 된 삶의 방식에서는 진정한 이해에서 개시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전도 되거나 애매한 채로 남는다[애매성].49) 그렇게 비본래적 현존재는 세상 사 람의 삶의 방식을 척도로 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세인-자기, 즉 타자로서 있다.
우선 »나«는 고유한 자기라는 의미에서 »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 사람
의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는 타자이다. 나는 세인으로부터 그리고 세인으 로서 나 »자신«에게 우선 »주어져« 있다. (SZ, 172)
이와 같이 존재자 전체의 무화에는 현존재의 자기소외로부터 자기회복 의 계기가 포함된다. 불안은 현존재로 하여금 공공의 세계 해석이 전적으 로 무의미하다는 사실 앞에 맞닥뜨리도록 하며, 공공의 세계 해석이 전적 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경험한 현존재는 더 이상 그러한 세계 해석을 척도로 삼아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세계로부터 주어진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며 사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안에 서의 무 경험은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져 있다는 적나라한 사실 앞에 직면하도록 하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마음 쓰는 자로서 있게 한다.
불안은, 퇴락하면서 »세계« 및 공공의 해석으로부터 스스로를 이해할 가 능성을 현존재로부터 빼앗는다. (SZ, 249) [···] 불안 속에서 개시되는 세 계의 무의미성이 드러내는 것은 실존의 존재 가능을 고려 가능한 것에 기초해서 기투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 이러한 49) 비본래적 현존재의 실존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의 자료에서 명료한 해명을 볼 수 있
다. 박찬국, 「초기 하이데거의 철학을 결단주의나 주의주의로 보는 해석에 대한 비판적 고찰: 본래적인 실존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서」, 철학사상 30호 2008, 11, 165-199.
[불안의] 기분은 현존재를 »세상적인« 가능성들로부터 빼내고, 현존재에 게는 동시에 본래적 존재가능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SZ, 454)
타자로서 삶을 살던 현존재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온전하 게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 불안의 무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면, 무로부터 가능한 현존재의 자기회복의 계기는 ‘죽음 앞에서의 불안’에서 가장 극명 하게 드러난다.50)
죽음은 현존재의 삶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현존재의 삶에서 가 장 위협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인간이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죽음으로부터 도피한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듯 말이다. 또한 죽음은 위협적인 것이면서, 인간이 끝내 그 자체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죽어 버리고 나면 나의 삶 자체가 끝날 것이기에 죽음에 대한 경험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죽 음은 현존재에게 일종의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그렇게 불안은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 실존의 불가능성이라고 하는 죽음에 직면하도록 한다.
그런데 죽음에의 불안을 견뎌낸 자는 그들의 삶이 영원하게 펼쳐져 있 지 않고 유한하다는 사실과 그렇기에 삶을 고유하게 나의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단에로 촉구된다. 죽음 앞에로 달려 가 봄으로써 현존재는 비로 소 자신의 삶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전체로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죽음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가장 명증한 방식으로 현존재를 세간적인 가능성들로부터 단절시 킨다. 그렇게 죽음에로의 선구는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 능에 대해 마음 쓰도록 한다.
현존재는 불안한 심정 속에서 가능한 자기 실존의 불가능성이라는 무에 직면한다. 불안은 [···] 가장 극단적 가능성 [죽음]을 개시한다. (SZ, 352) 50)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도 죽음을 거부하는 방식으로라도 죽음을 인지한다. 하지
만 인간은 죽음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 죽음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태도를 취하며, 이러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인간의 삶에 어떠한 방식이로든 영향을 미친다.
[···]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성격인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 봄은 현 존재에게 세인-자기 속에 상실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현존
재를 [···]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가능성 앞에 직면시킨다. (SZ, 353)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 현존재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을 유한한 전체로 서 드러낸다고 한다면,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이해는 양심(das Gewissen)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르는 실존의 수행 속에서 주어진다. 양심을 부르는 자와 그 부름을 듣는 자는 현존재 자신이다. 양심은 자기 자신의 삶의 방 향과 가능성에 마음을 쓰는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을 스스 로 책임져 나갈 것을 스스로에게 촉구하는 침묵의 소리이다. 그렇게 자신 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에 따라 살라는 자신의 양심의 부름을 듣는 현존재 는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 가능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기투하고자 결의
(der Ent-schluss)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이데거에게 죽
음 앞에서의 불안이 현존재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체 존재를 개시 한다면, 양심의 소리를 청종함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 가능을 드러낸다 는 점이다. 그렇기에 죽음의 불안을 견뎌내고 양심을 결의한 현존재가 획 득하는 개시성은 기존의 세계,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근 본적으로 변양시킨다.
이러한 본래적 개시성은 그러나 개시성에 기초한 »세계«의 발견되어 있 음 [기존의 공공의 세계 해석]과 타자와의 공동 존재의 개시성을 동근원 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렇다고 기존의 세계해석으로부터 개방되는] 도 구 »세계«가 »내용적으로« 다른 세계가 [되는 것은]아니며 타인의 무리 는 교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구를 이해하고 고려하며 있음과 타인들 을 배려하면서 함께 있음은 그것들의 가장 고유한 자기존재가능으로부 터 규정된다. (SZ, 394-5)
WM에서도 무가 가리키는 존재자 전체는 기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이 해가 전적으로 공허한 것으로 전락하는 고통스러운 자기 존재의 무화의
경험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 낸 현존재가 비로소 자기로 있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현존재가 미리 무 속으로 들어가 머물지 않는다면, 현존재는 존재자와 관계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과도 관계할 수 없다. (WM, 115)
더욱이 무에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으로의 변화, 즉 현존재의 자기 회 복의 계기가 포함된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에 대한 고유한 규정과 도 관련된다. 하이데거는 특정한 우발적인 해석의 결과인 형이상학51)을 본래적 철학함으로부터 해석하고자 한다.52)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 형이상학이 존재자 전체를 그것의 본질인 존재로부터 탐구하는 일반 형이 상학으로, 그리고 존재자를 전체에서 근거짓는 제일 원인에 대한 탐구인 특수 형이상학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자 전 체를 문제 삼는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와 실존과의 관련을 함께 문제 삼 아야 한다. 존재자 전체에는 항상 인간, 즉 실존이 관련된다. 하이데거에 게 본래적 철학함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를 묻는 자와 분리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물음을 던 지는 사람 자신도 함께 물음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데 고유성이 있
51)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재 학문 분과로서의 형이상학의 기원은 강단철학자가 아리스토 텔레스의 본래적 철학함의 물음을 어디에 위치시킬지 몰라 당황한 결과이다. 아리스토 텔레스 해석자들은 ‘존재자 일반과 본래적 존재자에 대한 물음’(형이상학)과 ‘자연에 관한 물음’(자연학) 간의 연관성을 사유하지 못하고 다만 외견상 공통점이 있다는 이유 로 형이상학을 자연학 뒤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기원이 강단철 학자의 당혹함의 결과라는 사실은 곧 망각되고, 형이상학(Meta-physik)에서의 메타
(Meta)는,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는 초감각적인 것’이라는 학문 간의 위계를 형성하는
이름이 된다.
52) “우리는 [강단철학의 학문분과로서] 형이상학으로부터 본래적 철학함 [제일 철학인 형
이상학]을 해석해서는 안 되고, 거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래적 철학함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한 근원적인 해석을 통해서 ‘형이상학’이라는 표현을 정당화해야 한다.” (GM,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