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하이데거에게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은 세계와 사물의 관계를 통해 그 관계방식의 고유성이 보다 적합하게 해명된다. 세계와 사물의 관 계의 고유성은 친밀한 통일(Innigkeit)과 차이(Unter-schied)의 건넴의 놀이 에 있다. 세계와 사물은 서로의 차이를 고수하면서도 내밀하게 통일되어 있다. 하이데거는 횔덜린과 트라클의 시 세계로부터 존재와 존재자의 관 계방식을 고유하게 서술할 수 있는 언어, 즉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 방적으로 야기하고 규정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가 동일한 것이면서도 차 이 나는 것으로 있는 친밀한 통일의 놀이에 대한 서술 방식을 얻어 온다.
우선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 해석으로부터 시원적인 것(ein
Anfängliches)이자 상주하는 것(ein Bleibendes)217)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사 유 문법과 서술 방식을 이끌어 내는가에 주목해 보자218). 후기 하이데거
217) HHA, 21, 41쪽 참조. “상주하는 것(was bleibt aber)을, 그러나 시인들은 수립한다.”
218) 후기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와 횔덜린의 시세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
서도 탁월한 연구 성과들이 나온 바 있다. 기존 연구들은 횔덜린의 시 분석에서 하이 데거가 문제 삼는 것이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망각과 구별되는 존재의 다른 시원(der andere Anfang)에 대한 회상이라는 점에 대해서 대개 합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의 횔덜린 해석은 하이데거의 전회(Kehre), 즉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존재 드러나 있음(진리, 알레테이아)에 대한 물음’으로의 전회와 관련되어 해석된다.(강학순, 1995: 263) 그런데 하이데거의 전체 사유의 길에서 횔덜린 해석이 갖는 이러한 개괄적 의미를 넘어서, 하이데거의 횔덜린의 시 해석에서 무엇보 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원적인 것이자 상주하는 것’, 즉 존재가 무엇이고, 어떠한 존재방식을 갖는가의 해석 문제일 것이다.
신상희의 경우 횔덜린과 하이데거, 양자의 사유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횔덜린의 시
구에 대한 해석을 통해 후기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추론한다. 우선 횔덜린의 시의 본질은 시작(詩作)을 통해 신들의 눈짓을 알아내고 드러내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와 관 련하여 시원적인 것이자 상주하는 것은 일자로서의 신성한 신으로 해석된다. “시원적 인 것으로서 상주하는 것 [···] 그 안에는 청명을 자신의 본질로 삼고 있는 지고한 자, 다시 말해 ‘일자(Einer)’로서의 신성한 신이 “성스러운 햇살의 유희를 즐기며 살고 있 다”고 횔덜린은 노래한다” (신상희, 2009: 217-8). 이와 관련하여 횔덜린의 시 짓기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시원적 차원은 ‘일체의 존재자들을 넘어서면서 각각의 존재자에게 자 신의 현존을 수여해주는 것이기에, 그것은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의 수립 은 넘쳐흐름을 자유롭게 허용해준다는 의미에서 선사함(Schenken)이다.’ (신상희, 2009:
212) 존재가 존재자를 초월해서 자신의 현존을 존재자에게 수여해주는 것으로 간주될
때, 저 ‘시원적인 것’은 저 일자로서의 신성한 신으로 간주된다. 이와 관련하여 횔덜린
이 시 짓고 있는 바를 존재의 성스러움 속에 스스로를 감추면서 머무르고 있던 신들이 자연(퓌시스)의 신성한 모습 속에 현존하는 방식으로 나타나 성스럽게 도래하는 비밀 이다. 신상희, 「시짓는 사유: 사유하는 시-하이데거의 횔덜린 시론」, 철학과 현상학 연 구 40집, 2009. 2, 205-230.
윤병렬의 경우 횔덜린의 시 정신을 고대 그리스적 세계관과 관련해서 깊이있게 해
석한다는 미덕을 갖는다. 고대 그리스적 세계관, 대표적으로는 플라톤의 이온 과 파 이드로스 와 횔덜린의 시 정신은 공통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시인이 ‘신의 성스러운 사제’가 되고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지위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횔덜린이 고 대 그리스의 신화적 세계에 매료되어 있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입증된다. 그러므로 시인
에게 ‘시원적인 것’이자 ‘상주하는 것’이란 사방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고유한 표현이다.219)
하이데거에 의하면 횔덜린은 넷이라는 숫자를 고유하게 사유하지 않았 고 그것을 말한 적도 없다.220) 오히려 횔덜린에 의해 고유하게 말해진 것 은 넷이 서로 간에 맺는 단순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성장을 빚어내는 내밀 한 통일(die Innigkeit221))이다.
이 시를 짓고 있는 바는 신들이 모두 떠나버린 궁핍의 시대, 즉 고향 상실의 시대에 도피한 신들을 부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신들 가까이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윤병 렬, 2009, 44-8쪽 참조) 윤병렬, 「시인은 신의 성스러운 사제인가?-하이데거와 휠덜린 및 고대 그리스적 기원에서 사제로서의 시인」, 철학과 현상학 연구 43집, 2009. 11., 25-53.
강학순의 경우에는 횔덜린과 하이데거 사유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차이에도 주목한
다. 횔덜린의 시작의 대상은 ‘성스러운 것’이며, 횔덜린은 [기독교 신학적] 신을 기다리 는 시인이다. (강학순, 1995: 244) 이와 다르게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는 더 이상 형이상 학적, 기독교 신학적 사유와 조응하지 않는 시작적인 사유이며, 사상가는 존재를 말하 고 시인은 성스러운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시작과 사유는 존재현시의 탁월한 두 방식 으로 간주된다. (강학순, 1995, 253) 그럼에도 하이데거의 횔덜린 해석의 의미를 논하는 부분은 여전히 앞서의 해석들과 유사하게 논구된다. 횔덜린이라는 시인은 궁핍한 시대 에 떠난 신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도래할 신이 아직 오지 않은 시대에 역 사적인 시간을 선취한 시인이다. 그렇게 횔덜린의 시작의 본질은 도래할 신들의 소리 없는 눈짓을 알아채고 백성에게 그것을 드러내어 알려주는 것으로 논구된다. 강학순, 「 존재사유와 시작 -하이데거의 휠더린 해석을 중심으로-」, 존재론연구 , 1집, 1995.5, 241-267.
이에 필자는 횔덜린의 시에 대한 하이데거 분석을 인과논리에 기반한 동형성의 관
계와 다른 ‘친밀한 무-한한 관계’로 사방세계(das Geviert)의 친밀한 통일의 관계 논리를 해명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해 보았다.
219) 이에 관해서는 하이데거가 1959년에 강연한 바 있는 "Hölderlins Erde und Himmel(이 하, HEH)"을 참고했다. 이 원고는 다음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 Vittorio Klostermann, 1981, 횔덜린 시의 해명 , 신상희 옮김, 아카 넷, 2009.
220) HEH, 170, 338쪽 참고.
221) 'Innigkeit'에 대한 기존의 번역어로는 ‘친밀성’ (신상희: 2009, 338), ‘내밀한 통일성’
(박찬국, 1998: 222)이 있다. 필자는 'Innigkeit'에서 세계와 사물 간의 통일성이 갖는 함
[땅, 하늘, 신적인 것들, 죽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로 겹쳐짐(diese ihre Einfalt [der Vier, der Erde, der Himmel, die Göttlichen, die Sterblichen])을 우리는 사방세계(das Geviert)라 부른다. (BWD, 144) [···] 횔덜린이 말하 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먼저 그 넷의 서로 간의 친밀한 통일로부터 통찰 된다(aus der Innigkeit ihres Zueinander erblickt). (HEH, 170, 338)
그렇다면 사방세계에서 사자들이 서로 간에 친밀한 통일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해명할 필요가 있겠다. 세계란 땅, 하늘 그리 고 신적인 자들과 죽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로 겹쳐짐으로 있는 사방세계
(das Geviert)를 가리키며, 사자가 서로 간에 맺는 관계는 무-한히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관계, 즉 무-한한 관계(un-endliche Verhältnis, HEH, 163,
323)이다. 그렇기에 세계는 개별적인 것들의 총합으로 사유되지 않으며,
넷이 서로를 비추는 방식으로 하나로 통일되며, 이러한 친밀한 통일로부 터 무한한 관계가 성립한다.
중요한 것은 친밀한 통일은 신과 같은 외부의 초월적 존재자로부터 규 정된 것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의 내재적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내재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사방세계의 무한한 관계는 그 관 계가 원인으로부터 규정되는 일종의 ‘동형성(Gleichförmigkeit)’의 관계와 대비된다. 동형성의 관계로부터는 늘 원인과 동일한 모습의 산출만이 가 능하지만, 무한한 관계로부터는 단순 소박하지만 그때마다 유일무이한 풍 요로운 생성이 해명될 수 있게 된다.
‘무-한한’ 관계가 갖는 의미는 셸링과 헤겔의 사변 변증법와 대조해 봄
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우선 네 개의 방역은 일면성과
축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박찬국의 번역어, ‘내밀한 통일성’를 참조하였다.
나아가 그 통일이 신과 같은 외부의 초월적 존재자나 혹은 인간의 사유로부터 규
정된 것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의 내재적 맥락 속에서 성립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통일
성' 대신에 '통일'이라는 번역 용어를 선택했다. 때에 따라서는 '친밀한 통일'이라는 번
역어를 혼용해서 사용할 것이다.
유한성을 갖지 않는다. 개별 영역들이 일면성과 유한성을 가질 때 그것들 은 나머지 영역들과 단절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관계 맺 는 영역들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은 관계를 순전히 영원한 것(das bloß Endlose, HEH, 163, 323)과 영원한 것으로부터 결과지 어진 것 간의 관계로 표상하는 것이다. 순전히 영원한 것은 그 자신과 동 일한 형상(동형성)만을 산출하고 내부의 통일성을 규제하기에 그러한 관 계를 통해서는 어떠한 풍요로운 성장(Wachstum)도 허용되지 않는다.222) 그에 반해 사자 간의 무한한 관계는 그로부터 성장과 재배의 풍요로움을 가능하게 한다.
그에 반해서 땅과 하늘, 신과 인간의 ‘보다 친밀한 관계’는 보다 무-한해 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일면적이지 않은 것은 그 속에서 앞서 언급된 넷 이 서로서로 유지되는 그 내밀한 통일로부터 현출하기 때문이다. (HEH, 163, 323)
그리고 세계의 거울-놀이가 사물의 사물화를 고유하게 생겨나게 한다.
세계화하는 세계의 거울-놀이는 둥근 원의 어울림으로서, [···] 이러한 원 형의 어울림이 자아내는 거울-놀이로부터 사물의 사물화가 고유하게 생 겨난다. (Di, 173, 233)
나아가 세계와 사물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야기하는 관계가 아니기에, 세계의 거울-놀이가 사물의 사물화를 생겨나게 하듯이 사자들 이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의 세계화는 사물의 사물로 됨(das Dingen des
Dinges)으로부터 고유하게 일어난다. 사자의 겹쳐짐의 통일은 사물의 사물
화로부터 그 자체로 모아진다. 사물은 세계의 겹쳐지는 놀이를 하나의 머 무름에로 선사하는 모음(Versammelung)을 그 자신의 본질로 갖기 때문이 다. 다른 말로 사물은 세계의 머무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사물
222) HEH, 163, 323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