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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자는 현존자(das Anwesende), 곧 우리에게 이미 다가와 있는 존재 자를 가리킨다. 현존자는 일차적으로 자연사물과 구별된다. 아리스토텔레 스는 자연사물을 인간을 원인으로 갖는 제작물과 구별되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원인으로 갖는 사물이라 말한다. 그러나 현존자가 무엇인가는 어떠한 원인을 갖는 것과 무관하다. 현존자는 현존과 함께, 즉 그것이 현 출해서 소멸하기까지 머무는 시간과 관련해서 해명된다. 다시 말해 현존 자의 현존은 시간,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존자의 머무름(체류 기간, die Weile)과 관련해서 규정된다.

하이데거가 현존자를 시간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것은 다음의 중요한 전제로부터 성립한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Jedes Ding hat

seine Zeit).” (ZS, 2) 나아가 현존자의 머무름은 원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이 아니다. 오히려 머무름은 현존자의 현출함과 사라짐 사이에서 현성한 다(Die Weile west zwischen Hervorkommen und Hinweggehen). (SA, 355,

519) 현존자의 현존이 이와 같이 시간과 관련해서 해명되기에, 현존자는

다른 말로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das je-Weilige)’ (SA, 354, 519)183)이기도

183) 현존자는 그때마다 시간과 함께 사고된다. 그때 시간은 후설이 말하는 근원의식에

의해 현전화될 수 있는 시간의 흐름과 구별된다. 후설에게 시간은 시간적이지 않은 근 원의식에 의해 파악되는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오히려 여기에서 말하는 시간은 아리 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생성 소멸하는 것으로서의 사물의 시간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 해되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사물이 생성해서 소멸하는 데까지 이르는 이행의 시간은 다시 시간의 지배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무시간적인 일자’에 대 립되는 개념으로 파악된다. 그런 한에서 생성 소멸하는 것들은 무시간적 일자로부터 그 생성해서 소멸하는 데까지의 이행의 시간을 분배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

하다. 결론적으로 존재자는 ‘그 자신의 시간에 상응해서 있음(Gb, 123) 으로서 존재와의 차이에서 경험된다. 즉 존재자는 넓은 의미에서, 즉 존재 와의 차이로부터, ‘존재자가 그때마다 머무름, 즉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

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존재는 존재자의 잠시 동안의 머묾(die Weil e)184)이라는 시간과 관련해서 규정됨을 알 수 있다.

존재자가 그때마다 그 자신의 ‘존재’에서 ‘시간’에 상응하기에, 존재자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Daß das Seiendes ist) 곧 다음을 말한다: 존재 그 자 체(das Sein selbst)는 잠시 동안 머무름(Verweilung), 현존(Anwesung)이다.

(Gb, 121)

그럼에도 “모든 사물이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존재자에게 시간이 안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이데거는 시간을 크로노스라 정의한다. 크로노스는 그리스적 시간 개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토포스(τόπος, 장소)와의 유비적 관계를 통해 해 명된다. (Gb, 120 참조)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시간을 토포스와 유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토포스는 그리스적 장소 개념으로 서 근대적 의미로 사용되는 ‘공간’과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공간은 시·공간 좌표 상의 하나의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세계의 점’이라 말해지기도 한다. (SZ, 478, 514) 공간이 시·공간 좌표 위의 하나의 점으로 표상될 수 있는 한에서, 그 점은 언제든 다른 점으로 대체 가능하다. 그렇기에 세계의 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특징이 나 고유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특징으로 갖는다.

데거는 사물의 생성·소멸을 그 자체로 “[존재자가] 있음”으로 파악한다. 단적으로 이러 한 사고에서는 생성·소멸하는 존재하는 것 저편에 무시간적인 일자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184) SG, 188쪽 참조. 또한 푀겔러는 원인(Warum)으로서의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가 하이

데거에게서 시간과 관련한 ‘머무름(Weile)’으로 사유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Der Denkweg Martin Heideggers, 158, 180쪽 참조.

반면 토포스는 그때마다 하나의 존재자가 거기에 고유하게 속하는 곳

(자리, Platz)을 말한다. 예컨대 불은 예외 없이 위쪽 방향으로 향하고 흙

은 아래쪽에 고유하게 속한다. 불이나 흙에 속하는 위, 아래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토포스이다. 그 중에서도 하늘과 땅은 탁월한 토포스이다. 하 늘과 땅은 다른 자리로 대체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을 통해 여타의 존재 자들의 간격과 관계가 규정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WBPA, 248, 203 참조) 이와 유비적으로 현존자는 그 자신의 고유한 체류 기간을 갖는다. 즉 현 존자에게 고유한 장소가 속하듯, 그것에 고유하고 적합한 체류 기간이 속 한다.185) 즉 현존자는 그 자신의 고유한 체류 기간을 갖는 것이기에, ‘그 때마다 머무는 것’이라고도 말해진다.

크로노스는 그리스적으로 토포스, 즉 자리(Platz)에 상응하는 말이다. 그 자리에는 하나의 존재자가 그때마다 귀속된다. 크로노스는 아무래도 상 관없는 때(부적절한 때, die Unzeit)가 아닌 [하나의 존재자에게] 그때마 다 좋은, 건네진 시간(günstige und gegönnte Zeit) 이다. [···] 시간은 그때 마다 적합한 체류 기간을 펼쳐 놓은 폭이며, 그 체류 기간에 상응해서 현존자는 각기 그때마다-머무르는 것(ein Jeweiliges)이다. (Gb, 120)

나아가 현존자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적합한’ 체류 기간은 현존자로 하

185) 현존자에 시간이 속한다고 하는 것을 그것에 고유하게 장소가 속하는 것과 유비적으

로 설명하는 것은 SZ에서 ‘존재자의 방역(Gegend)’ 개념을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보 다 분명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SZ에 따르면 해, 달 그리고 별 등과 같이 지속적인 존 재자(Ständig Zuhandenes)는 하늘에 그것의 고유한 장소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에 의하면 인간은 교회와 무덤이라는 고유한 자리를 갖는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삶 을 살아가는 한에서는 그것에 따라야만 하는 최상위의 법칙(das höchste Gesetz)과 같은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탄생과 죽음은 인간이 우주에서 어떠한 위대한 존재자 로 거듭난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삶의 시간이며, 이러 한 삶의 시간에 따라서 교회와 무덤이라는 삶의 자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시간을 장 소와 유비적으로 논하는 맥락과 연관해서 보자면, 인간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교회와 무덤이라는 장소는 인간에게 고유하게 허락된 시간으로부터 규정된 것이라 볼 수 있 다.

여금 존재자 전체를 자체 내에 품도록 해준다. 현존자에게 적합하게 속하 는 체류 기간은 곧 현재적 현존자를 부재자와 연결시키는 이음매(die Fuge)186)이기 때문이다.

적합함은 이음매이다(die Fuge ist der Fug). (SA, 357, 522-3)

이음매는 다른 말로 ‘틈새’ 그리고 ‘이어맞춤, 접합하다’등으로 번역되는 말로서, 존재자 전체로 하여금 고유한 짜임의 통일을 갖도록 한다. 이음매 는 존재자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존재가 존재자에게 건 네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의 견지에서 존재에 대 해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