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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려: ‘알레로이스와 티시스’

현존자의 존재 방식이 갖는 배려와 사랑은 알레로이스(ἀλλήλοις,

einander, 서로에게 혹은 서로서로를, SA, 358, 524)를 통해 해명된다. 즉

‘알레로이스는’ 현존자의 현존 방식이 다른 존재자, 즉 존재자 전체와 이

미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런 한에서 현존자가 현존자 전체의 견지 에서 이해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딜스의 번역의 경우, 알레로이스는 번역에서 누락된다.213) 반면 하이데거는 알레로이스(서로에게)를 디도나이(주다)와 티시스(배려)와 필연적 관계를 갖는 개념으로 번역한다. ‘디도나이 [···] 티 신 알레로이스’는 ‘[잠시 머무르는 현존자는] 적합함을 서로에게(알레로이 스) 속하게 한다’로 해석된다. 즉 그때마다 머무르는 현존자가 고유하게 있음, 즉 현존자의 현존 방식은 타자와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것 으로 해석된다.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은 개방된 비은폐성의 영역 내부에서 또 다른 머 무르는 것과의 현존 속에 [있다]. (SA, 360) [···] 하나가 다른 하나를(서 로서로를) 배려(Ruch, Sorge)하는 것이야말로(디도나이 [···] 티신 알레로 이스) 현존자로서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들이(die Je-Weiligen) 도대체 어 떻게 머무는 지를, 다시 말해서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이] 어떻게 적합함

을 [서로에게] 주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한다. (SA, 361, 528)

213) 니체 역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을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니체는 잠언 해석에서

‘알레로이스’를 아예 번역하지 않는다. SA, 358, 524쪽 참조.

‘알레로이스’에 대한 번역은 티시스(τίσις, SA 358, 526)와 결합될 때 고유하게 확정된다. 통상적으로 티시스는 ‘대가(die Buße)’로 번역되지만, 하이데거는 티시스를 ‘염려(Ruch)’라 번역한다. ‘염려’를 가리키는 'Ruch'는 중세 독일어인 'ruoche'에서 유래한 말이다. 'ruoche'는 신중하고 세심한 염 려(die Sorge)214)를 의미한다. 즉 티시스는 어떤 다른 것이 그것의 본질에 머물도록 마음 쓰는 것을 가리킨다(Sie [die Sorge] kehrt sich daran, daß ein anderes in seinem Wesen bleibe. SA. 360, 527).

잠언에 따르면 아우타(타 에온타), 즉 그때마다-머무르는 현존자는 우 선적으로는 부적합함 속에 존립한다. 앞서 언급했듯 현존자의 현존에는 자신의 현존을 고수하고자 함이 동시에 속하기에 말이다. 현존자들이 현 존을 고수하면서 머무름 속에 남아 있고자 하는 경향성(Neigung)을 따를 때, 그것들은 적합하게 머무름(der Fug der Weile)에서 등을 돌려 버린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 현존자가 적합하게 머무름에서 등을 돌려버리는 것

(아디키아)은 “타자의 체류하는 본질에 대해 주의하지 않는다”를 의미한

다. 즉 디케에서 등을 돌려 버리는 것은 현존자들이 다른 것들에 반해서 확장해 나가는(Doch dadurch spreizt sich auch schon jedes Weilige auf

gegen das Andere) 것을 가리킨다.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인 현존자의 현

존이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체류기간 동안 머묾을 가리키고, 그러한 현존 자체 속에 존재자 전체의 모음이 주재하는 한에서 말이다. 즉 그 자 신의 체류기간 동안 적합하게 있느냐(디케), 혹은 그 자신에 속하는 이음 매와 무관하게 그 자신의 현존을 더 지속하고자 하는가(아디키아)는 이미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그때마다-머무르는 것들이 자신의 현존을 고수하고자 함은 서로에 대해 배려하지 않음(rücksichtlos)을 의미한다. (SA, 359)

‘현존자가 지속하고자 고집함’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하이데거의 릴

214)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에서 다루어지는 ‘염려(Sorge)’는 SZ에서 다루어지는 ‘염려’개념

과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SZ에서는 염려가 현존재 전체 존재와 연관해서 만 해명되었다면, 여기에서 염려는 현존재조차 거기에 포함되는 존재자 전체의 관점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케 시 분석에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릴케의 시 분석을 통해, 서구 근 대의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 ‘염려하지 않음과 사랑받지 못함’임을 보여준 다. ‘현존자가 지속하고자 고집함’은 근대 이후 인간의 형이상학적 의욕

(das Wollen) 속에서 드러난다. 존재자 전체의 척도이자 중심이 된 인간은

세계를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정립하고, 자연을 자신을 위해 조성한다.

(WD, 287-8, 422 참조) 이와 같이 자신의 의욕을 세계와 자연 전체에 걸

쳐 관철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기 관철의 욕구는 서구 근대 이후의 ‘[힘에 의] 의지’로서의 존재가 지배하게 됨과 연관된다. 그리고 이는 기술시대에 가장 강화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의지로로서의 존재가 지배하는 기술시대 에 존재자의 존재방식은 모험이지만 그 모험은 역설적으로 안전하다. 의 지로서의 존재가 중심이 되어 그러한 존재가 허락하는 만큼만 존재자의 모험은 허락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모험은 안전한 만큼 제한적이며, 우려-없이(sorg-los) 있다

그것(저울에 놓인 것)은 자신의 근거 [모험으로서 있는 존재]로부터 그 근거에 감싸인 채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모험되고 있는 것은 우려-없이

(sorg-los) 있다. 모험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우려-없이 안전하다. (WD,

281, 413)

존재자의 모험이 ‘우려-없이’ 있다는 것은 존재자가 타자에 대한 근심이나 배려 없이 자신의 의욕을 존재자 전체에 관철하는 방식으로 있음을 말한 다. 이와 같이 ‘현존재가 지속하고자 고집하는 의지’는 타자에 대해 배려 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반대로 현존자의 현존이 존재자 전체의 견지에서 사유될 때 ‘알레로이

스’와 ‘티시스’는 ‘서로서로를 배려함’의 방식으로 있음으로 사유된다. 그

렇지 않고 현존자의 현존을 현존자 전체의 견지에서 사유하지 않을 때, 알레로이스는 다양성 내부에서 애매한 상호관계에 대한 명칭으로만 남는 다. 반면 그때마다-머무는 것의 다양성을 알레로이스 속에서 더 엄밀하게 사유하고, 알레로이스를 티시스와의 필연적 연관 속에서 사고할 때, 존재

자가 이미 존재자 전체를 품는 방식으로 있음을 더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우선 타 에온타를 현존자라고 사유하고, 또 이것을 그때마다-머 무르는 것 전체로서 사유하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알레로이스라는 낱말 이 이 잠언에서 의미하는 바가 분명해진다. [···] [티시스에 대한 알레로 이스의 필연적]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수록, 하나가 하나를 배려 한다는 것(Ruch geben eines dem anderen, 디도나이··· 티신 알레로이스)이 야말로 그때마다-머무르는 것이 현존자로서 일반적으로 머무르는, 즉 적 합함을 주는(디도나이 디켄) 방식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다. (SA, 361, 528)

결론적으로 현존이란 언제나 현존자의 현존(존재자의 존재의 고유한 말)인 한에서, ‘줌’은 존재자가 자신에게 안배된 체류기간 동안 머무름, 즉 현출에서 소멸에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있음을 가리킨다. 나아가 존재자가 있음이 존재자 전체 속에서 있음을 가리키는 한에서 존재자가 소멸에로 이행하는 방식으로 있음은 타자인 존재자에 대한 배려를 포함한다.

3 장 후기 하이데거의 차 -()

1 절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에서 세계와 사물의 관계로

후기 하이데거에게 존재론적 차이는 퓌시스 내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을 가리킨다. ‘에온’이 가리키는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은 존재와 존재자가 서로 각기 실체로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 로 있음을 가리킨다. 즉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이면서 존재자는 ‘존재 안 의 존재자’이다. 나아가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은 존재자가 존재자 전체 의 존재의 안배에 따르는 방식으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존재 자 전체의 통일성이 존재자 전체 외부의 신과 같은 일자로부터 가능한 것

이 아니라 존재자가 그 자체 품고 있는 존재로부터 실현된다. 이러한 존 재자 전체의 통일성의 논지는 존재와 시간의 관계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보다 분명해진다.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은 존재자가 본래적 시간의 지배, 즉 존재의 지 배에 스스로를 짜맞추는 방식으로 고유하게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자 존재 자의 있음에 시간이 고유하게 속하는 것으로 있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은 존재와 시간의 서로 건넴의 놀이(das Zuspiel)215) 를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존재와 시간의 서로 건넴의 놀이는 에어아이크 니스(Ereignis)216)의 견지에서 본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이다. 그런데 하이 데거에 의하면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가 존재와 시간의 서로 건넴으로서의 에어아이크니스로부터 사유될 때, 존재와 존재자 간의 관계는 세계와 사 물 간의 관계를 통해 그것의 고유성이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에어아이크니스로부터 이러한 관계[현존하게 함(Anwesenlassen)으로서의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이제 세계와 사물의 관계(das Verhältnis von

Welt und Ding)로서 스스로를 보여준다. 이러한 관계는 이제 어떤 식으

로든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로서 파악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럴 경우 그 것의 고유성은 상실될 것이다. (PSZS, 40-1, 101)

세계란 사자, 즉 하늘과 땅 그리고 신적인 자들과 죽을 자들이 하나로 겹쳐짐으로 있는 사방세계(das Geviert)를 말한다. 다른 말로 세계는 사자 들 서로가 서로의 본질을 유지한 채 하나로 통일됨(die Einfalt, 겹쳐짐)이 고유하게 일어나는 거울-놀이(das ereignende Spiegel-Spiel, Di, 172, 232)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자들이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의 세계화는 사물의 사 물로 됨(das Dingen des Dinges)으로부터 고유하게 일어난다. 즉 사물은 사

215) 후기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본질은 놀이(das Spiel, OVM, 58, 58)이다.

216) 하이데거는 「시간과 존재」에서 에어아이크니스를 존재와 시간, 양자의 사태관계

(Sachverhalt) 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에어아이크니스에 관해서는 3부의 3장 2절에서 다

시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