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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매에서 벗어나 있음: 아디키아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왜 현존자는 자신 에게 이미 속해 있는 것을 다시 비로소 고유하게 속하게 해야 하는가? 결 론부터 말하자면 현존자가 있는 방식에는 지속적인 현존을 고수하고자 하 는 근본 성향이 동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하이데거가 아낙 시만드로스 잠언에서 분석하는 개념은 아-디키아이다. 아디키아(ἀ-δικία) 는 디케에 부정어인 ‘아’(-α)가 결합된 말로서 ‘디케가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디케’는 법적이고 도덕적 정의(das

Recht)를 가리키므로, 아디키아는 법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의(Ungerechtigkeit)

를 가리킨다. 반면 하이데거는 아디키아를 “어떤 것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Etwas ist aus den Fugen)”라고 해석한다(SA, 354, 519).

하이데거에게 현존자가 그 자신의 고유한 체류 기간을 갖는 것으로,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어째서 이 잠언 해석에서 “현존자 가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말하는 아디키아가 문제로 등장하는 가? 현존자는 ‘그때마다 머무르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게 고유하 게 속하는 체류 기간(auf seiner Weile)을 넘어 ‘지속적인 것이라는 의미에 서’ 더 현존하고자 하는 근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때마다-머무르는 것은 그 자신의 현존을 고집한다(Das Je-Weilige beharrt auf seinem Anwesen). (SA, 355, 520)

‘이음매를 벗어나 있음(Unfug)’을 가리키는 아디키아가 현존자의 근본 특성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는 ‘현존자의 있음’, 곧 현존자의 현존이 현 출했다가 소멸하는 방식으로 이행하지 않고, 자신의 현존을 지속하고자 완고하게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아디키아는 현존자의 현존의

고유성에서 해명된다.208) 현존자가 부재자와 함께 현성하지 않고 현재적 현존자로서만 있고자 하기에 아디키아가 성립한다.209) 그러므로 “이음매 (die Fuge)에서 벗어나 있다”고 정의되는 아디키아는 시간과 관련해서 다 음과 같이 재정의된다.210)

부적합함(Unfug)으로서 아디키아는 머묾을 고집하고 지속적 존립을 완강 히 주장함을 의미한다. (SA, 355. 520) [···] 머묾을 고집하는 것은 이음매

(die Fuge)의 견지에서 보자면, 순전히 존속하려는 항거(der Aufstand)이

다. (SA, 521, 356)

자신의 현존을 지속하고자 하는 현존자의 현존 방식은 동시에 다른 현 존자와의 관계 속에서 재해석된다. 현존자가 그 자신의 지속을 고집하는 것은 다른 현존자를 더 이상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208) “현존자는 자신이 존재하는 바의 그런 현존자로서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 현존 그

자체에는,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가능성과 아울러 이음매도 틀림없이 함께 속해 있다.” (SA, 355, 519)

209) 앞서 잠언의 첫 째 문장에서 해석된 에온타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현재적 현존자와

비현재적 현존자를 지칭한다. (SA, 349, 513) 현재적 현존자는 부재자 사이에 단절된 조작과도 같이 있지 않으며, 현재적 현존자와 비현재적 현존자(부재자)는 함께 현성한 다.(west alles zusammen. SA, 350) 그러나 현존자가 아디키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현 재적 현존자가 자신의 지속을 고집하는 방식으로 비현재적 현존자와 함께 현성하지 않 는다는 것을 말한다.

210) 신상희는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에 대한 각주 62번에서 Fuge를 An-wesen(현존)과 관

계된 것으로, 그리고 Un-Fuge를 Ab-wesen(부재)과 관계된 것으로 주해한다. 그러나 필 자가 보기에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즉 die

Fuge, 즉 현존자의 적합한 이음매(혹은 안배된 시간)에는 현존과 부재(An-wesen과

Ab-wesen)가 모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Un-Fuge는 현존자가 자

신의 현존을 더 지속하고자 하는 “지속적 현존”을 추구하는 것과 관계되는 것으로 아 디키아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잠언의 첫 째 문장에서 해석한 존 재자 전체에 부재자가 포함된다는 해석 내용과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 상희 옮김, 숲길 , 각주 62) 520쪽 참조.

현존자[그때마다 머무르는 것]가 더 이상 다른 현존자에 대해 마음을 쓰 지 않는다(es [das Je-Weilige] kehrt sich nicht mehr an das andere Anwesende). (SA, 359, 526)

그리스적 존재자 개념에 따르면 존재자는 존재자뿐만 아니라 존재자 전체 (das All des Seienden, SA, 330)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언급되었 다. 존재자가 있음이 존재자 전체 [타 에온타]를 자체 내에 품는 것을 가 리키는 한에서, 존재자가 자신의 지속을 고집함으로서의 ‘아디키아’는 그 러므로 존재자 전체 속에서 다른 현존자들과 맺는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존자들은 본디 현출했다 소멸하는 방식으로 이행함으로써 그것의 고 유한 있음의 방식을 실현해야 하는데, 현존자가 자신에게 적합한 체류기 간에 반해서 더 오래 체류하고자 할 때 현존자들 간의 배려에 문제가 생 긴다. 정리하자면 아디키아는 현존자가 자신에게 안배된 체류 기간을 넘 어서 더 오래 존속하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현존자가 아디키 아 상태에 있을 때 다른 현존자에 대한 배려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관 련하여 현존자의 다른 현존자에 대한 배려가 성립하지 않을 때 현존자의 도래 가능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면 현존자가 출현하고 소멸하는 이행 과정에서 그 자신에게 ‘적합한’

체류 기간 동안 머무름은 현존자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이음매(die Fuge)를 비로소 속하게 한다. 즉 현존자에게 적합하게 속하는 체류기간 동안 머묾 이 현재적 현존자를 부재자와 연결시키는 이음매를 있게 한다. 결론적으 로 만일 현존자에게 적합한 지속성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때마다 머물면서 이행을 계속하는 존립(je weilende Bestehen des Übergangs, SA,

357, 523)일 뿐이다. 그러나 현존자의 현존 그 자체에는 이음매도 틀림없

이 함께 속해 있지만, 아울러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역 시 속한다. 그러므로 현존자에게 속하는 지속성은 단순한 존립을 지속하

기를 주장하지 않고, 부적합함(Un-Fug)을 견뎌냄(die Verwindung211))이다.

즉 현존자가 자신에게 적합하게 속하는 체류 기간 동안 있음, 곧 존재자 의 존재는 부적합(Un-Fug)을 견뎌냄이다.

존재는 부적합을 견뎌냄이다(das Sein ist die Verwindung des Unfugs).

(Gb, 118, SA, 357, 523)

결과적으로 ‘줌’은 “동일한 그것들이, 부적합함(Unfug)을 치유하는 가운 데 적합함을 속하게 한다(디도나이... 아우타 디켄...테스 아디키아스)”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줌’은 현재적 현존자가 그 자신의 지속적인 존립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대신에 비현존재적 현존자에로 스스로를 속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마다-머무르는 현존자는(Das je-weilig Anwesende) 자신의 머무는 기 간 동안 머무르면서 현존이라는 자신의 본질에 적합함을 속하게 한다 (gehören läßt). 디도나이(διδóναι)란 이러한 속하게-함(Gehören lassen)을 말한다. [···] 현재적 현존자는 비현재적 현존자 사이에서 단절되어 밀려 난 것이 아니다. 현재적인 현존자는 그것이 비현존재적인 것에게로 스스 로를 속하게 하는 한에서 현재적이다(Dis gegenwärtig Anwesende ist das gegenwärige, insofern es in das ungegenwärtige sich gehören läßt). (SA, 523, 357)

211) 'Verwindung'에 대한 적합한 번역어를 고르기는 쉽지 않다. 현존자에게는 그 자신의

현존을 고수하고자 하는 본질이 고유하게 속한다. 이에 현존자의 현존은 현존재의 존 재 방식이 갖는 그러한 부적합함을 존재자 전체의 견지에서 치료하는 방식으로 극복한 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에서 굳이 'Verwindung'을 ‘극복’이라 번역하지 않은 것은 이를 서구 형이상학이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을 확보하는 방식과 구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구 형이상학의 견지에서 있을 수 있는 존재자의 부적합한 존재방식, 예컨대 선에 대 한 ‘악’ 혹은 존재에 대한 ‘무’는 모두 선 혹은 존재에로 환원되는 방식으로 ‘극복’ 가 능한 것으로 논해졌다. 반면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에서 존재자가 가질 수 있는 부적합 한 존재 방식은 그것이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적합한 것으로 환원되거나 소멸되지 않 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Verwindung'을 ‘견뎌냄’으로 번역해 보았다.

하이데거는 초기 그리스 시대의 현존자 전체에 대한 경험을 개별 대상 들을 무작위적으로 나열한 것의 배열로 간주하는 방식과 선을 긋는다. 현 존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디케는 현존자가 자신의 현존을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 즉 부-적합을 견뎌내는 속에서 자신에게 속하는 기간 동안 있음을 말한다. 즉 디케는 현존자가 자신의 존속을 고집하고자 하는 부적합한 성 향을 견뎌내는 가운데 고유하게 있음을 가리킨다.

앞서의 디도나이에 대한 논의와 연관해 보자면, 디케는 타자와의 공존 을 가능하게 하는 배려와 사랑이다. 현존자가 자신에게 속하는 체류 기간 동안에만 머무르고 자신의 소멸에로 이행함으로써 타자의 도래 가능성을 비로소 열어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디케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소멸 혹 은 부재로서의 무가 존재자 전체의 견지에서는 현존하는 것으로 경험되고 해석된다는 것을 동시에 전제한다.212)

전통 형이상학에 의하면 소멸은 부재로, 나아가 무로서 해석되며, 무는 존재에 반해서 덧없고 허무한 것으로 간주된다. 연관하여 존재와 생성 소 멸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소멸하고 사 라지는 방식으로 있다, 혹은 모든 것은 현출에서 소멸에로 이행한다”는 초기 그리스의 현존자의 현존에 대한 사유는 전통 형이상학에 따르면 ‘모 든 것은 일시적이고 덧없고(vergänglich) 허무하다’와 동의어로 이해된다.

물론 하이데거에게도 현존자의 있음에 그것의 소멸함이 고유하게 속한 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비극적인 것이다. 존재자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지 속하고자 하는 성향이 남아 있기에, 존재자의 있음에 소멸함이 동시에 속 한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극의 본질을 전통 형이상학이 그러하듯 하나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부여하거나 형이상학적 유토피아를 구축함으로써 회피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를 직시하고 견뎌내야 한다고 말한다. 현존자의 있음에 소멸이 속한다는 비

212) 이와 관련해서는 후기 하이데거의 ‘무’에 대한 해석을 다루는 4부의 1장, 2절에서 보

다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