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궁극적 실체나 원리라 해석하는 것은 훨씬 나중에 생겨난 개념이다.
반면 존재, 즉 존재자 전체의 중심으로서 다양한 존재자 전체를 통일시키 는 일자(das einende Eine)는 존재자를 그것에 고유하게 할당된 시간에 응 하는 방식으로 있도록 함이자 존재자의 존재의 현출과 소멸 속에서도 계 속 주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규정이 존재에 대한 ③의 규 정에서 찾아진다. 아르케의 본질에는 출발과 두루 주재함(Druchwaltung)이 공속하기 때문에 그와 동근원적으로 존재자 전체의 짜임(die Fügung)을 건 네줌(das Hin-reichen)192)이라는 개시적 영역성(Be-reich-hafte, Gb, 109)193)을 갖는다.
4 절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존재는 존재자에게 전체의 짜임인 통일을 건네주는 것이다. 그러한 존 재가 존재자에게 건네는 짜임의 성격을 보다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잠언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음매(die Fuge)이다. 그렇기에 존재가 존 재자에게 건네는 적합한 이음매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잠언에 대한 해석 의 중요한 방향을 제공한다. 나아가 존재가 존재자에게 건네주는 이음매
는 ‘존재자 전체의 통일’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전통 형이상학과 하이데거
가 공유하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이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은 존재자 전체를 근거짓는 제일 원인인 신으로부터 가능한 것으로 논구된다. 예컨대 고· 중세 형이 상학에서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은 존재자 외부에 있는 그 자체 완전성을 갖는 신, 그것도 신의 사랑에의 의지 혹은 임재(파루시아)에의 의지로부터 해명된다. 근대 라이프니츠 이래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은 제일 원인으로 서의 신의 임재에의 의지와 개별 존재자의 본질을 해명하는 방식으로 설 명되었다. 그러나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이 신과 같은 제일 원인의 ‘예정 과 섭리)’ (HHA, 90)의 산물이라면 존재자 전체의 생성과 소멸은 이미 예 정되어 있는 섭리의 표현이자 실현일 뿐이다.
그러나 니체의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적 통찰은 존재자 전체의 통 일성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생성의 세계를 고통의 골짜기로 전락시키고 그렇기에 하나의 기만으로 전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플라톤 이래 전 통 형이상학은 조화와 통일이 존재자 전체를 걸쳐 주재한다는 것을 진리 로 받아들인다. 형이상학이 추구해 온 진리에 따르면 세계는 윤리적으로 질서 지워져 있으며, 존재자 전체는 사랑과 조화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통일되어 있고, 인간 삶은 보편적인 행복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존재자 전체의 조화와 통일이 어떠한 변천과 결여를 갖지 않는 상 주(常住)하는 것에 의해 담보되는 한에서 형이상학적 사유에서의 ‘참된 세 계’와 세계의 통일성은 어떠한 변천이나 결여를 배제하게 되고, 생성하는 세계를 희생하면서 행해진다.194) 그렇다면 이러한 니체의 비판은 하이데
194) 니체에 의하면 전통 형이상학의 존재자 전체의 통일과 조화에 대한 사유는 인간 스
거의 사유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에서 존재자 전체의 통일이 서구 형 이상학적 사유 전통과 다른 방식으로 말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잠언에 서 존재자 전체의 통일은 차안적인 세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며, 존재 자 전체에 신비롭게 상응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자연의 신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잠언은 존재자 배후에 전체를 총괄적으로 포괄하는 일 자(一者)를 설정하고, 그로부터 통일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자 전체의 통일은 존재가 그것의 시간적 지배를 존재자에게 그것의 출발에서 부터 생성과 소멸 전체를 관통해서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존재자가 이미 그때마다 자신에게 건네진 체류 기간 동안 있는 것이 기 때문이다. 즉 존재자가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자체 내에 품고 있기 때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자 전체의 통일은 존재와 존재자의 이중성의 차이와 공속으로부터 실현된다. 그리고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잠언에서의 ‘이음매’에 대한 해명이다. 그런데 ‘이음매’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를 전개하기 전에 ‘이음매’에 대한 다른 해석 가능성을 검토해 보는 것이 논의의 전개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데리다에 의하면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에서 이음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현존자들 사이의 조화로운 일치’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으며, 결
국 이음매 내에서의 차이를 희생시키고 일치와 모음만을 우선시한다.195)
스로가 가변적이고 무의미한 생성의 흐름 속에서 안전과 확실성을 보장받기 위한 체계 화되고 조직화된 고안물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고의 3부 5장의 논의를 참조 하라.
195) J.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참조. J. Derrida, Specters of Marx, Routledge, 1994. 이 책의 인용 페이지는 한국 판본 페이지, 영어판 페 이지의 순서로 병기한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햄릿의 “시간은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 (Time is out of joint)”는 말에서 보여지는 정의의 조건과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잠언 해석에서 ‘이음매’, ‘디케’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나는 정의의 조건을 대비시킨다. 데리다는 비록 하이데거에게서 현존과 현존자, 그리고 양자의 관계에 대한 부당한 해 석-가령 현존을 ‘일자’와 동일시하는 방식으로-에 기초하고 있으나, 하이데거의 잠언 해석을 통해 그가 드러내고자 하는 문제의 초점, 즉 잘사는 방법으로서의 정의의 문제
하이데거 해석에 따르면 디케는 ‘조화로운 일치’에 부합하는 것으로, 적합 함이자 정의를 가리킨다. 나아가 디케는 이음매이자 적합함을 가리킨다.
반면 아디키아는 “어떤 것이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things are out of
joint)”, 즉 현존자들이 그것들 사이의 조화로운 일치에서 벗어나 있는 것
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디케와 이음매 그리고 그와 상반되는 아디키아 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존재자들의 조화와 일치를 정의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섬세한 독자인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일치’에 대한 사고는 차이나 는 것들과 불화하는 것들의 같음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유보적으로 인 정한다. 또한 데리다는 하이데거에게 일치는 헤겔과 다르게 어떤 체계의 종-합 이전에 작용하는 것이라는 유보사항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음매가 현존(Anwesen)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사고되는 한에서는, 하이데거는 항상 어떤 차이보다 모음과 일치를 우선시하는 위험을 겪게 된다.
하이데거는 항상 그렇듯이 [···] 조화롭게 한데 모으거나 받아들이는 일 치(Versammlung, Fug)에 호의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아닌가? (Derrida,
2007: 69, 27) [···] 항상 그렇듯이 하이데거는, 필수적인 신중함을 많이
보여 줌에도 불구하고, [···] 이접보다, 존중을 불러일으키는 중단보다, 재 와 뒤섞여 버릴 수 없이 많은 절대자가 탄각 속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일자(Un) 속에서는 그 유일성이 보장될 수 없는 어떤 차이보다, 한데 모 음과 같음(모음, Versammlung, 이음매 Fug, 한데 모으기 legein 등등)을 우선시할 때, 이러한 위험을 겪게 된다. (Derrida, 2007: 72, 28)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에 대한 하이데거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데리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질성, 타자의 도래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 로써 보다 정의로운 삶의 방식을 강구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의 이접, 분산 내지 차이를 손상시키지 않고서, 즉 타자의 이질 성을 삭제하지 않고서 그 자체를 함께 유지하는 곳에 도달하는 것을 정의
는 주목할 만하기에 이에 대해 다룬다.
의 조건으로 상정한다. 타자의 이질성을 삭제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에서 찾아진다. 이음매에서 벗어 나 있는 시간은 현존의 형이상학에 의해 이해된 시간과도 구별되는 것으 로, 과거의 현재, 현행적 현재, 그리고 미래 현재의 연결로 이해되는 양태 화된 현재들이라는 현존의 형이상학에서의 시간 경험과 다르게 은밀하게 때맞지 않는 시간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정의는 이러한 때맞지 않은 시간 으로 도래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때맞지 않은 시간을 세익스피어 의 햄릿 에서 “시간은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 Derrida, 2007: 52, 18)는 문장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입증한다. 확실한 이음 매나 규정 가능한 접합이 없는, 즉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은 시간 의 틈새(Derrida, 2007:51, 18)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틈입 자체에 의해 자신이 개방되도록 내맡기는 것이다.
이질성과 타자의 도래 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논증은 하이데거에 대 한 비판과 함께 수행된다. 데리다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잠언 해석은 이질성의 도래 가능성인 때맞지 않은 시간의 도래 가능성, 즉 시간의 틈새와 차이를 삭제하면서 통일과 일치에로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데리다의 비판은 하이데거의 존재를 전통 형이상학 적 맥락에서의 차이를 배제하는 ‘일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성립한다. 데리 다에 의하면 하이데거에게 존재자 전체의 통일성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로 부터 가능한 것인데, 현존이 차이를 배제하는 일자인 한에서, 존재자 전체 의 통일성을 현존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사고하는 디케는 이음과 일치를 조 화롭게 접합시킨다. (Derrida, 2007: 69, 27)
데리다가 현존을 차이를 배제하는 일자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 의 맥락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데리다는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에 대한 하 이데거의 해석에서 현존이 현존자에게 넘겨주는 ‘줌’을 주어버림 (Weggeben)이 아닌 허여하기(Zegeben)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어버
림’과 ‘허여하기’의 차이에 주목하는 데리다의 독해는 탁월하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정당한 주목에도 불구하고 ‘허여하기’에 대한 독해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