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미술교사 다시 되기
2. 미술 표현에서 어린이의 ‘삶’을 알아가기
미술수업 속의 권위에 대한 반성은 보편적인 미술교사의 모습에 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교사의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한 과정에서 나 타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술교사’ 그 자체를 벗어나려는 것은 아니다. 미술수업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한 반성이 미술교사를 국어 교사가 되게 한다거나 수학교사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 문이다. 미술교사 되기의 과정은 기존의 미술교사가 점유하던 영토 를 재영토화 한다는 점에서 변형이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특수한 재 영토화 없이는 탈영토화가 있을 수 없고 덜 탈영토화된 것이 가장 탈영토화 한 것으로 재촉하게 된다고 하였다(Deleuze & Guattari, 1980/2001: 579-580).
성찰의 과정에서 시작된 미술교사 다시 되기는 또 다른 미술교 사 ‘되기’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미술교사의 탈영토화는 미술교사 그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강밀도’와 ‘일관성의 구도’로 설 명될 수 있다. ‘강밀도’란 존재자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보다는 하 고자 하는 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그 능력의 ‘양 적인’ 정도를 의미한다. 강밀도의 개념은 사물의 상태와 변이를 포 착함으로써 사물의 상태를 변이 안에서, ‘되기의 구도’ 안에서 연속 적이고 내재적인 과정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그러한 강밀도의 연 속체가 ‘일관성의 구도’를 이룬다(이진경, 2002: 41-42).
제 2절에서는 미술교사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를 찾는 것이 아 니라, 미술교사를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을 설명하고 자 한다. 미술교사를 보다 잘 하기 위한 내재적인 연속성을 학습자 들의 삶과 미술 표현의 연계에서 찾고자 한다.
나는 미술수업을 하면서 장기간 어린이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린이의 표현에는 미술실 밖에서 일어나는 삶의 이야기
들이 담긴다. 표현뿐만 아니라 어린이는 태도에서도 삶을 드러낸다.
그러한 삶에 대한 표현은 미술실 내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생산해낸 다. 권위를 벗어나 다른 형태의 수업 진행을 모색하던 나는 어린이, 학습자들의 삶이 매우 크게 미술실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린이의 삶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미술교사를 잘하기 위한 ‘다시 되기’에 어떠한 과정으로 영향을 주었는지 다음의 세 가 지 이야기에서 살펴볼 것이다.
가. 그림을 찢는 아이
2011/ 7/ 수업일지
올해 봄부터 보아온 7살 철수는 매우 똘똘하지만 자신감이 없었 다. 스스로 못 그린다는 생각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게 그려지면 그림을 찢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린 그림이 마음에 들 때 까지 3장이고 4장이고 계속 찢어버렸다. 그런데 찢는 양이 많을 때 일수록 지도가 더 어렵다. 표현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 분이 어디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내가 자세히 관찰 할 기회를 주 지 않고 보여주기 창피한 듯 바로 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어린이 의 드로잉 북은 하나, 둘, 재미난 표현들이 모아져 가는데 철수의 드로잉 북은 찢어버린 것이 많아 홀쭉하게 비워져 있다. 철수는 밝고 활발한데 항상 자신감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인지 발달이 다른 친구들보다 빠르다. 대상을 보고 파악하는 것이 빠른 데 손이 보는 것을 따라가지 못할 때 못 그린다고 생각하고 찢어 버렸다. 자신감 없는 어린이에겐 칭찬이 가장 큰 약이다. 그런데 철수는 작품이 그리 잘한 것이 아닌데 선생님이 자신에게 자신감 을 주려고 칭찬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철수에게는 잘 그렸는지 스스로 파단하기 쉬운 관찰을 통한 표현 이나 사실적인 대상을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거나 감정 표현과 같은 형태가 정확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들을 같이 해보았 다. 그런 작업들은 잘 했는지 못 했는지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 분하는 철수의 눈으로 판단이 안 되는 것들이었으므로 찢거나 구 겨버리지 않았다.
어린이들에게 미술을 지도하는 데에는 어린이의 마음을 읽어주 는 세심함이 필요했다. 철수와 함께 하는 몇 개월의 미술수업에서 나는 철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했다. 철 수는 대상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시각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명화를 감상하거나 대상을 관찰하고 특징을 말하는 것들을 보면 철수의 시 각이 또래보다 잘 발달 되어 있음을 가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표 현의 활동에 있어서는 항상 자신감이 없었다. 소극적인 어린이에게 서 자주 나타나는 경향은 화지보다 항상 작은 크기로 그리거나 한 쪽 팔로 감추면서 그리는 등의 행동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철수는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에서는 밝고 활발했으며 소극적이지 않았다.
본 것에 대해 언어로는 표현도 잘 하고 자기 의견도 잘 말했다. 그 런데 평면 드로잉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찢어버리는 행동 이 수업마다 있었다. 그것도 교사가 보기 전에 얼른 찢어버리고 잘 되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계속 찢어버리는 그런 행동들이 이어졌다.
주로 인물이나 사물처럼 보이는 대상을 관찰하고 표현해야 하는 시 간에 더 자주 그런 행동들이 나타났다. 철수는 항상 유치원 이후 바 쁜 일과가 이어졌다. 미술 이외에 음악, 체육, 영어, 수학 등 항상 방 과 후 무엇을 하는지 이야기 해주곤 했다. 수많은 학습의 일정들이 철수에게 힘든 시간들임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철수가 왜 스스로 표현한 것을 찢어버리는지 이유를 찾고 싶었지만 그것은 내가 볼 수 있는 범위보다 넓은 관계 형성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철수는 사실적인 표현을 “잘 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 판단했다. 또한 철수는 스스로 보기에 보이는 대상과 유사한 형 태로 표현되지 않으면 스스로 “잘못 그렸다”고 판단하고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7살의 표현이 보이는 대상과 같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교 사인 나의 생각이다. 7살 철수의 눈에는 보이는 사물들이 이제 막 객관적인 사물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런 시각을 평면에 옮기는 방
법을 찾는 중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 입체를 평면에 옮겨 그리는 방법의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예를 들어, 간단한 투시법, 약간의 원 근감을 이용하는 방법 등이었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표현이 가능해 지면 철수가 자신감을 가지고 오히려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했다. 그런데 철수의 반응은 “선생님 너무 어려워요”였다.
이후 다시 고민 끝에 당분간 철수에게는 보이는 대상을 관찰하 고 표현하는 시간들을 자제하고 현대미술이나 추상미술과 사실적 표현을 하지 않는 미술 작품들을 함께 보면서 철수의 생각이나 느 낌이 나타나는 작업들을 평면이 아닌 공간을 이용하거나 질감을 이 용하는 미술 표현으로 같이 해보았다. 그런 작업들에 흥미를 보였고 스스로도 잘 표현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형태 로 완성되는 미술들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면서 차츰 평면 작업들도 해보았고, 시간이 갈수록 철수가 좋아하는 사물들도 조금씩 드로잉 으로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 해가 다 끝나갈 무렵엔 철수의 드로잉 북도 찢어버린 곳이 더 이상 없었다.
철수와 같이 하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방 법으로 미술 활동을 안내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철수를 어떤 미 술 활동으로 안내하는가보다 철수의 마음 상태를 알아주는 일이었 다. 그림을 왜 보여주고 싶지 않은지,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주는 것이 필요했다. 어린이는 숨 기고 싶은 것들을 쉽게 털어서 교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마 음들을 부정적인 행동이나 말투로 나타내면서 숨기고 교사가 다가 오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더 지도가 힘들었다.
찢어진 곳이 없는 드로잉 북으로 채워졌을 때 철수는 누구보다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엄마, 내 시간표를 미술 위주로 해주세요.”
초등학교를 입학을 앞둔 철수가 방과 후 활동의 시간표를 짜는 엄 마에게 했던 말이다.
나. “그램 죠”의 이야기
2011/ 10/ 첫째 주 수업일지
진수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4년 전 즈음, 진수의 어머니가 진수 가 다섯 살에 그린 그림들을 가지고 오셨을 때이다. 진수의 드로 잉에는 이미 다섯 살에 원근법과 투시도를 이해한 표현들이 등장 하고 있었다. 사실적인 묘사가 너무나 뛰어난 아이였다. 이후 다시 진수를 만나게 된 것은 1년 전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이 다. 1학년의 진수는 사실적인 묘사가 너무 뛰어나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뭐든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집에서 연필과 간단한 드로잉 용구 이외에 별다른 미술 재료에 노출되어있지 않던 터라 여러 가지 다양한 미 술작업을 거칠 때마다 진수는 높은 집중력을 보였고 일주일간은 새로 알게 된 기법과 재료를 반복하여 혼자서 심화하는 시간을 갖 는 아이였다. 또 다음 주가 되어 새로운 재료와 미술 활동들이 소 개 되면 그 한 주는 그날 알게 된 재료와 기법으로 또 일주일을 보내는 아이였다. 사실적인 묘사가 너무 뛰어나 형태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진수에게 명암법이나 투시도와 같은 사실적인 대상을 평 면에 옮기는 방법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려주면 심화가 되지 않을까 생각 했다. 1학년 아이에게 명암법이나 투시도가 좋은 미 술교육 방법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되는 부분도 있었 다. 왜냐하면 명암법이나 투시도는 3차원의 대상을 평면에 재현하 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사용한다. 그런 데 보통 8살의 어린이들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완전 히 발달하지 못해 있기 때문에 명암법이나 투시도를 익히는 것은 불필요한 선행학습이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수의 경우는 이미 시각이 대상을 정확히 보고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한 다는 판단으로 사실적인 표현을 위한 기법들을 가르치기 시작했 다. 관심 있는 부분이 더욱 심화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