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어린이 미술수업 보기
1. 재료와 기법 중심의 수업
가. “오늘 수업 뭐예요?”13)
2007년 새 학기를 맞이하기 전, A미술관 미술아카데미의 어린이
13) “오늘 수업 뭐예요”의 내용은「내러티브 탐구를 통한 교육적 경험의 성찰」
(서제희, 2009)의 내용 중 일부를 수정, 편집 한 것임.
수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과거 대학, 대학원을 다니던 시 기에 몇 년간 미술관이나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실 등에서 어린이 들을 가르쳤지만, 내가 직접 교육내용을 기획하고 진행을 전담할 수 있는 기회는 처음이었기에 의욕에 가득차서 새 학기를 시작하였다.
A미술관의 어린이 미술아카데미의 수업들은 고학년을 위한 감상 강좌 이외에는 15주 동안 대부분 표현 실기로 이루어진 수업을 하 고 있었다. 회화, 조소, 공예, 디자인 등의 영역이 골고루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고, 그 중 1주 정도는 미술관에서 전시 관람을 한다. 어린 이를 위한 실기 수업들은 미술관 휴관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학년별, 연령별로 개설되어 있었다. 동네의 수많은 ‘미술학원’과 같은 사교육 기관 이외에 특별한 미술수업을 바라고 찾아오는 이들이 A미술관 수업의 학부모들이다. 과거 전시 관람수입에 의존하던 미술관들이 교육에 관심을 가지며 적극적인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교육서비스 유형의 하나인 A미술관의 어린이아카데미는 2000년대 이후 어린이를 위한 강좌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했 고 이를 진행하기 위한 교사초빙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나도 그러한 분위기에서 A미술관에서 어린이를 지도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A미술관의 어린이 미술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한 학기 15주의 내용으로 교육되고 있었다. 같은 교육 내용이 연령 별로 세반 개설 되는데, 세 명의 교사가 함께 교육 내용을 협의하여 공동으로 기획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학기 시작 전에 그간 이 기관에서 행해졌던 교 육 내용이 무엇인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잠깐 찾아본 것 외에 는 어떤 내용으로 수업해야 하는지 전달받지 못했다. 하지만 3반이 공동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나와 같은 반을 맡은 교 사 두 명과 학기 시작 전에 수업내용에 대해 회의를 하면서 그간의 수업 진행 사항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음은 학기 시작 전, 새 학 기 수업 준비를 위해 있었던 회의 기록이다.
2007/ 2/ 마지막 주 회의기록
회의를 위해 A미술관 근처의 카페에서 두 교사와 만났다. 약속장 소에 먼저 나간 나는 감상자료, 실기, 감상, 비평의 교수학습 자료 집 등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갔다.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까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다른 두 교사와 함께 다음 학기 수업에 대해 이 야기를 시작했을 때 내가 가져온 책들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두 교사가 지난 학기에 무슨 재료를 가지고 어떤 표현으로 수업을 했는가에 대해 열심히 기억을 되살려 얘기해 주었다. 또한, 그들은 돌아오는 학기의 수업은 앞서 했던 재료와 기법은 중복 되 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집중하면서 수업 내용을 설계하고 있었다.
나: 같은 재료를 또 쓰는 것이 안되나요? 같은 재료라고 지난 학 기와 같은 표현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용이 다르면 되지 않아요?
김교사: 엄마들이 싫어해요. 적어도 여기 보낼 땐 다른 곳과 다를 거라는 기대감이 있는데 재료가 같으면 “이거 지난 학기에 했 던 거네” 하거든요. 기법을 조금 달리 해볼 수는 있지만 그래 도 새로운 재료들을 다루어 주는 게 좋죠.(중략)
나는 김 교사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미술수업에 대한 기대 가 새로운 재료에 대한 기대와 동일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것도 이 해하기 어려웠다. 재료가 같으면 “이거 지난 학기에 했던 거네” 라 고 여긴다는 학부모들의 생각을 말하는 김 교사 또한 다음 학기 수 업을 위한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찾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다.14) 같 은 재료를 주더라도 어린이마다 다른 표현과 내용이 있을 것이며, 같은 아이에게 전에 했던 재료를 가지고 1년 후에 다시 하게 한다 고 해서 그 전과 같은 표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무언가 잘못된 교육 방향인 것 같았다.
14) 수강료에 의존해야 하는 학교 밖의 미술교육기관들은 학부모들의 반응에 민감 할 수밖에 없다. 학부모들과의 정기적인 상담과 수업 이후의 수업 과정 설명 등이 주된 업무 중의 하나였던 A미술관의 어린이 미술수업은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학 부모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했다.
A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실기 중심이었는데 ‘미술을 어 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회의가 아니라 어떤 ‘재료와 기법’을 사 용할 것인지에 관한 회의가 되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지난 학기에 진행되었던 재료와 기법 중심의 수업이 마음에 들 지 않았지만 지금의 수업 방식에 적응되어 있는 어린이들을 살펴보 고 싶기도 해서 다른 두 교사의 의견에 따라 전과 같은 방식으로 한 학기의 수업을 진행하였다.
2007/ 3/ 셋째 주 수업일지
내가 맡고 있는 창작 반은 4개의 큰 책상이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책상은 조립식으로 서로 합치거나 분리하기가 용이하게 되어 있다. 나는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4개 조로 나누어 각 조 별로 8명을 배치하였다. 총 인원은 30명이지만 매주 결석하는 어 린이가 2-3명 정도임을 감안하고 지각하는 어린이가 2-3명 정도 되기 때문에 3개조에 8명씩 앉히고 각 조에 보조교사들을 1명씩 배치한다. 지각을 하는 어린이의 경우 다른 어린이와 진도가 다르 게 되고 보충 설명이 필요해지므로 나머지 1개조의 책상에 따로 앉히고 내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보조교사들은 각 조별의 인원 구 성을 매주 동일하게 맞추어 한 학기 동안 지속적으로 전담한 어린 이들을 지도하도록 하였다. 나는 전체적으로 모든 어린이의 작업 과정과 진행 상황을 살피면서 늦게 오거나, 떠들어서 수업 진행에 방해가 되는 어린이들을 분리하여 앉히고 지도한다. 수업 진행시, 각 조별로 배치한 보조교사의 수업 진행 역량이 다르기 때문에 내 가 모든 어린이를 고루 순회 지도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보조 교사 B의 경우 어린이를 열심히 지도하긴 하지만 수업에서 의도 한 부분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내가 B교사의 조에만 머물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주로 전체 진행을 주도하고 보조교사들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최대한 고루 어린이들 을 지도할 수 있도록 조별로 돌아다닌다.
수업시작 한 시간 전부터 보조교사들과 나는 각 작업 책상 위에 인원별로 재료들을 나누어 두고 필요한 크기로 잘라놓는다. 그 외 에 공용 재료들은 별도의 테이블에 두고 사용한다.
수업 시작 시간이 다가오면서 한두 명씩 미술작업실로 어린이들이 들어온다.
현수: (기대에 찬 목소리로 들어오면서) 선생님, 오늘 수업 뭐예 요?
나: 어~ 오늘 음악으로 미술을 했던 작가 작품을 볼 건데...
현수: 아니요, 오늘 뭐하냐구요.
칠판 미술작업 책상 미술재료
캐비넷 출입구 <그림 1> 미술작업실 배치도
위의 일지에서 보면 나는 학기 초에 수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조별 인원 구성이나 함께 지도하는 교사들과의 역할 분담에 고심하 고 있었다. 8-9세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미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에는 여러 가지 조작 능력이 요구되었고, 이러한 과 정을 도와줄 수 있는 이가 필요했다. 재료를 조작하는 과정에는 단 순한 오리기나 붙이기부터 여러 가지 용구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섬 세한 소근육 사용이 필요한데, 아직 성장 중에 있는 어린이들은 그 러한 조작에 미숙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달랐다. 3명의 보조 교사들은 주로 이러한 재료의 조작이나 용구의 사용을 도왔다.
<그림 1>의 미술작업실의 배치도를 보면 교사의 순회 지도가 용 이하도록 책상을 가운데로 모아 놓았고, 조별 모둠 수업이 가능하도 록 배치되어 있다. 교사의 순회 지도가 필요한 시간은 주로 재료와
기법을 다루는 방법적인 부분들을 알려주는 시간이었는데 교사의 동선이 길지 않도록 모여 있다. 미술 작업 책상은 여러 재료들을 모 아 작업하기에 용이하도록 큰 사이즈이며 한 책상에 7-8명의 아이 들이 마주보며 앉는다.
수업 전에 교사들과 나는 수업할 인원 수에 맞추어 그날의 주제 에 맞는 재료를 준비한다. CD로 꾸미기, 빗질 붓질 디자인, 프로타 쥬 재구성 등과 같이 수업의 제목 자체가 기법과 재료 중심인 커리 큘럼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수업 주제에 필요한 재료의 수량을 체크하고 어린이들이 사용하기 쉬운 크기로 잘라 구분해 놓는 것이 수업 준비였다.
수업은 2시간 30분 동안 제작을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나 드로잉 과정 후에 준비된 재료들을 이용하여 한 작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첫 학기에는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그간 행해지던 수업 방식을 따랐다. 그런데 수업이 진행될수록 나는 수업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 았다. 미술에서 어린이에게 무엇을 이해하게 하며 무엇을 나타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어떤 재료를 쓸 것인지, 어떻게 사용 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수업 준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어린이에게서 가장 자주 듣는 말 은 “선생님, 오늘 수업 뭐예요?”였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어린이들 의 목소리는 매우 기대에 차 있었다. 무엇을 가지고 수업하느냐는 의미였는데 어린이들은 평소 사용하지 않던 재료들, 다양한 질감과 물성을 가진 재료들을 조작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재료나 기법 중심의 실기 진행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과 달리 어린이 들은 새로운 재료를 다루는 것에 매우 큰 흥미를 보였고 새로운 기 법을 소개하는 것은 어린이의 집중력을 높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 는 감상과 비평을 통한 이해 학습이 실기 표현 이전에 이루어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