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미술수업에서 상호작용의 양상
2. 행위적 상호작용
나는 수업을 녹음하고 전사하고 촬영하면서 대화나 언어로 기록 되지 않는 상호작용의 시간에 주목하게 되었다. 미술수업에서 교사 는 어린이들에게 언어 이외의 방법으로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권장한다. 어린이들 스스로 표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는 데, 그 과정에서 언어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시간들이 나타난 다. 미술수업은 기법의 시연이나 재료의 조작과 같은 행위를 교사가 보여주고 어린이들은 교사의 행위를 모방하면서 표현 방법을 습득 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사와 어린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행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수업에서 교사의 행위가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 침묵의 시간
교사가 수업을 진행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수업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연구자이자 관찰자이기 전에 수업을 진행하고 어 린이를 가르쳐야 하는 교사였다. 그래서 수업 중의 대화는 녹음을 하고 전체적인 수업의 모습들을 동영상이나 사진기로 촬영하여 이 후 자료 수집을 시작하고 분석하는 기간에 다시 보았다. 그런데 녹 음 자료의 전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미술수업의 중요한 체험들 중
많은 것들이 대화나 언어로 기록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동영상 촬영기는 한 쪽을 조망하고 촬영되고 있으므로 동영상의 촬영으로 도 남길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계속 사진기를 들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에 사진기는 한 곳에 고정시켜 촬영을 한 다. 어린이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사진기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의식 하고 사진기 앞에서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늘 수업마다, 장기간 촬 영이 계속 되면 아무도 사진기가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수업 상황으로 돌아갔다. 오로지 나의 기억 속에서만 있는 수업의 상호작용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료 수집과 분석의 시간에 알 게 되었다. 그래서 기록되지 않는 수업 중의 ‘침묵의 시간’에 일어나 는 것들에 주목해 보았다.
침묵의 시간에는 수많은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눈빛과 행동을 통 해 교사는 어린이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어린이의 집중이 어디에 서 일어나는지, 태도는 어떠한지를 파악 할 수 있다. 미술수업의 상 호 작용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침묵의 시간 동안 일어난다. 나는 이 침묵의 시간이 가장 바쁜 ‘기다려주기 시간’이다. 어린이가 스스로 관심거리를 찾을 시간, 어린이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시간, 어린 이의 태도를 파악하는 시간, 언제 반응을 해주어야 할지 판단하는 시간이다.
‘기다리는 시간’은 외적으로는 방임적 교수 활동인 듯 보이지만 교수 활동의 내적 측면으로는 가장 활발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시 간이다. 또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은 어린이의 집중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은 침묵이 이어지기 힘들다. 미술은 개인의 창작을 통해 개성적 표현이 이루어는 것을 독려하는 분야이다. 어린이의 개인적인 작업 시간은 이 침묵의 시간 동안 일어나기 때문에 나는 수업이 조용할수록 어 린이의 미술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수업의 중반 즈음부터 나타나는 침묵은 수업 종료시점까지 지속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침묵의 시간이 깨어지는데, 그것이 어린이들로부터 시작되면 ‘집중이 끝났다’라는 신호이다. 어린이는 미술 표현의 과정에서 스스로 탐색에 빠져 집중하게 되는데, 그 탐 색의 과정이 끝나면 침묵도 깨어진다. 침묵을 깨는 방법은 집중 뒤 에 오는 쉬는 태도, 혹은 친구에게 말걸기, 장난하기, 스스로 “그만 하고 싶어요” 라고 교사에게 당당히 말하기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 로 나타난다. 교사인 나는 이 침묵의 시간이 수업 종료시점까지 긍 정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랬다. 어린이들은 연령별로 개인차가 크지만 대부분 연령이 낮을수록 한 가지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짧 다. 집중은 분명히 어린이의 흥미에 부합하는 활동이 있을 때 일어 난다. ‘집중이 끝났다’는 ‘탐색이 끝났다’라는 것이고 탐색이 끝난 것 은 어린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들이 더 이상 그 활동 중에 없다 는 것이다. 나는 표현의 집중 시간이 지속되려면 어린이의 탐색이 끝나갈 즈음 또 다른 탐색 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어린이의 흥미 를 지속시키고 집중을 유도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수업 중 나타난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 어린이가 아니라 나의 ‘반응’
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기다려주기’가 침묵으 로 미술 활동의 집중 시간을 지켜주고 있다면, 기다려주면서 적절한 반응의 시간을 찾아야 조금 더 깊이 있는 집중으로 안내 할 수 있 었다. 나의 ‘반응’은 어린이의 관심과 탐색 거리가 끝나는 시간과 동 일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관찰은 세심하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수업 중 기다려주는 시간은 매우 바쁘다.
나의 ‘반응 해주기’는 어린이가 집중하고 있었던 미술 활동 중의 바로 앞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앞 지점이라는 것은 수업의 최 종적인 성취 수준에 근접한 앞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 에서 바로 다음에 이어질 활동을 예상하고 그 단계를 흥미롭게 이
어줄 만큼의 반응이다. 나의 ‘반응해주기’는 어린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준 내에서 이루어지며 그 수준을 찾아내어 변화될 수 있게 도와주는 행위이다.
‘반응 해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격려와 칭찬 등의 간단한 언어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이러한 반응은 다른 친 구들의 집중을 깨뜨린다는 단점이 있다. 한 공간 안에서 교사의 칭 찬이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칭찬받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 어린이의 집중을 방해하기 도 한다.
수업 중 침묵을 깨는 나의 ‘반응 해주기’의 방법은 몇 가지로 나 타날 수 있다. 첫 번째, 시선을 다르게 유도하여, 어린이가 집중하고 있는 것들에서 시각이 조금 더 넓어질 수 있는 다른 측면을 보도록 하거나 알게 하는 것, 두 번째, 재료의 조작이나 기법에 의해 집중 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재료와 기법의 또 다른 측면을 제시하는 것, 세 번째, 지금 하고 있는 활동에서 평소 아이가 좋아 하던 혹은 관심 있어 하던 요소를 같이 연결시켜 주는 것 등의 방 법으로 반응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들은 간단한 언어로, 행동으로 혹은 기법의 시연 등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수업 중 침묵의 시간에 일어나는 ‘기다려주기’가 어린이를 관찰하 고 파악하는 시간이라면, ‘반응 해주기’는 교육적 의도와 방향이 어 린이에게 다시 전달되면서 ‘성장’으로 안내하는 시간이다.
나. 반복의 효과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나는 재료와 기법을 중심으로 미술 활동 이 진행되는 것에 반대해 왔다. 이는 외부에서 주어진 미술 활동이
어린이 내면의 성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런데 어린이의 표현을 지도하면서 기법이나 방법적인 표현의 훈련 이 오히려 어린이의 자유 표현을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다. 아무런 방법을 알려주지 않을 때 오히려 어린이는 표현의 어 려움을 겪는다.
다음의 수업에서 나는 그동안 반대해왔던 표현 기법 중심의 수 업이 어린이들에게 자유 표현과 관련한 교육적 의미를 줄 수 있음 을 발견하였다.
2011/ 9/ 넷째 주 수업(8-9세) -먹으로 그리는 야외풍경화 수업-
나: 얘들아 오늘은 우리 밖에 나가서 풍경을 스케치 할 거야. 그 런데 스케치만 하고 들어와서 먹으로 색을 입히는데 먹은 검 은색 한 가지만 나오쟎아? 그런데 이 먹으로 색은 하나지만 여러 느낌을 낼 수 있어. 방법은 들어와서 가르쳐줄게. 일단 우리 나가서 자유롭게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스케치 해 보자. 주의할 것은 너무 멀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 4 시까지는 교실로 들어와야 한다는 거야. 밖에 보이는 뒷산, 미 술관 풍경, 분수대, 조각상들 어느 쪽을 그려도 다 좋은데, 중 요한 것은 그 풍경 속에 주제가 뭔지 꼭 드러나야 한다. 주제 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 장 잘 보이게 나타나야 한다는 건데, 조각물이 주제면 조각물 이 잘 보이게, 미술관 건물이 주제면 건물이 잘 보이게 그려 야 하겠지. 자, 더 궁금한 것들은 나가서 그리면서 또 질문해 보자. 조 별로 줄서서 차례로... 얘들아 각자 화판과 종이 연 필, 지우개 챙겨야지.
(조별로 그룹을 지어 야외에 자리 잡고 앉는다. 주로 분수대 가 있는 음악당 앞과 조각물들이 있는 미술관 앞에 자리를 잡 았다.)
주영: 선생님, 저 건물 그려도 되요?
나: 그럼, 어느 것이든 좋아. 그런데 저 건물이 주제라고 저것만 덩그러니 그리면 재미없다. 주변에 나무들, 뒷산도 그려주면
더 좋겠지? 너희들은 분수대가 주제구나? 분수대 주변에 키 작은 나무들도 그려 넣고...
(각자 화판을 들고 앉아 그리면서 잠깐씩 분수대에서 놀면서 자유 롭게 그리는 모습)
(한 시간 후, 실기실로 돌아옴)
나: 다 들어왔지? 조금 쉬었다가 먹과 붓, 접시를 나눠 줄 테니까 먹으로 색을 입혀보자.(부산한 어린이들)
(밖에서 그리다가 교실에서 앉아 그리는 것이 답답해 보임)
(그러나 교사들이 재료를 나누어 주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시 집중하는 분위기)
나: 자 얘들아 여기 봐봐. 먹은 종이에 그릴 때에 여러 가지 농도 로 표현 할 수 있어. 농도라는 건 물과 먹이 붓에 어느 정도 의 비율로 섞여있는지를 말하는 거야. 우선 물이 적고 먹이 많을 때...(화선지에 선을 긋는다) 어때? 아주 진하지?(모두 둘 러서서 지켜보고 있다) 다음 물이 더 많아 질 때,(화선지에 선 을 긋는다) 더 흐려지지? 그리고 아주 물을 많이 타고 먹은 조금일 때,(화선지에 선을 긋는다) 더 흐리지?
애들: 우와!
나: 그런데 이럴 땐 아주 조심해야해. 왜냐면 물이 많지만 붓에서 물기를 많이 빼내야 화선지가 물에 젖어서 찢어지지 않지. 화 선지는 얇아서 물에 잘 찢어지니까 물을 많이 탈 때에는 먹과 잘 섞어 농도를 맞춘 다음 물기를 좀 없애고 그리는 거야. 그 래야 찢어지지 않는다. 자 이해가니? 잘 모르거나 하다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은 선생님에게 물어보자. 자, 그럼 스케치 위에 먹으로 그려볼까?
경준: (너무 먹이 번져버려서 스케치 형상이 없어지려 한다.) 나: 경준아 먹을 쓰는데 먹끼리 너무 붙어있으면 번져버리지. 먹
은 조금씩 여백이 남아도 되니까 이렇게 띄어서 써주자. 다른 사람들도 봤지?(같은 조 어린이에게)
(먹으로 칠하다 보니 금방 완성이 되어 버렸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