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는 1998년 핑클(Fin.K.L)로 데뷔했다. 핑클은 아이돌 문화의 시초격인 서태지의 등장 이후 기획사가 제작한 댄스 아이돌인 ‘1세대 아이돌’의 대표적인 걸그룹이다(정민우, 이나영, 2009; 김이승현, 박정애, 2001; 김현정, 원용진, 2002). 90년대 정치적 세력의 약화가 남긴 틈을 비주류 청년 문화와 대중 음악 산업(김창남, 2004)이 메우면서 등장한 것이 서태지라면, 1세대 아이돌은 서태지 현상에서 목격한 폭발력을 시스템화 하여 연달아 제작된 대중 문화 상품이었다. 서구에서 스타의 원형이 되는 영화 스타(movie star)가 스타 시스템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모랭, 1992)과 달리 국내 아이돌은 그 시작부터 기획사에 의해 철저하게 제작되었다. 1세대 아이돌은 캐스팅부터 데뷔까지 대형 기획사가 전 과정을 통제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1세대 아이돌 스타는 기획사에 따라 차별적인 이미지 메이킹 전략을 고수하였다. 예컨대 SM은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콘셉을 주로 선보인 반면, 핑클을 제작한 대성기획의 경우, 보다 자연스러운 의상과 분장을 통해 친숙하면서도 동경할 수 있는 이미지 전략을 채택하였다(김수아, 2011). 걸그룹의 경우 SM이 제작한
S.E.S.는 “신화화된 소녀 이미지”를 고수했고, 핑클의 경우 “정형화된
소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차우진, 2009).
이는 1세대 아이돌의 또 다른 특징인 대결 구도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초기 걸그룹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소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국내 걸그룹은 성애화와는 철저하게 분리된 소녀였다. 고등학생이 입을 법한 넉넉한 크기의 교복이 선호되었고, 뮤직비디오는 순백색을 자주 활용했으며, 노랫말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등 ‘어리고 여린
사랑’이 단골 주제였다. 소녀를 향한 대중의 취향도 확고했으며 때로는 억압적이기 까지 했다. 예컨대 소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나이가 되거나, 소녀가 성애화의 이미지를 시도할 경우 해체에 이르는 역풍을 맞을 수 있었다.
‘소녀가 되어라’는 명령이 당시 걸그룹이 직면했던 상업적, 사회적
요구였다면 핑클은 이 과정에서 독특한 지점을 보여준다. 핑클의 초기 앨범은 차우진(2009)의 표현대로 “전형화 된 소녀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데뷔 앨범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곡 ‘내 남자친구에게(1998)’의 뮤직비디오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여고생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교실에서 시작한 이 뮤직비디오에서 핑클은 교복을 연상시키는 핑크색 체크무늬 옷을 입고 등장하며, 흰 별 아래서 순백의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하고, 교실 공예 시간을 연상시키는 종이 별, 종이 나무 옆에서 가녀리게 웃음 짓는다.
얼굴 윤곽이 사라져 버릴 듯한 밝은 조명, 그리고 극단적인 하이 앵글도 스타일상의 특징이다. 2집의 앨범 제목 <White>처럼 흰 색은 소녀들의 때 묻지 않는 깨끗함 순결함과 연결되어 소녀 이미지를 구축한다. 또한 각 앨범에서 핑클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난 니꺼야’를 외치는 순애보 사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림 1] 핑클 ‘내 남자친구에게’ 활동 모습
S.E.S.가 극단적인 순수함을 강조해 아예 무성적인 소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 간다면(차우진, 2009 참고) 핑클은 데뷔 초기부터 소녀와 함께 여자의 이미지도 은연중에 드러낸다. 물론
1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곡이 여고생-소녀를 전면에 내세운 ‘내
남자친구에게’였다고는 하나, 타이틀곡은 여인의 아픈 이별을 노래한 곡
‘blue rain’이었다. 가사 내용도 버림 받은 여인이 이별을 고한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며,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내용으로 ‘내 남자친구에게’의 화자인 여고생의 풋풋한 사랑이라기 보다 원숙한 여인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다. 소녀를 전면에 내세운 ‘내 남자친구에게’가 인기를 얻었지만 애초에 핑클을 데뷔시킬 때 낙점했던 타이틀 곡이 원숙한 여인의 사랑 노래였다는 점에서 이 그룹의 독특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소녀와 여인의 이중주는 소녀로써 성공을 획득한 데뷔 앨범 이후에서도 반복된다.
1집에서 어린 소녀의 풋풋한 사랑은 2집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달라는 여인의 순애보로 변화하는데 이러한 ‘성장’은 핑클
1집에서 알 수 있듯이 애초에 핑클이 소녀와 여인 모두를 지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2집 <White>에서 타이틀곡이자 큰
인기를 누렸던 곡 ‘영원한 사랑’은 아예 한 곡에 소녀의 이미지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자는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버무린다. ‘White’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윤곽이 없어질 정도로 밝은 조명, 극단적인 하이 앵글, 순백의 의상, 율동에 가까운 안무 등은 1집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함은 ‘내 남자친구에게’에서처럼 여고생의 것이 아니라 결혼을 약속하는 여인의 것이다. 뮤직비디오는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를 클로즈업 하고, ‘영원한 사랑’, ‘불안한 미래’, ‘나의 꿈을 너에게 주고 싶어’ 등 노랫말은 곧바로 결혼을 연상하게 한다.
소녀와 여인의 이중주는 3집 <Now>의 변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앨범에서 핑클은 이미지 전환을 시도하는데, 순백색의 의상이 주를 이루었던 이 전 앨범과는 달리 몸매가 어느 정도 드러나는 검은색 의상을 입고 등장해 음영이 강조되는 조명 아래에서 짙은 색 립스틱, 눈화장을 하고 역동적이고 동작이 큰 안무를 선보인다.
본격적으로 여인의 면모가 강조되고 뮤직비디오에서는 이효리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러한 여인의 면모는 마지막 앨범인 4집 <영원>에서도 드러나는데, 이 뮤직비디오에서는 4명의 멤버가 옛 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여인을 연기한다. 순백의 옷을 입고
웃음지었던 과거와는 달리 멤버들은 타이 마사지사, 복서, 꽃집 여자, 터프한 여자 등으로 변신해 남자의 뺨을 때리기도 하는 등 순애보를 강조하던 이전 모습에서 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도 성애화로부터는 엄격히 통제되어 있었다.
‘Now’의 뮤직비디오에서 침대가 등장하고 그 위에 눕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나, 결코 남자와 여자가 한 프레임 안에 잡히지는 않는다.
침대는 성애를 위한 매개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써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영원’에서도 ‘타이 마사지’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을 통해서 남성의 벗은 등을 등장시킨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도래한 걸그룹 전성시대가 ‘소녀 몸의 성애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김수아, 2010; 정윤수,
2011)과 달리 1세대 걸그룹은 핑클의 경우에서처럼 극단적인 신성화를
피할 경우에도 성애화를 엄격히 금지한다.
핑클의 예에서 보듯이 초기 걸그룹도 여인의 이미지를 수용하며 이를 컨셉 전환의 발판으로 활용하긴 했으나 성적인 암시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소녀와 여인의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몸의 성애화를 금지함으로써 얻게 된다고 상상되는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었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거나(blue rain),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그를 보며 눈물(영원) 짓는 것은 여인의 사랑이지만 이는 연인을 향한 순애보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순수한 것이었다. 반대로 성적인 암시는 그러한 순수성에 손상을 가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성적인 암시를 풍길 수 있는 사물이 등장하는 것조차 그 원래 의미를 바꾸어 조심스럽게 등장하거나,
벗은 몸이 등장할 때에는 그 몸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개연성’ 속에
조심스럽게 위치할 때만 가능했다. 이렇게 볼 때 초기 걸그룹에게 작용하고 있었던 가장 큰 특징은 몸을 엄격히 통제하고 성적인 암시를 제거함으로써 얻게 되는 ‘순수함’에 있었다고 하겠다.
핑클의 리더로 데뷔한 이효리는 여인으로써 핑클 멤버 가운데 소녀가 아닌 원숙한 여자로써 정체성이 가장 강했던 멤버라고 할 수 있다. 3집 ‘Now’의 뮤직비디오 전반에 이효리가 두드러지게 포착되는 것만 보아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핑클이 여인으로의 변화를 아예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갖게 된 복합적인 정체성은 솔로 가수 이효리의 정체성의 근간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광고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핑클 마지막 앨범인 4집을 전후로 이효리는 다수의 텔레비전 광고(TVCF)에 참여하는데 이 광고들은 핑클에서 그녀가 획득한 소녀성과 여성성을 이중으로 활용한
것들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과일 나라 화장품 후르츠 왁스 에너좀 헤어칼라’(2001,
05, 26)에서는 “나만큼 톡 튀진 못할걸?”이라며 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찰랑이지만 의상과 배경은 ‘내 남자친구에게’를 연상시키는 순백색이다.
‘해태제과 888’(2003, 07, 31)에서도 몸매를 강조하는 탑을 착용했지만
가슴 부근은 빈틈 없이 가렸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도 싱그럽고 밝은 느낌으로 순수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쌍방울 트라이’(2003,
08, 22)에서는 파란 조명 아래 쏟아지는 비 아래서 아픈 이별을 하는
‘blue rain’의 서사를 상대 배우 권상우와 똑같이 재현한다. 이처럼
이효리는 핑클이 내세운 순수한 소녀라는 정체성을 바탕에 두고 여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멤버들 보다 여자 혹은 여인으로써 정체성으로의 변화가 자유로웠다는 사실 때문에 훨씬 더 복합적인 이미지를 구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