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 2011에서 재인용).
리얼리티 오디션은 재능과 끈기 등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평범한 사람도 노력과 끈기 그리고 성장을 거듭하는 ‘1인 기업가’로 거듭난다면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디션 스타’의 스타덤은 셀러브리티 혹은 스타가 아니라 ‘기업가적 주체’의 성공 담론 위에서 작동한다. 오디션 스타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는 ‘재능’이라는 비범함을 갈고 닦아 위대해진 스타인 것이다. 따라서 미국발 초국가적 포맷인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국 사회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기업가적 주체’로 주체화 할 것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김수정, 2011). 이렇게 볼 때 한국 스타/셀러브리티 문화는 신자유주의와 기획사 주도의 독특한 스타 시스템에 기반한 여러 혼종적인 스타-상품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등장할 토대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페미니즘의 입장이 가시화되고 있지 않다(배은경, 2009). 오히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야기되는 다중의 위험과 중층적 위기”(이나영,
2014)는 “형식적 평등사상이 만연해 있는 신가부장제의 ‘평등 지향적
젠더 레짐’”(김미경, 2015)이라는 지배 담론과 여성운동의 과제가 이미 제도화되었다고 자평하는 논리 속에서 한국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계층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 여성이 처해 있는 현실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가시화되지 않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는 단적으로 양성평등을 이미 이룩했다는 인식 속에서 가부장제와 결합한 “신가부장제 평등한 젠더레짐의 모순적 구조”(김미경, 2015)가 잘 드러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는 때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활용하거나
확대하고 때로는 축소”(이나영, 2014) 하는 방식으로 여성의 삶에 침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운동이 지향하는 여성운동의 여러 과제들이 가시적으로 제도화됨으로써 현 단계 한국 사회는 ‘형식적’
성 평등 의식이 대중화된 모순적인 상황 속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겉으로는 성 평등을 이룩했다는 단언 속에서 여성은 공적 영역의 성공을 논할 때 조차 가정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그 척도가 되는 이중 부담의 상황에 놓여 있다.
한국 여성이 처한 이중적 상황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경제 위기와 지배 담론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다변화해왔다. 두 번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가부장제와 결합”(김미경, 2001; 김미경, 2015;
이나영, 2014)해 여성의 삶을 침략해 왔는지 보여준다. 70년대 중반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듭하던 한국은 “산업역군-가정주부의 결합”(조한혜정, 2006)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핵가족이 지배적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 전까지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남성 1인
부양체제’에 균열을 일으켰다(배은경, 2009). 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대량 해고의 여파로 아내가 노동 시장으로 진입할 경제적 필요성이 증대한 것이다. 더불어 1990년대는 대졸 여성이 등장하고 여성 노동력이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듯 경제 주체로 여성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한국 여성은 기혼 여성을 중심으로 공적 노동 시장의 진입과 이를 거부하는 기존 가부장제의 위협 속에서 이중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배은경(2009)의 분석에 따르면 외환 위기 이후 기혼 여성은 현실적으로는 실직한 남편의 불안한 고용 상황에 대비할
필요성이 증대했지만, 해고 상황이 닥치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고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배 담론은 여성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실직한 남편을 기 살려주는 보조적인 존재로 재현하거나, 소비에 탐닉하는
‘미시족’ 등으로 재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97년 이후 미디어에서
폭발적으로 등장한 ‘여풍 담론’은 여성들이 노동 시장으로 유입되는
것을 ‘여풍’으로 확대 해석하고 이 여성들이 대부분 나쁜 일자지로
유입되며, 우선적으로 해고된다는 사실을 은폐하였다(전혜인, 2014).
또한 여성 노동자는 성별 분업 통념에 기반해 부드럽고 여성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90년대는 ‘비정치성, 유연함, 수평적 사고’
등 여성적 자질을 가진 ‘여성 CEO 담론’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이분법적 성별 통념을 반영한 것이면서, 가정 주부와 유연한 노동력 모두를 요구하는 “이중 구속(double-binds) 및 토크니즘(tokenism)”
(김경은, 2010; 엄혜진, 2016에서 재인용) 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90년대 경제 위기 속에서 여성은 정당한 노동자로 인정 받지 못했으며, 여성 노동력의 유입에 저항하는 남성 중심적 시장과 가정에 여성을 붙들어 매려는 남성 중심적 지배 담론 속에 이중으로 소외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지배 담론은 여성을
‘미시족’ 혹은 ‘기 살리는 아내’로 재현하여 여성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동 시장에 진출하려는 여성에게
아내와 같은 ‘부드러움’과 ‘유순함’을 요구함으로써 시장 속에서 남성을
보조하는 ‘아내-노동자’로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97년 처음 등장한 ‘여풍 담론’은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의 존재를 양성 평등을 넘어서 여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과장하고, 소수의 성공한 여성 노동자를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남성을 앞질렀다고 기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전혜인,
2014). 이러한 과장과 기만은 한국 사회에 갑작스레 불어 닥친 경제
위기가 가부장제와 공모하여 그 타격을 여성에게 집중시키는 한편, 지배 담론은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여 가시적으로 그 문제가 드러나지 못하도록 이중 억압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는 ‘이미’ 공모한 가부장제와 약자에게 타격을 집중시키는 자본주의 속에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여성 개인의 취약성의 문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배은경(2009)에 따르면 오늘날 여성들의 위기는 이미 10년간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제 개편을 겪어 온 탓에 구조적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여성 개인의 취약성의 반영으로 치부된다. 즉, 2008년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1997년 외환 위기가 ‘여성 우선 해고’ 등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게 20-30대의 젊은 여성에게 그 타격을 집중시키고 있지만, 이미 신자유주의로의 경제 개편이 이루어진 ‘이후’라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나영 (2014)은 이러한 현실을 “약탈적 자본주의가 잔존하는 가부장제를 토대로 성장”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역설한다. 즉, 젠더 구조가 재편되기 전에 불어 닥친 경제 위기로 인해 “약탈적 자본과 성차별주의가 강고하게 결합”한 까닭에 한국 여성이 겪는 다양한 생애주기적 위기는 구조적인 문제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자기 책임’이라는 말로 축소된다는 것이다. 젠더 구조가 재편되기 전에, 여성의 노동 시장 참가는 당연시 되었고, 제도적 평등주의가 만연해 짐으로써, 여전히 여성에게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는 97년 당시 상황보다 더 처참함에도 불구하고 언급되지 못하고 있다.
97년의 경제 위기가 ‘가부장제와 약탈적 자본주의의 결합’을 통해
여성들에게 타격을 집중시켰다면,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는 신자유주의라는 글로벌 시장 경제를 통해 더 은밀한 방법으로 젊은 여성에게 그 타격을 집중시키고 있다(배은경, 2009). 과거에 비해 여성이 처한 상황은 더 이중적이고 심화되었다. 여성의 경제 참여율은 증가했을 지 모르나 남성과 임금 격차는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여성 일자리 전반의 비정규직화와 여성 내부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강고한 성 역할 고정관념은 일 가정 양립문제를 곧 여성문제로 인식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이중 부담은
여성이 ‘비혼’을 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김순남, 2016). 또한 미디어는
90년대 미시걸 담론을 떠올리게 하는 ‘골드 미스’ 담론을 통해 여성을
소비주체로 호명한다(조은, 2008). 제도적으로는 양성 평등을 이룩 했을지 모르나, 각종 통계를 살펴보면 “한국 여성의 교육적 성취와 건강과 생존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남성과 큰 차이가 없으나 경제적 참여와 정치적 권한 면에서는 큰 격차가 벌어져 있다”(이나영, 2014).
특히 친밀함의 사회적 구성 방식인 결혼과 연애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자발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는 비혼의 증가는 결혼 중심의 친밀성을 지연 혹은 포기 할 수 밖에 없는 ‘N포 세대’의 징후로 읽힌다(우석훈, 박권일, 2007). 97년의 경제위기가 1인 생계부양자 모델에 위협을 가져왔다면, 88만원 세대의 등장은 2인 생계부양자 모델을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 등장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여전히
불평등한 젠더 규범으로 인해 일과 양립의 불가능성을 젊은 여성들이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비혼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문선희, 2012). 즉, 전통적인 결혼 제도에 내재한 불평등과 사회 경제적으로 여성에게 부담을 지우는 불평등이 이중 억압이 심화되면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이를 아예 거부하는 저항적 실천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비혼이 증가는 불평등한 젠더 규범에 생애 주기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함으로써 저항하는 여성들의 개인적 전략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생애 주기의 주요한 사건을 ‘포기’ 하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라면, 다른 전략은 가부장제에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은밀히 결탁하는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이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삶을 자산가치화,
상품가치화”(엄혜진, 2016)하는 자기 관리 담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개발 담론은 이중 억압 속에 놓인 여성들에게 성별 규범 사이에서 실속 없이 갈등만 하고 있지 말고 시장 자원과 가부장제를 적절히 활용하는 ‘속물’이 되라고 촉구한다. 즉, 여성은 “기업가적 주체의 형상과 여성 자아를 일치”(61쪽) 시키려는 유연한 주체가 되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계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주체인
‘속물’이 탄생하는 것이다. 기존의 젠더 관계에서 혁명을 꿈꾸기 보다는
달라질 것이 없는 현실 속에서 적절히 타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주체에 스스로 부합 시키고자 하는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획책하는 주요 가치관 중 하나인
‘개인화’(이나영, 2014) 속에서 한국 여성은 구조적 문제에 개인적인
노력으로 맞서고 있다. 여성 운동의 목표가 제도권 안에 수용되고, 여풍 담론 등을 통해 양성 평등 담론이 대중화되었지만, 실질적인 여성
평등은 아직 요원한 상태 속에서 ‘개인적으로’ 스스로에게 쏟아지는
부담을 감내하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에게 부과되는 이중적인 현실을 개인적으로 이겨내라고 당부한다. 여기에 여성들은 일과 가정 양립이 여성의 문제가 되어 버린 현실 속에서 자발적으로 ‘비혼’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가부장제와 공모한 자본주의 속에서 스스로 성공한 여자가 되고자 ‘속물’이 되려고 자기개발에 몰두하기도 한다. 모든 경우가 여성의 문제가 구조적으로 가시화되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현실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