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랙 퀸을 통해 여성성에 내재한 인공성을 폭로했다면, ‘미쳐’에서는 이효리 자신이 스스로 드랙 킹(drag king)을 수행한다. ‘미쳐’
뮤직비디오에서 이효리는 늘씬한 모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추파를 던지는 남자를 연기한다. 그는 새침한 여인의 몸을 유혹하듯 스치거나, 희롱하듯 여인의 스커트를 들춘다. 뿐만 아니라 다리를 훔쳐보거나 몸을 훑기도 하고 심지어 장난스럽게 엉덩이를 때리기도 한다. 이효리가 수행하는 모든 연기는 이효리라는 여성이 연기하는 과장된 남성성 연기라는 점에서 전복적인 측면을 띤다. 이효리는 남성이 여성 앞에서 남성성을 과장하는 모습을 패러디함으로써 남성성에 내재한 인공성을 폭로한다. ‘미스코리아’가 여성성에 내재한 허구성을 폭로하려 시도했다면, ‘미쳐’에서는 남성성의 인공성을 폭로하는 셈이다.
더불어 이 연기들은 단순한 남성성 연기가 아니라 응시 대상이었던 여성이 성적 응시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패러디다. 남성이 여성 앞에서 남성성을 과장하고, 성적으로 희롱했던 것을 똑같이 패러디하는
것은 주체와 객체를 바꾸고 남성의 추행을 ‘언급’하는 효과를 지닌다.
예컨대 메갈리안의 미러링 스피치는 단순히 혐오 스피치를 ‘사용’한다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본인 혐오 발언을 ‘언급(mention)’하는
기능(유민석, 2015)이 있기 때문에 전복적인 측면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효리는 섹시 가수로 10년 이상 일해오면서 자신이 느꼈던 희롱과 응시를 되돌려주며 패러디한다. 이효리의 남성성 수행은 섹시 가수로 10년 이상 일해오면서 느꼈을 희롱과 성적 응시를 패러디한다는 점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남성 응시의 구조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전복성이 있다. 여기서 이효리는 스스로가 섹시 가수라는 성적 상품이었지만 그 산업의 구조를 꿰뚫고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다시 한번 나쁜 여자가 된다.
부르는 말로, 데뷔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걸그룹 스피카의 ‘뒤를 봐주는 언니’를 일컫는다. 프로그램은 90년대
“마음이 맞는 여자들끼리 맺는 의자매”라는 뜻을 가진 유행어 X언니를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꿈의 후원자, 가능성을 열어주고 응원해주는 멘토”로 재해석한다.
[그림 12] ‘이효리의 X언니’의 공식 이미지
<이효리의 X언니>는 이효리와 같은 소속사 걸그룹인 ‘스피카’를
이효리가 프로듀싱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이효리와 스피카 간의 관계 설정이다. 정민우, 이나영(2009)에 따르면 아이돌 산업은 “스타(아들)-팬덤(엄마)- 기획사(아빠)라는 성별화된 가족 표상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 기획사(프로듀서)와 연습생(아이돌)을 표상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이 관계에서 여성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는 소녀 팬으로 시작하여 분화하였지만(김송희, 양동옥, 2013 참고) 여전히 스타를 훈련하는 주체는 남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효리의
X언니>는 “이수만 아버지”, “진형이 형” 같은 남성 중심 아이돌 산업
표상 체계와는 사뭇 다른 표상 체계를 제시한다.
기존의 아이돌 산업의 표상 체계가 혈연과 남성이 중심이 되는 체계였다면, ‘X언니’ 이효리와 ‘X동생’ 스피카는 비혈연 여성 중심의 새로운 표상 체계를 보여준다. <이효리의 X언니>에서 프로듀서와 연습생의 관계는 ‘의자매’에 비유된다. 이 관계는 아버지 소속사와 훈련생 아들로 대표되는 기존의 체계보다 훨씬 사적이며 여성적이다.
대조적으로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리얼다큐 빅뱅>(2006)이 대표하는 것처럼, 아버지 소속사와 아들
연습생의 관계가 수직적인 상하 관계였다면, 스피카는 이효리를
처음부터 ‘언니’로 부른다. 스피카는 처음 이효리에게 프로듀싱을 부탁할 때 자신들이 소속사 ‘후배’이며 이효리의 ‘도움’이 절실하다며 감정에 호소한다. 심지어 프로듀싱 허락을 받아 내기 위해 예고 없이 이효리 자택을 찾아오기도 하고, 이에 이효리가 문을 열어 주지 않자 급기야는 집 앞 공원에 텐트를 치고 무작정 기다리기도 한다(2화). 이효리도 프로듀싱을 결정함에 있어서 “아무래도 내가 해줘야 할 것 같아”라며 스피카의 애원에 마음이 약해져 허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훈련주체로 등장하는 ‘언니’ 이효리는 아버지-기획사의 엄격함과 어머니-팬의 다정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훈련 주체로 등장한다. ‘언니와 동생’이라는 보다 사적이고 여성적인 관계 설정 속에서 이효리는 훈련과 동시에 양육을 도맡는다. 이효리는 하이힐을 신은 스피카에게 산 등반을 시키는 엄한 선생님면서 동시에 스피카의 내면을 살피기 위해 심리 상담을 의뢰하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녀는 멤버들의 자신감 향상을 위해 멤버별로 직접 미션을 지령하기도 하고(3화), 가족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검사 결과를 놓고 한 멤버가 울먹이자 따뜻하게 다독이기도 한다(4화).
이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가족 표상 체계가 보여주지 못했던 또 다른 억압을 시사한다. 기존의 가족 표상 체계가 스타-아들에 집중되는 기획사와 팬덤의 이중 억압 체계(정민우, 이나영, 2009)였던 것과 비슷하게 <이효리의 X언니>는 훈련 주체로서의 여성이 감당해야 할 이중 억압을 보여준다. 훈련자로서 여성 주체는 엄격하지만 부드러워야 하고, 훈련하지만 양육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효리는 독한 선배이면서 동시에 따뜻한 언니이고, 프로듀서면서 동시에 멘토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 부담은 슈퍼우먼 신드롬의 여성 셀러브리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전문성을 의미하는 그로테스크한 배역은 전통적인 여배우 역할과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오늘날 전문직과 어머니 역할은 전혀 상충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조화롭게 결합하고 있다(Jermyn, 2008; Morey, 2011). 네그라(Negra, 2010)는 모성애와 전문성의 조화로운 결합은 결국 일하는 여성에게 모성애 넘치는 어머니라는 또 다른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얻어진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이중 부담은 일터에서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사적으로는 어머니 노릇도 훌륭하게 해낼 것을 요구 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의 영향과 무관치 않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여성을 “일, 가정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선택의 자유를 가지는 주체” (Yvone Tasker and
Diane Negra 2007)로 보고 있으나 이러한 담론은 결국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중 부담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능력을 상실케 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여성이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효리의 X언니>는 훈련과 양육을 도맡을 뿐 아니라 일과 결혼을
훌륭하게 해 내야 하는 여성 셀러브리티의 이중 부담을 잘 보여준다.
이효리는 스피카의 훈련시킬 뿐 아니라 양육도 도맡아야 하며, 공적인 영역에서의 전문성을 발휘해야 함과 동시에 사적으로는 사랑스러운 예비 신부로서 전통적인 성 역할에도 충실해야 한다. <이효리의 X언니>는 이효리가 스피카라는 후배 가수를 프로듀싱하는 과정과 이상순과 결혼을 준비하는 모습을 교차 편집하여 보여준다. 스피카와 훈련 장소에는 이상순이 종종 함께 등장하여 사랑스러운 예비 신부 이효리의 모습이
‘X언니’ 이효리의 모습과 교차 편집된다. 예를 들어, 스피카와의 합숙
훈련 이후 식사자리에서 미역국을 끓여줬다는 에피소드가 공개되며
‘실제로는 착한 여자, 내조 잘하는 여자’인 이효리의 사적 자아가
강조된다(4화).
이처럼 오늘날 여성 셀러브리티는 전문성과 모성애, 엄격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지며 두 가지를 모두 성공적으로 해낼 것을 요구 받는 슈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채트먼(Chatman, 2015)에 따르면 오늘날 여성 셀러브리티는 일터에서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사적으로는 어머니 노릇도 훌륭하게 해 낼 것을 요구 받는다.
그녀는 그로테스크한 역할을 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전문성을 획득해야 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배우의 역할이었던 것들을 무리 없이 수행해야 한다. 비슷하게, 이효리는 훈련 과정에서 전문성에서 발현되는 엄격함과 어머니의 속성인 부드러움을 함께 겸비해야 하며, 가수로서 전문성을 발휘해야 할 뿐 아니라 예비신부로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중 억압은 이중 자아로 나타난다. 이효리는 공적 영역에서는 ‘나쁜 여자’이지만, 사적 영역에서는 ‘착한 여자’다.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는 전문성과 모성애를 동시에 획득해야 하는 여성 셀러브리티가 직면한 이중고를 그대로 노출한다. <MONOCHROME>의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젠더 수행과 ‘X언니’라는 캐릭터가 시사하듯이 이효리는 탑가수로서 전문성을 발휘하며 남자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나쁜 여자다. 하지만 이러한 나쁜 가면 뒤에 따뜻함과 순종적인 아내 역할을 숨기고 있는 착한 여자이기도 하다. 공적 영역에서 그녀는 가수로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나쁜 여자’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예비 신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