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소비의 팽창과 분화
국가배급과 물자공급이 중단되고 생산노동이 주변화된 공간에서 자 라난 것은 기아와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었다. 공식적 경제체제가 위축 된 한편에서는 주민들에 의해 다양한 물건을 생산, 유통, 소비하는 자생 적인 구조가 만들어졌다. 2000년대 이후 북한에서는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과 확산, 시장의 발생과 확대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시장화가 진전 되고 있다.56
54 _ 남성, 30대, 교수·기술자, 함경북도, 2007년 5월 탈북.
55 _ 북한에서 새로운 직업의 창출은 시장과 상거래의 확대와 관련된다. 오토바이 택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한 북한이탈주민의 설명은 신종 직업이 어떻게 생겨나고 확산 되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2003년)에 택시라는 말도 없었고,
… 그런데 (2006년에) 나와보니까 어느 정도인가? 나와보니까 우선 간부승용차도 체면이 없어졌더라구요. 가다가 누가 손들면 택시처럼 가는 방향 있는 사람은 돈
500원 받고 태워주더라구요. 야, 그냥 오토바이더라도 택시하는 오토바이로 하는
택시가 많고. … 처음에는 한두명이 그렇게 하고 “야, 이거 괜찮구나!” 오토바이로 가는데 누가 “아 바쁜데 나를 좀 태워주세요.”, “같이 좀 가, 내 그럼 어찌구” 또 구실 붙이기 싫으면 “내가 그럼 돈 천원 드릴께 좀 태워주세요.” 그래서 태워주고 보내줬잖아. 그럼 이 사람이 재미 붙잖아요. 누가 이거 또 타지 않겠나. 그것도 자기 가 남한테 말해요. 오토바이 있는 사람한테 말하면 그럼 그 사람도 “아, 그래?” 이렇 게 되면서 제도가 훌 만들어집니다. 삽시간에 만들어집니다, 그게”(남성, 40대, 작가, 양강도, 2006년 8월 탈북.
56 _ 시장화의 두 가지 의미에 관해서는 양문수, “북한에서의 시장의 형성과 발전: 생산물
시장을 중심으로,” 비교경제연구 제12권 제2호, p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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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분석한 양문수의 연 구에 따르면 북한에서 시장경제활동 종사자의 비중은 평균 70.5%로 나 타났다. 모든 성인남녀 가운데 시장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의 비중은 평균 23.1%로 나타나 4명 중 3명이 시장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부의 시장경제활동 참여율은 73.8%로 높게 나타났다.57
식량이나 생필품 등의 소비재 구입처로서 시장에 대한 의존성도 크게 증가하였다. 7·1조치의 후속조치로서 2003년 3월에 종래의 ‘농민시장’
을 ‘시장’ 또는 ‘종합시장’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유통물자의 범위도 공업 제품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종합시장의 등장으로 국영상점은 고사위기 에 처했고, 이에 북한당국은 무역회사가 국영상점을 인수하여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국영상점 중 일부가 수매상점으로 전환되고, 수매상점이 암시장화하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58 시장의 확대로 인해 주민들은 이제 의, 식, 주 전반에 걸쳐 필요한 소비재를 대부분 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은 소비재 구입에 있어 90% 이상이 국영상점이나 수매상점이 아닌 일반시 장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59
상거래 공간의 확대로 인해 일부 계층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고, 이는 소비 욕구의 분출과 소비 수준의 향상, 계층별 소비 성 향의 분화로 이어졌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물품에는 주종을 차지하는 중국산과 북한산은 물론 일본산과 한국산, 동남아산과 유럽 국가들에서 만든 상품도 있다. 일본산과 한국산은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57 _ 위의 글, p. 19.
58 _ 이에 관해서는 양문수, “북한에서의 시장의 형성과 발전: 생산물시장을 중심으로,”
pp. 15∼22.
59 _ 이영훈, 탈북자를 통한 북한경제 변화 상황조사, pp. 5∼11.
몰래 숨겨서 물건을 사고팔기도 하고 집에다가 상품을 갖다놓고 몰래 팔기도 한다.60 특히 가전기기, 피아노, 자동차 등은 일본산을 선호하며, 한국산은 옷, 전기밥솥 등이 인기라고 한다. 한국산 중고 옷은 특히 인 기가 높아 밀수로 들여온 한국산 옷이 있으면 “서로 가지려고 싸우고”
가짜 상표도 등장했다고 한다.
기존에 국영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었던 상품의 종류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장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장사를 통해 주민들의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가구의 일반적인 소비수준이 높 아졌다. 국영상점과 달리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은 보다 질 좋은 상 품을 찾는 소비자의 요구를 만족시켜야지만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을 확인하고 이를 상품 생 산에 반영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술과 사탕 등을 가내에서 제 조해 소매상인에게 판매했던 다음과 같은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은 소 상품생산에 있어 소비자 취향의 반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묘사 하고 있다.
일요일에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가 거래하고 있는 단위들을 아침에 다 돌아요. 그러면 이제 무엇이 부족하다든가, 무엇이 어떻다는 그 말을 다 들어야 되거든요. 내가 이 사람들한테 넘긴 음식이라든가 무엇이 소비자 가 어떻게 해달라든가 그러면, 도수를 높여 달라고 하면 더 높여 주는 거고. (여성, 40대, 교사, 함경남도, 2005년 탈북)
제품 개발의 주요 요소로 판매 가능성과 소비자의 취향을 고려하는 것은 개인의 소상품생산 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소로도 확산되었다. 조 선신보에 의하면 속옷을 생산하는 강서편직공장에서는 “사람들이 아무
60 _ 여성, 30대, 장사, 함경북도, 2007년 9월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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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입는 시대는 지나갔다. 제품의 질이 보장되는 것이 첫째 조건이 다.”는 것을 올해의 경영방침으로 결정하고 품질 제고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61 북한의 양대 화장품공장 중 한 곳인 평양화장품공장은 기 술혁신을 위해 “우선 화장품을 쓰고 사는 인민의 요구를 청취하는 것을 실리를 얻기 위한 활동의 기준점으로 삼고”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나노 자외선방지 크림, 키토산 살결물을 비롯한 20여종의 새로운 화장
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62 주문판매를 활용해 소비자의 취향을 파 악하고 소비자들로부터 요리정보를 얻어 소비자들에게 인기있는 떡상 품을 출시하는 민속요리 전문점도 등장하였다.63 상표와 외장 디자인 붐도 일어나고 있다. 경공업공장들의 요구에 따라 산업디자인 전문기관 인 조선산업미술창작사가 기초식품 상표도안, 신발도안, 화장품도안 등
7개 대상의 제품 도안을 디자인하고 있다고 보도된 바 있다.64 이는 시
장확대로 인한 소비 팽창과 취향의 세분화가 상품 생산에 미치는 영향 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소비의 팽창과 함께 계층별 소비의 분화와 소비를 통한 자신의 정체 감 확인 및 과시 행위도 나타나고 있다. 계획경제와 배급제 하에서 물자 의 제한과 결핍으로 인해 소비를 통해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제한된 계층으로 한정되었다. 시장의 팽창은 집 단주의적 방식의 소비생활에서 억제되었던 차별화된 소비 욕구를 충족 시킬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의 경제적 부나 사회적 지위를 물질적 상징의 소유를 통해 확인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욕망이 차별화된 소비행태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61 _ 조선신보, 2008년 2월 22일.
62 _ 조선신보, 2008년 2월 20일.
63 _ 조선신보, 2008년 4월 8일.
64 _ 조선신보, 2008년 4월 4일.
주민들이 소비하는 물품은 그 사람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 “그 사람이 쓰는 물건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담배이다. 남성의 경우 “담배가 그 사람을 결정해” 준 다. “고향 이상은 피워야 하고, 말보로 정도면 완전 자빠지고, 마일드 세븐은 잘사는 축에 낀다는” 것이다. 국내 담배도 대성담배공장 담배냐, 평양담배냐에 따라서 “급이 다르다”. 일반 노동자들은 “누구나 피는 해 당화, 아니면 뻥튀기, 말아서 피는 잎담배”를 피운다.65
여성들의 경우에는 옷차림이나 화장품이 계층별 소비의 분화를 보여 주는 척도이다. 의류의 경우 일반적으로 일본산을 입는지, 한국산을 입 는지, 중국산을 입는지에 따라 계층이 구분되며 상류층의 경우 “브랜드 명품, 이런 상표가 없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한다.66 유행하는 디자인 의 옷을 입었는지도 자신이 속한 계층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유행이 뒤 떨어진 옷을 입으면 아무리 옷의 질이 좋아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못 사는 데 한 벌 큰 맘 먹고 장만한 것”으로 간주된다.67
나. 관계망의 재편
시장의 확대는 주민들의 관계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사회적 관계망 은 지역사회 차원에서 국가가 ‘위로부터’ 주민생활을 관리하고 통제하 기 위해 만드는 ‘공식적 관계망’과 주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아 래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는 ‘비공식적 관계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위기상황에서는 공식적 관계망이 와해되고 그 빈틈을 비집
65 _ 남성, 40대, 교수, 함경남도, 2003년 11월 탈북; 남성, 40대, 기업소 관리직, 함경북도,
2004년 8월 탈북.
66 _ 남성, 40대, 작가, 양강도, 2006년 8월 탈북.
67 _ 남성, 30대, 기자, 양강도, 2004년 1월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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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비공식적 관계망이 확산되자 이를 억지하기 위해 공식적 관계망의 재편 및 강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공식적/비공식적 관계망의 충돌이 불거지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68
최근 북한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민반과 근로 단체 등 기존의 공식적 관계망이 약화되고 비공식적 관계망이 활성화되 고 있다. 특히 시장과 상거래관계가 새롭게 활성화되고 있는 사회적 관 계망 형성의 매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관 계망은 상호 이해관계를 교환하는 관계망이라는 점에서 사적 관계망의 특성을 지닌다.69 다음과 같은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은 주민들이 원료 판매, 상품 생산, 상품 판매(도소매), 소비를 연결하는 생산과 유통의 망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적 관계망을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의식이 그룹을 형성하지 못하면 너도 못살고, 나도 못산다는 그런 인식이 싹트게 되었거든요. 여기처럼, 글로벌처럼. … 생산지와 중 간단계, 그리고 소매까지 라인이 구성되잖아요. 그런데 이 라인이 법적 으로 승인은 안 되었지만, 장사의 모든 것이 기업의 규모를 갖춰간다는 것을 느껴요. (남성, 40대, 노동자, 함경남도, 2004년 2월 탈북)
68 _ 장세훈, “북한 도시 주민의 사회적 관계망 변화,” 한국사회학 제39집 2호, p. 106.
69 _ 장세훈은 사회적 관계망을 공동체적 관계망, 사적 관계망, 공적 관계망으로 유형화
하고, 최근 북한 사회에서 이 세 가지 관계망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고 있다. 공동체 적 관계망은 개인, 국가, 사회의 분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형성된 소규모 집단에서 집단의 집합적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주로 대면적인 접촉을 통해 맺어지는 정서적 유대 관계를 가리킨다. 사적 관계망은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그 구성원들이 사적인 이해관계에 입각해서 비인격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과 맺어가 는 사회적 관계를 가리킨다. 공적 관계망은 국가사회 내에서 형성된 관료제적 조직 체계가 시민사회로 침투해서 위로부터의 관리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망을 의미 한다. 위의 글, pp. 106∼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