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통치이념의 진화
과거와 현재의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들은 공산주의사회 건설을 이 념적 목표로 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통치이념, 즉 당의 지도사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적 목표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적으 로 입증되자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도사상도 정당성을 잃게 되었 고 결국 체제의 존재이유마저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일부 국가들은 변화된 환경에 맞게 통치이념을 진화시키거나 새로운 통치이 념을 개발함으로써 체제의 생존을 보장한 반면, 일부 국가들은 통치이 념의 진화에 무관심했거나 실패함으로써 체제붕괴라는 비극적인 결과 를 초래하였다.
새로운 통치이념의 개발과 지속적인 진화를 통해 체제유지에 성공해 온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북한이라고 볼 수 있다. 통치이념의 기능적인 견지에서 볼 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북한에서 공산주의사회 건설이라
Ⅰ
Ⅱ
Ⅲ
Ⅳ
Ⅴ
Ⅵ
는 목표 제시를 통해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통합을 이끌어냄으로써 1960년대와 같은 경제의 가시적인 성장과 인민생활의 향상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한국전 이후 북한이 소련을 위시한 동방진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유일지배체제의 구축과 함께 통치이념으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여갔다.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지도사상으로 개발된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었다.
주체사상은 북한에 수령절대주의체제를 구축하고 수령을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기능함으로써 마르크 스-레닌주의가 내세운 공산주의건설이라는 목표의 실현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지도사상으로서의 유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령절대주의 체제 구축을 목표로 한 주체사상의 통치이념화는 이념적 목표보다 수령 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조함으로써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통합을 강제된 동원과 통제로 변질시켰고 결국 전반적인 국가발전의 침체를 초래하였다.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중국이나 동유럽 국가들과 같은 체제 변화나 붕괴를 비켜갈 수 있었던 비결은 국민의 이익보다 정권의 이익을 우선하는 주체사상의 통치이념적 효과였다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만일 북한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통치이념으로 계속 고수 하였더라면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주체사상은 이처럼 수령절대주의체제의 확립과 공고화에 기여함으 로써 동구권을 휩쓴 변화의 물결이 북한에 미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 만 1990년대 북한이 직면한 대내외 위기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말았다. 경제의 총체적 붕괴와 전대미문의 식량난이 사회전
155 _ 이종석, 현대북한의 이해 (서울: 역사비평사, 2000), pp. 56~59.
반에 확산시킨 패배주의와 좌절 앞에서 통치이념으로서의 주체사상은 속수무책이었다. 김정일과 체제에 대한 충성은 허울만 남았고 주민 참 여와 통합은 통치이념보다 물리적 통제와 공포정치에 의해 간신히 유지 되었다.156
김정일 정권이 직면한 위기는 변화된 대내외 환경에 맞게 통치이념을 진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또다시 요구하였다. 당시 북한이 통치이념의 공백과 무기력에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는가 하는 것은 ‘고난의 행군정 신’과 ‘혁명적 군인정신’, ‘강계혁명정신’, ‘붉은기사상’, ‘수령결사옹위정 신’ 등 수많은 구호와 담론들을 하루가 멀다하게 쏟아냈던 사실을 통해 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호와 담론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처한 대내외 위기상황을 공식적으로 자인함으로써 주민들 속에서 안보불안을 극대 화하고 이를 안보수호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과 연계시켜 체제결속의 구심력을 보장한다는 공통적인 목적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김정일 체제 의 붕괴는 곧 북한의 사회주의제도와 국가, 나아가 민족의 공멸을 의미 한다는 것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운명과 결부시켜 인식시킴으로써 체제보위에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나서도록 교양하고 세뇌시키 는데 집중하였다.157
주민결속을 위한 이와 같은 이념적 투혼과정에 북한의 통치이념 진화 작업이 점차 체계화되어갔는 바, 이것이 바로 이른바 선군시대라는 새 로운 현실을 반영하여 출현한 선군사상인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 동지 의 심오하고 정력적인 사상리론활동과 로숙하고 세련된 령도에 의하여 영생불멸의 주체사상과 그것을 구현한 독창적인 선군사상이 정립되어
156 _ 이교덕 외, 북한체제의 분야별 실태평가와 변화전망 (서울: 통일연구원, 2005),
pp. 149~150.
157 _ 로동신문, 2000년 1월 18일.
Ⅰ
Ⅱ
Ⅲ
Ⅳ
Ⅴ
Ⅵ
우리 시대의 위대한 지도사상으로 빛을 뿌리게 되었다”고 주장함으로 써158선군사상이 변화된 환경에 대처한 김정일 정권의 실질적인 지도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였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 이후 북한 에서는 선군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며 선군사상에 기초하여 수령, 당, 군대, 인민의 일심단결을 실현할 데 대한 문제가 부쩍 강조되는 등 선군사상의 통치이념적 역할이 가시화되었다.159
선군정치를 이념분야에 확대·적용한 선군사상은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관과 수령론을 선군시대에 맞게 각색하여 김정일의 안보수호자 이 미지를 이론적으로 부각시키고 김정일과의 운명공동체의식과 수령결 사옹위정신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과 김 정일을 중심으로 한 내부결속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려는데 목적을 두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환경변화에 따르는 이와 같은 통치이념의 적응과 진화 노력에 도 불구하고 날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북한의 경제위기와 생활난은 김정일과 체제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심과 국가에 대한 헌신성, 노선과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질 적 빈곤의 장기화와 심화는 당국의 사상교육과 세뇌의 정당성과 현실성 에 대한 주민들의 의문과 무관심, 거부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으며 이 는 결국 북한사회 전반에 이념적 공백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러한 이념 공백을 김정일 정권과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비관주의와 패배 주의, 개인주의적 가치관과 황금만능주의,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과 기 대, 노선변화에 대한 욕구 등 이질적 사상요소가 급속히 파고들고 있다.
158 _ “최고인민회의 제11기 제1차 회의에서 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의 연
설,” 로동신문, 2003년 8월 4일.
159 _ 로동신문, 2005년 2월 2일; 조선중앙통신, 2007년 2월 15일.
결국 북한이 통치이념의 진화를 통해 체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위기의 근본원인에 대한 잘못된 진단과 처방, 이념과 현실 간의 괴리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나. 선군정치와 은둔통치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과 김정일 정권의 출범을 계기로 북한은 선 군정치라는 새로운 개념의 통치방식을 표방해 나섰다. 북한은 “선군정 치는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 고 군대를 혁명의 기둥으로 내세워 사회주의 위업 전반을 밀고 나가는 령도방식”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혁명군대의 강화를 통 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적 지위를 보장하고 인민대중의 창조적인 역할을 최대한 높이는 정치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160 말하자면 선군정치는 군을 내세우고 군에 의거하며 군을 따라 배워 체제의 정치적 안정과 결속, 경제의 재건을 이룩하며 군사를 중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외 부위협으로부터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확보한다는 군사만능주의적 통치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선군정치는 오늘날 국방위원회 중심의 국가체제와 군부 중심의 측근정치, 군사 우선의 정책결정, 전 사회의 군사화 등의 형태로 북한사회에 완전히 정착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대처한 대 내적 통제와 결속, 핵무기 보유를 통한 체제안전보장과 외부지원 유도 는 물론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 통일문제에 이르기까지 선군정치가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없다.161 그러면서도 선군정치는 군부가 국가권
160 _ 김화·고봉, 21세기 태양 김정일장군 (평양: 평양출판사, 2000), pp. 225~226.
161 _ “선군으로 빛나는 민족의 영원한 전승절.” 우리민족끼리, 2008년 7월 28일.
Ⅰ
Ⅱ
Ⅲ
Ⅳ
Ⅴ
Ⅵ
력을 장악하는 군부통치방식이 아니라 당이 선군정치의 설계자·영도자 의 역할을 하면서 군부와 적절한 세력균형을 이루어나가는 방식으로 현실에 구현되고 있다.
김정일 시대에 선군정치가 권력 유지와 국정운영, 정책결정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방식으로, 기본적인 통치방식으로 등장하 게 된 배경은 물론 북한이 처한 대내외 환경변화와 관련된다. 다시 말하 여 1990년대 중반의 대내위기 상황에서 당이 보여준 무기력한 대처능 력과 군부를 장악하지 못할 경우 제2의 루마니아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는 위기의식, 그리고 동유럽 붕괴 및 한중수교, 핵문제 등으로 인한 국 제적 고립과 체제위협 증대 등은 자연히 군부 우대와 군사력 강화라는 군 의존방식의 통치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내외 환경의 변화와 함께 김정일 고유의 은둔통치 스타일과 개인적 성향도 선군정치가 김정일의 기본 정치방식으로 정착하게 된 주요 배경 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김정일은 공개적인 국가지도 자의 이미지보다는 막후 권력실세라는 이미지와 안보수호자로서의 이 미지 조성을 통해 절대 권력자로서의 카리스마와 권위를 확보하였다.
은둔통치를 통한 이러한 권력 장악방식은 김정일의 유일독재체제가 존 속되고 그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박과 이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이 지속되는 한 그 어떤 다른 형태의 통치방식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효과성을 가진다. 김정일이 은둔통치 방식을 포기하고 정상적인 국가지 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체제에 대한 대내외 위험요인이나 신변의 위협이 제거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설사 북미관계가 정상화되고 북한의 대내 경제여건이 완전히 호전될 때조차도 기대하기 어렵다.
더욱이 은둔통치는 이같은 객관적 요인과 함께 보다 중요하게는 공개 적인 활동을 기피하는 김정일 자신의 개인적 성격과 자질과도 관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