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漕弊의 구조: 浮收와 漕規

Dalam dokumen 법을 통해 본 동북아시아사 (Halaman 145-151)

結 語

2. 漕弊의 구조: 浮收와 漕規

漕規는 漕糧의 陋規를 말하는데, 太倉地方志는 이렇게 漕規를 설명하고 있다.

嘉慶·道光 年間에 주현이 浮收를 勒折하여, 開倉할 때, 紳衿이 告漕하는 일이 분분하 였다. 특히 교활한 자는 白頭라 하는데, 관리는 그 滋擾를 꺼려하여 啖吻厚賄하였는데 이를 漕規라 한다.1)

한편 道光24년(1844) 어사 陳岱霖의 상주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至若地方之刁生劣監 平時出入衙門, 包攬詞訟. 一遇收漕屆期, 州縣官廣張筵席, 邀請至 署. 分送漕規, 多者數百兩, 少者數十兩, 謂之漕口. 又有不受漕規, 但代各花戶包攬完納, 一 切幇費, 任其入己. 陽避食漕之名, 陰受漁利之實, 謂之情米.2)

이에 의하면 조량의 업무를 시작할 때 주현관이 자리를 마련하여, 평소 아문을 출입하 던 刁生劣監에게 漕口(漕規)를 분배하였는데, 漕規를 받지 않는 경우에는 包攬의 완납 을 대신하게 하여 음으로 실리를 차지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道光7년, 御史 蔣泰階는 새로이 생긴 漕規인 忙規에 대해 설명하면서 紳衿들이 각자의 서열에 따라 수십원에 서 일이백원의 銀을 배분받는 관례를 소개하는데 그 숫자는 1縣 당 백수십인, 銀價는 수천냥에 달한다고 보고하고 있다.3)

嘉慶4년(1799) 岳起奏의 <清查漕務積獘一摺>은 漕規를 둘러싼 官,紳,民의 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漕運이 시작되기 전에 紳衿은 동성의 납세자를 包攬하여 자신의 재산에 부입하여 편의를 도모하고, 또 이전 職官의 품급에 따라 漕規를 분배받

1) 光緖『太倉直隷州志』권6, 風俗. 李文治·江太新, 2008, 『淸代漕運』, 社會科學出版社,, p.237-238에서 인용.

2) 張仲禮, 2001, 中國紳士的收入, 上海社會科學源, p.61-62에서 인용.

3) 『陶澍全集』卷20, 撫蘇稿, <覆奏蘇省錢漕查禁幫費陋規摺子總督會稿>, p.31. 御史蔣泰階奏請, 嚴禁包漕劣衿添食忙規一摺, 據稱江蘇省漕務之弊由於浮收, 而不肖生監等藉此狹制分肥, 近來更甚於 前, 漕規之外又添忙規名目, 各州縣徵收錢糧時, 置立號籍, 每人應得若干, 按名照給, 南滙鎮洋一一 縣為尤甚, 竟有就職舉貢, 故紳弟姪視為成例, 首先瓜分, 自番銀一二百圓至二三十圓, 以人之等差, 為數之多寡, 一縣不下百數十人, 需銀三四千兩不等.

는 특혜를 누렸는데 여기에는 하층 신사인 擧監生員까지 가담하여 이익을 누렸다고 한다. 물론 岳起奏가 묘사하는 엄금되어야 할 包攬과 漕規의 관습에서 선량한 小民만 은 마음대로 浮收를 착취당하는 약자로 취급되어 있다. 지방관은 浮收勒折의 약점을 알고 있는 紳衿의 挾制가 두려워 이러한 包攬과 漕規라는 악습의 방조자로 그려져 있 다.4)

漕規의 배분에 가담한 紳衿의 수로 규모가 크고 밝혀진 액수도 확실한 것으로 유명 한 것이 嘉慶10년(1805) 吳江縣의 生監의 경우이다. 이것은 江蘇巡撫 陶澍가 조사한 것으로 吳景修 등 314명의 인원수가 적시되고 漕規의 액수도 수만냥에 달해 조정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嘉慶帝는 刁生劣監의 包漕와 鬧漕上控에 대해 명교를 파 괴하는 악습이라고 비난하는 한편, 처벌을 유예하면서 四民의 으뜸인 독서인으로서 자 성할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5)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인 道光6년(1826)에 이르러서도 江蘇 지방의 漕弊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道光帝의 상유에 의하면 浮收의 징수는 州 縣의 용도 조달 상 어쩔 수 없는 것인데, 衿棍은 이를 이용하여 관부를 협제하여 漕規 를 上控의 단서로 만든다는 것이다. 도광제의 고민은 불초한 지방관이 양민을 괴롭히 게 하지 못하는 한편 衿棍으로 하여금 관부를 把持하여 告漕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데 있는 것이었다.6)

사실 그러한 방안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조폐는 중국관료체제 내 부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조폐의 문제를 잘 설명해 주는 것으로 嘉慶5년(1800) 경 蔣攸銛(乾隆甲辰進士)의 漕弊論이 있다.

물가 앙등과 인부의 인건비 등 조운의 운송비용이 상승하여 州縣은 浮收를 취하지 않 을 수 없고, 州縣은 浮收 때문에 包戶의 挾制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조사한 바로는, 縉 紳의 米를 衿米라 하고, 擧人·貢生·生員·監生의 米를 科米라 하고, 興訟을 좋아하는 者의 米를 訟米라 하는데, 이 중 縉紳의 米는 많이 징수할 수 없을 뿐으로 그치지만, “其刁生 劣監好訟包攬之輩” 의 米는 많이 징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미

4) 仁宗睿皇帝實錄, 卷之五十二 嘉慶四年 九月 二十八日. 如每年開倉之先。即有本地紳衿。包攬同姓 花戶。附入己產。上倉交納。圖占便宜。或有以曾任職官品級等次。分別坐得漕規。即舉監生員之刁 劣者。亦於中取利。州縣等懼其挾制。不得不從。而於良善小民。則肆意浮收。無所顧忌。此當嚴行 飭禁者.

5) 仁宗睿皇帝實錄, 卷之一百四十四 嘉慶十年(1805) 五月 二十六日. “但該生監身列膠庠。不守臥碑 輒敢恃符尋釁。挾制官長。吵鬧漕倉。強索規費。此直無賴棍徒之所為豈復尚成士類朕聞各省劣衿往 往出入公門。干與非分。以收漕一節。持地方官之短長。而江蘇為尤甚。各該州縣、或平日與之交 結。遂其取求。慾壑既盈。即遇不肖官吏實有罔利營私等事。亦復袒庇不言。徒使鄉里小民暗遭朘削 設稍不遂意則遇事輒生枝節每屆開徵時。掗交醜米。藉端滋事。動即以浮收漕糧列名上控, 其實家無 儋石, 無非包攬交收視為利藪。此等惡習大壞名教。今吳江一縣。分得漕規生監、已有三百餘人。其 餘郡縣。可想而知. 朕培養士子至優且渥原望其束身自愛。鍵戶讀書。並當勸化閭里愚民。知所觀 法。方不媿四民之首。乃蕩檢踰閑。至於此極。尚靦然厠身士林乎。所有吳景修等三百十四名。朕即 概加以扑責。亦其自取。但欲養其廉恥。此次姑免責處。予以自新之路.”

6) 宣宗成皇帝實錄 卷之一百十一 道光六年 十二月 六日.

江蘇漕務。疲敝已久。閭閻每苦浮收。而各州縣用度浩繁。不能不藉資津貼。抗玩者即因此挾制。以 為控端。積習成風。互相詬病。必應力加整頓。務令兩得其平。既不使不肖官吏。婪索病民。亦不容 衿棍把持。藉端訐告。庶可官民相安。而刁風漸息.

색이 좋지 않더라도 감히 뭐라 할 수 없다. 무능한 州縣官은 허수로 징수하고 영수증을 발행하고 앉아서 漕規를 받아먹고 안일을 도모하여, 교활한 무리가 利藪로 간주하여 무 리지어 包攬하고 訐訟하기를 쉬지 않게 만들어, 州縣官은 刁衿訟棍에게 협제되어 그 보 상을 弱戶良民에게 받는다. 그리하여 安分한 擧人·貢生·生員·監生에게는 대략 2,3분을 더 가징하는데 가장 고통을 겪는 향촌의 선량한 小戶는 5,6분을 더 가징해도 감히 항거 하지 못한다. ...향촌의 愚民도 처음에는 참다가 剝削이 계속되자 점차 기교가 생겨 包 戶에게 뇌물을 주고 대신 납부를 청탁하게 된다. 스스로 왕래해서 조량을 납부하는 불 편함과, 여기에 5,6분의 가징을 합한 수와 (포람을 청탁한 비용과) 비교하면, 감소한 비 용이 더 많아 이득이니, 愚民이 어찌 기꺼이 포람을 부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근년에 包戶는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鄕戶는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刁民이 집단으로 서로 나 쁜 짓을 모방하고 양민도 나쁜 짓에 물들어가니, 吏治와 民風과 士習이 이 때문에 날이 갈수록 무너져 간다. 이렇게 漕弊가 서로 원인이 되어 만들어져서 누적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의 상황이다.7)

蔣攸銛의 지적은 당시 청조의 漕弊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官紳民이 서로 연쇄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구조적인 부패의 난국에 빠져 있다는 것 이다. 州縣은 경비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浮收를 취하지 않을 수 없고 包戶는 浮收 에 대해 州縣을 挾制하고 上控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먹이사슬 과도 같은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良民은 착취 에 익숙해지면서 包戶에게 交漕를 代交할 것을 賄託한다는 사실이다. “天高皇帝遠”이 라는 말이 있지만, 약자인 小戶는 자신들의 보호막으로서 包戶를 선택하여 5~6할의 높은 浮收보다는 적은 뇌물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반쯤 자발적인 包漕가 생겨나 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관방의 설명과는 달리 包戶의 挾制州縣이나 包攬詞訟이 반드시 包戶의 강제라고 볼 수만은 없으며 민이 스스로 선택한 자구책이라고 할 것으 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蔣攸銛의 조폐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漕糧의 수납에 있어서 신분적인 특권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른바 大戶와 小戶의 문 제가 그것이다. 앞서 본 漕規의 분배에서도 신분의 서열에 따라 분배의 다과가 결정되 었는데, 錢漕의 액외징수인 浮收에서 수취한 漕規의 분배나 징세에서 모두 신분의 서 열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 漕弊의 중심적인 문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 다.

蔣攸銛의 조폐론과 비슷한 지적을 江蘇巡撫 陶澍도 하고 있다. 道光6年의 상주에 의하면, 漕糧을 납부하는 大戶 중에는 生監층이 포함되는데 生監은 특히 刁生劣監으로 경멸적으로 불리면서 健訟하여 그가 납부하는 漕糧조차 訟米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

7) 勢不能不向州縣索費, 州縣既須貼費, 勢不能不向糧戶浮收, 州縣既有浮收, 勢不能不受包户挾制. 臣 訪聞縉紳之米謂之衿米, 舉貢生監之米謂之科米, 素好興訟之米謂之訟米, 此三項內縉紳之米, 僅止不 能多收, 其刁生劣監, 好訟包攬之輩, 非但不能多收, 卽升合不足,米色潮雜,亦不敢駁斥, 並有無能州縣 虛收給串坐吃漕規以圖買靜就安, 遂致狡黠之徒視為利藪,成羣包攬訐訟不休, 州縣受制於刁衿訟棍仍 取償於弱户良民, 其安分之舉貢生監所加多少不一, 大約總在加二三之, 間所最苦者良善鄉愚零星小 戶,雖收至加五六而不敢抗違, 畏暴欺良此贏彼絀, 是欲清漕政,轉為奸民牟利之藪而良民之受困益深矣, 且鄉僻愚民始則忍受,剝削繼亦漸生機械,伊等賄託包戶代交,較之自往交漕,加五六之數,所省實多, 愚民 何所樂而不爲,是以邇年包戶日多, 鄉戶日少, 不特刁民群相效尤, 即良民漸趨於莠, 吏治民風士習由此 日壞, 此漕獘之相因而成,積重無已之實在情形也, 蔣攸銛, 『學仕録』 卷11, <擬更定漕政章程疏>

Dalam dokumen 법을 통해 본 동북아시아사 (Halaman 145-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