結 語
6. 결 어
56) 四川省檔案館·四川大學歷史系編, 1996, 『淸代乾嘉道巴縣檔案選編』 下,p.235. “州縣等境內有 會匪捻匪掖匪聚集, 惡黨千百橫行而不敢拿, 魚網良懦而不知救”라고 하면서 州縣行政의 書吏蠹役에 의한 피폐함을 지적한 道光28년의 奏이다.
57) 所有現獲之首要各犯鍾人杰等、著遴派妥員。押解來京。其逆犯家屬。及在逃各要犯。務當設法摉 捕。毋令一名漏網。致留餘孼。再前奏詭稱術能封槍之僧人。現在曾否拏獲。如已伏誅。該逆僧是何 名姓。憑何確據。著該督確切查明。如尚漏網。仍當生捦解京。以免煽惑. 『淸宣宗實錄』 권366, 道光二十二年 正月 二十八日.
58) 「莆田人民公控蔣唐佑呈稿」, 民國間抄本, 福建省圖書館藏. 王日根·肖麗紅, 「<莆田人民公控蔣 唐佑呈稿>所見淸末生員與惡吏的鬪爭」, 『安徽史學』 2012年第1期. 참조.
본론에서 말한 주제인 漕弊는 요컨대 官의 浮收와 紳의 包漕로서, 道光28년(1848), 漕弊 侍讀學士 董瀛山(嘉慶庚辰年 進士)이 말한 “良懦者額外浮科, 刁健者包攬短絀”이 라고 하는 현상으로 요약될 것이다.59) 따져 보면 둘 다 폭력적 약탈 현상이다. 그러나 관의 액외징수인 浮收가 과세에 대한 납세자의 동의 없는 일방적인 약탈적 행위라고 한다면, 包漕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것은 民에 대해서 는 보호자적 역할을 하는 것이고 官에 대해서는 관의 불법을 단서로 挾制하여 漕規나 包漕의 특권을 받아내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民의 입장에서는 배고픈 늑대보다(官) 는 배부른 늑대(包漕衿棍)를 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60) 그러나 包漕衿棍의 보호를 택하지 못하는 愚民들도 있었다. 중국의 전제지배에서 민간의 소송은 無冤의 이념과 告狀不受理의 법제에 의해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송은 늘 생각보다 빈번한 편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른바 健訟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건송 현상 이 반드시 ‘소송사회’라고 불리는 ‘소송사회’에서 만연한 소송과 합치하는 지는 의문이 다. 중국사회에서 벌어지는 包攬은 개인의 자유로운 소송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사 실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包漕의 未遂에서 벌어지는 告漕도 소송이라기보다는 고발에 가깝기 때문이다. 告漕案과 관련해서 원고가 나타나지 않는 사례가 종종 보고되는 것 도 진정한 소송이라고 보기 어렵다. 包攬은 약자가 강자에게 詭寄함으로써 생기는 依 付관계인데 戴槃의 紳民不一律論이나 馮桂芬의 紳民一律論은 모두 중국사회의 강력한 중층적 위계관계를 말해준다. 漕弊의 두 축인 浮收와 包漕는 사실 지방의 통치자인 官 紳이 서로 묵계 하에 일어나는 민을 착취하는 불법적인 일이었지만, 서열상 하층에 있 던 “里甲의 구성원이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법적으로 규정된 납세 절차를 준수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61) 역시 이런 관계에서 ‘소송사회’
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적대적 쟁론을 바탕으로 하는 소송이 발생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이를 잘 증명하는 사실이 중국에서는 訟師가 정상적인 직업으로 인정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62) 訟師를 정상적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은 법제적 근거는 不干己事의 법이었다. 1901년 福建 省 莆田의 생원들이 지현을 고발하는 소송에서 전통적인 불간기사의 법에 이의를 제 기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59) 宣宗成皇帝實錄 卷之四百六十 道光二十八年(1848) 十月 十二日.
60) 吳思, 2013, 血酬定律, 四川人民出版社.
61) Hsiao Kung-ch’uan, 1960, Rural China: Imperial Control in the Nineteenth Century,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p.127. 이 점에서 송대 이래 청대까지 이른바 差役 에 있어서 부정이 있다면 糾論을 허용한 전제지배의 구조를 통해 소송사회론을 주장한 夫馬進의 주장(中國訴訟社会史槪論, 2011,夫馬進編『中國訴訟社會史の硏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도 설득 력이 부족할 것이다. 糾論과 소송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朴永哲, 2016.2.「송대 差役의 糾論과 소송사회」『中國史硏究』100輯. 참조.
62) 健訟과 중국소송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朴永哲, 2012, 「중국소송사회와 전제지배」『역사학 보』214집. 2013.6.「전제지배와 訟師의 향방―송대 르네상스 再考―」『東洋史學硏究』123輯.
(국문초록)
乾隆 중기부터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기 시작한 漕弊 문제는, 州縣官府에 의한 漕糧 의 액외징수인 浮收勒折와 地方鄕紳에 의한 包漕索規가 요인인데, 19세기 초반의 嘉 慶道光 연간에는 심각한 상황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두 개의 불법은 하나는 지방관에 의한 불법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 향신에 의한 불법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기원이 오래 된 것으로서 왕조 초기부터 시작된 것인데, 양자 모두 불법이면서 또한 같은 지배계층 의 행위로서 서로 이해관계가 공통되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嘉慶道光 연간에 와서는 官紳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른바 鬧漕, 抗糧, 告漕, 京控 등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 그것이다.
包漕와 告漕의 중심에는 이른바 ‘衿棍’이라고 불리는 하층 紳士층의 존재가 있다.
漕弊의 두 축인 浮收와 包漕는 사실 지방의 통치자인 官紳이 서로 묵계 하에 일어나 는 민을 착취하는 불법적인 일이었지만, 浮收가 과세에 대한 납세자의 동의 없는 일방 적인 약탈적 행위라고 한다면, 包漕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 다. 漕弊는 官紳民의 연쇄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민은 피지배층으로서 官紳 양 자로부터 약탈당하는 입장으로서, 서열상 하층에 있던 里甲의 구성원이 이들에 대항하 기 위해서 법적으로 규정된 납세 절차를 준수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거의 없었고, 包攬에 의지하거나, 유민이 되는 양자택일을 선택해야 했다. 京控의 성공률은 높지 않았던 것 같고, 京控을 통해서 민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은 京控의 제도 적 한계 때문에 매우 어려워 보인다.
衿棍의 ‘爲民請命’의 告漕抗糧은 包漕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이중적 양면성의 한 계를 보이고 있다. 요컨대 衿棍의 告漕抗糧이나 民의 京控은 기본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의 大小戶 관계를 토대로 하는 官紳民의 연쇄구조 속에서는 한계를 갖는 것이라고 하 지 않으면 안 된다. 包攬은 약자가 강자에게 詭寄함으로써 생기는 依付관계인데 戴槃 의 紳民不一律論이나 馮桂芬의 紳民一律論은 모두 중국사회의 강력한 중층적 위계관 계를 반영하는 개혁적 논의로서, 大小戶의 관계를 무시하고서는 실행하기 곤란한 일이 었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서 ‘소송사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적대적 쟁론을 바탕으 로 하는 소송이 발생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이를 잘 증명하는 사실이 중국에서는 訟師가 정상적인 직업으로 인정되는 일이 결코 일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急公堂(1821)과 같은 大戶에 寄生하지 않는 민의 자치적인 包攬의 등 장이나 訟師와 비슷하나 법적으로 구별되는 訟戶의 성립, 그리고 1901년 福建省 莆田 의 생원들이 지현을 고발하는 소송에서 訟師를 인정하지 않은 법제적 근거인 不干己 事의 법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새로운 법제적 변화로서 주목할 만하다.
(Abstract)
The causes of tax abuses rising as serious social problem from middle Qianlong era consist of the illegal tribute grain surtaxing by local magistrates and the other illegal tax farming by local gentry. Originally these two causes were in a complementary relation but by the change of the echo-social environment this relation began to break so that social unrests like tax suing including capital appeal or the refusal to pay tribute grain culminating rebellion has risen up in Jiaqing-Daoguang era.
Tax abuses in Qing dynasty is supposed to occur in the ring structure of Bureaucracy-Gentry-People. The people as the weakest ring in this structure could not but help depending on the gentry or going to the mountain, thus tax farming cannot be seen as a simple one-sided action for the people, while the capital appeal cannot be appreciated as a good way to resolve the problem of illegal surtaxing by the bureaucrats. The imbedded institutional defects in the system of capital appeal do not seem to make the rate of success in the capital appeal high.
The movement of the tax suing or the refusal to pay tribute grain by the lower gentry, which is superficially seen as movement for the cause of justice for the people, seems to have double-sidedness due to its position in the ring structure of Bureaucracy-Gentry-People. Because the ring structure of B-G-P is constructed on the base of Big Tax Household-Small Tax Household relation, the reformation of tax abuse with the theory of Gentry-People Equalizing by Feng Guifen could not have performed well without considering the gentry’s will. Likewise the legal act in the society of the ring structure of Bureaucracy-Gentry-People could not be considered as same as in the
‘litigious society’, which is proved by the fact that in China there never existed a lawyer as lawful before the modern era.
In this respect the rise of independent institution of tax farming(急公堂) for the people by their own in 1821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Litigant Household(訟戶) being different from the litigant master(訟師) and also the new interpretation by the protesting lower gentry of the strong law which has made the lawyers in China unlawful so many years are worthy of notice.
「淸代 ‘衿棍’의 包漕와 告漕京控」 討論文
金 暻 綠 (軍史編纂硏究所)
본 발표는 청대 衿棍의 包漕, 告漕京控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단순 사실의 전달이 아닌 漕弊의 구조와 포조의 이중성, 금곤의 고조경공에 대한 심도있는 분석을 통해 健訟, 訟師의 근대성을 정리한 글이다. 이 분야의 깊은 연구를 통해 많은 연구성 과를 도출한 발표자의 발표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토론을 맡은 입장에서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토론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다.
청조가 쇠퇴의 징후를 보였던 19세기 전반기는 3대 폐정의 하나인 조운의 폐단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조운의 浮收와 勒折은 乾隆 중엽에 시작되 어 嘉慶연간에 심해졌고, 道光연간에 극에 달했다는 지적으로 알 수 있다. 폐단은 자 연 鬧漕, 鬧倉, 抗糧과 같은 事端으로 이어져 變亂을 예고하였다.
1. 머리말에서 청대 漕運, 包漕, 告漕, 京控 등에 관련한 연구사정리가 필요하다는 생 각이 든다. 중국학계는 물론이고 한국학계에서도 관련 연구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구사정리가 생략됨으로써 발표자의 발표가 가지는 학술적 의미와 성과를 간과하게 하지 않는가 싶다. 이에 간략하게나마 기존 연구의 경향과 본 발표의 의미를 짚어주기 바란다.
2. 법제적인 측면에서 包漕, 告漕, 京控의 과정과 실제 창고에 수납될 때까지 일반 민 호에 대한 勒索, 公戶·紳戶·訟戶·民戶의 차등수납(折納), 州縣官에 의한 索取구조를 설 명해 주면 보다 독자의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특히, 官·紳·民으로 이어 지는 각 객체들이 가지는 이익과 손해를 구체적인 수량으로 설명해 주길 바란다.
3. 告漕의 양면성에 대한 개념문제이다. 발표자가 주장하는 고조의 양면성이 민을 위 한다는 명분과 달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가 서로 존재한다는 양면성인지?
고조에 대해 중앙정부입장에서 생감층이 주도하여 수백건의 고조안을 제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식과 함께 고조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인식이 공존하기 때문에 양면성이라 하는 것인지? 개념적인 이해를 제고하기 위한 추가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