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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棍의 告漕京控

Dalam dokumen 법을 통해 본 동북아시아사 (Halaman 154-163)

結 語

4. 衿棍의 告漕京控

부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를 差役이 包攬으로 처벌하려고 한다는 점을 문제 로 지적하고 있다. 任啟運이 생각하는 包攬의 법이란 신금이 良民을 억압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고, 이러한 양민 간의 相周相恤은 包攬이 아니라는 것 이다.27) 이러한 민간의 상호부조 정신이 발휘되어 나타난 것으로 청말의 急公堂이 주 목된다.

급공당은 민의 자구책으로서 包攬에서 더 나아간 것이다. 즉 大戶에 의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의 조세납부를 위한 기구를 자치적으로 강구한 새로운 시도이다. 민이 포람에 의부하지 않고 스스로 자치적인 조세기구를 설치하여 납부의 편의를 도모한 것인데, 急公堂을 별도로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의 무차별한 탄압을 받고 무산되고 말았다.28) 이것은 앞의 민간의 상휼정신을 스스로 실천해 보인 것으로서 주 목되는 것이지만 기존의 包攬의 질서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이는 官紳의 공동 공격 앞 에 무너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은 20세기말의 안휘성에서 벌어진 農村上訪과 관 련해서 일개 마을이 집단 총격을 당한 사건을 방불케 하는 점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돌이켜보게 한다.29)

청대 가경·도광 연간에 빈발했던 告漕案은 급기야는 道光연간 직업적인 訟師들이 이를 청부하여 京控할 정도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告漕案은 조운의 행로에 관련된 각 성마다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적인 것인데, 특히 강소성의 경우는 그 액수가 전국의 수위를 점하는 것으로 청조의 재정에서 중대한 지위를 차지하는 만 큼,31) 강소성에서 발생한 京控案은 그 양과 질에 있어서도 타성에 비해서 심각함을 보이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 가경제와 도광제 등이 사안의 해결을 명령하는 諭旨를 발포하는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告漕案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으로 순무와 학정의 쟁론이 있다. 官의 입장을 대변 하는 江蘇巡撫 陶澍가 衿棍으로 비난받는 生員의 包漕를 비난하면서 이를 엄칙하는 반면에 生員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江蘇學政 辛從益의 告漕를 위한 항 변이 있다. 묵인되어 온 包漕의 사회적 특권에 대해서 중앙정부를 대변한 江蘇巡撫 陶 澍가 강력한 엄금의 정책을 펼치자, 이에 대항하여 告漕案을 빈발하여 중앙정부를 공 격하였다는 것이다.32)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陶澍가 包漕하는 생원에 대해서 그 불법성을 들어 비난하자, 學政 辛從益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면서 역시 적법성을 들어서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시 辛從益이 제기한 書役의 生員 구타 및 살인안 건의 공격에 대해 陶澍는 불법한 일이 없다고 변명하면서 州縣官 측의 불법 浮收와 生員 측의 불법 包漕를 모두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陶澍와 辛從益의 변론은 주현관과 생원층의 공방을 보는 듯한데, 그들의 토대가 모 두 그들이 지배의 토대를 두고 있는 약소자인 齊民에게 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告漕 案이 빈발하기 전에는 주현관은 浮收(액외 징수)를 통해 들어오는 陋規를 통해 수입을 늘였는데, 고조안이 빈발하게 된 배경에는 米價 인하, 하운에서 해운으로 조운로의 변 경으로 인한 浮收가 증가되면서 이를 감당하지 못하게 약소자인 齊民이 大戶에게 詭 寄依付하는 일이 빈발하게 된 것이다. 齊民으로서는 멀고 힘든 불법보다 손쉬운 불법 을 택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漕政과 관련해 중앙정부의 미비한 정책이 浮收 증가를 가져오면서 齊民의 움직임이 包攬을 더욱 가중하고 포람은 더 많은 조규를 요구하고 조규는 다시 더 많은 부수를 강제하고 민은 다시 포람으로 보호를 요청하고 그렇지 못한 민은 流民化한다.

陶澍가 조사한 葉鏞의 포람사송안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陶澍 자신의 조사도 그렇지만, 도광제도 일부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道光8년의 어

30) 溯查數年以來無歲不有告漕之案, 自百起至二三百起不等, 惟今歲漕糧改由海運提用津貼無多無可阻 撓挾持是以控案較少, 然亦不下數十起, 此等積習相沿, 旣藉控爲抗, 以遂其包攬之私, 尤仗訟分肥以 長其白規之數, 若不將此項衿棍陋規痛行裁革, 糧户大小一例兌收, 則辦漕之經費日絀, 小民之浮削日 增, 害伊何底, 惟是積獘已深入繁勢衆, 一經整頓羣然觖望, 大則紏衆閙漕, 小則造謡興謗, 而京控之 案必且紛紛更多. 陶澍全集1, 2009, 附陳漕務情形嚴禁包漕陋規摺片, p.418. 岳麓書社.

31) 道光9년의 전국 조운 총액이 正米와 耗米 합계 4,522,283石인데 江蘇省의 蘇松道만 하더라도 1,579,462石으로 전국조운총액의 35%를 점하고 있다. 李文治·江太新, 2008, 『淸代漕運』, 社 會科學出版社, 前言.

32) 趙思淵,2011.8, 「從“包漕”到“告漕”—道光初年“漕弊”整頓進程中蘇松士紳力量的演化」, 『淸史 硏究』3.

떤 상주에 의하면 강소성의 告漕案은 包漕衿棍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 장이 있다. 민이 조폐의 불만으로 인해 鉅案을 양성하려고 하면, 衿監은 본래 지방관 의 도움을 받아 包攬分肥하던 특혜층으로서, 지방관은 평소 漕規를 급여하던 관계였기 때문에, 衿監의 도움을 받아 분쟁의 조정과 해소를 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33) 이는 辛從益이 陶澍를 반박하여 생감의 입장을 논한, 控漕人이 반드시 모두 包漕人은 아니 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陶澍는 訟師가 곧 書役이라고 간파하면서 송사의 근원을 숙청하기 위해서는 書役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점에서 본 다면 告漕案의 처리는 제민지배에 대한 하나의 파워게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告漕의 양면성

道光22년(1842) 湖北崇陽縣의 鍾人杰이나 道光25년(1845)湖南耒陽縣의 楊大鵬과 같이 부유한 生員秀才이면서도 抗糧民亂의 領袖가 되어 파가멸신한 결과에 대해서 어 리석다고 비난하면서도 냉정하게 官府가 변란의 원인을 제공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하고 있다.34) 이것은 道光황제가 葉鏞의 京控에 대해서 한편으로 일리를 인정한 것 과 상통하는 것이다.

湖北巡撫 胡林翼의 호북지방의 告漕鬧漕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衿棍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民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던 것 같은데, 胡林翼은 이것을 “名雖爲民請 命 實則爲己求財也”라고 실리를 좇는 이기적 행위라고 비판한다.35) 이 문제와 관련해 서 嘉慶11년(1806) 御史 邱勳의 상주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御史 邱勳의 상주에 의 하면 지방관이 漕糧을 수납할 때 浮收를 징수하는데 이러한 불법행위를 劣衿이 내부 에서 알고 挾制할 것을 우려해서 먼저 紳士 중의 平素好事者36)를 採訪하여 미리 뇌물 을 주어 부탁하고(漕規), 약간의 包漕를 허락한다는 것이다.37) 浮收와 包漕는 원래 금

33) 宣宗成皇帝實錄 卷之一百四十六 道光八年(1828) 十一月 十三日.

諭軍機大臣等本日有人陳奏、江蘇蘇松兩府屬徵收漕糧。各倉俱有官親及幕友長隨。收漕而外。恣為 佚樂。或食鴉片煙。狎優聚賭。群飲酣歌。無所不至。其世家大族之糧。無不儘先收兌。而貧戶完 納。則故意駮斥。屢次不收。必待額數已敷。概令折價。每石折銀四五兩不等。就蘇松現在市價而 論。每米一石。約值制錢二千。每銀一兩。約易制錢一千三百。今每石折銀四五兩。是直以三石之米 價。完一石之漕糧。畸零小戶為累不堪。民情洶洶。咸謂田土所入。僅足納糧。有以田交官者。幾至 釀成鉅案。該處衿監。向多包攬分肥。州縣平日給予漕規。藉以調停消弭。積弊最深。督撫大吏但見 州縣辦漕無誤。即以為民情安帖。不知此類大蠹。把持壅蔽。實使民隱不得上伸。及至激成事端。勢 必科民以罪。本地控告漕弊之案。不出包漕衿監之手。為之彌縫。及經上控。往往百無一直等語.

34) 黃鈞宰, 『金壺七墨』(同治12年刻本), 권4, 漕變.

35) 刁紳劣監包攬完納, 其零取於小戶者重, 其整交於官倉者微, 民謂之曰蝗蟲, 更有挾州縣浮勒之短, 分州縣浮勒之肥, 一有不遂, 相率告漕, 甚或聚衆鬨倉, 名雖爲民請命實則為己求財也. 官謂之蝗蟲費 種種蠹弊盈千累百無不於州縣取之. 『胡林翼奏議』 권23, <革除漕務積弊並減定漕章密疏>(咸豐7 년)十月十四日.

36) ‘平素好事者’란 이를 단서로 사송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비슷한 같은 표현으로 素好興訟者란 말이 있다. 訟戶도 같은 말로 볼 수 있다.

37) 外省地方官於收漕時、例外浮加、慮劣衿從中挾制、先採訪紳士中平素好事者、豫行賄囑、許其包 漕若干、其餘鄉曲貧民、因得任意浮收、重受其累. 仁宗睿皇帝實錄 卷之一百五十八 嘉慶十一年

지된 불법행위이지만 지방사회를 구성하는 官·紳·民 중에서 지배자인 官과 紳이 默契 하여 民을 약탈하는 것이 당시 漕弊의 구조인 것이다. 告漕의 발생은 이러한 陋規의 연쇄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불만 생감층 또는 민의를 대변하는 訟師에게서 표출된다.

조금이라도 漕規가 부족하면 난동을 부린다는 것은 이러한 뜻으로 해석된다. 告漕 또 는 京控의 생감의 출신을 찾아보면 革生이나 革吏인 경우가 많다. 즉 그들은 전직 생 원이나 서리 출신으로서 현직 생원이나 서리들에게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유 명한 鍾九鬧漕의 鍾人杰과 蔡紹勛의 관계도 그러하다. 鍾九鬧漕는 刀筆詞訟을 직업으 로 하는 生員들, 즉 訟師들의 조직적인 집단 무장반란으로 유명한 告漕이자 鬧漕이지 만, 한편으로는 訟師 대 訟師의 싸움이기도 했다. 鍾九鬧漕에 대한 평가는 ‘爲民請命’

이라는 민중의 뜻을 대변한 정의로운 대중운동이라는 평가와 이와 반대로 “명분상으 로는 爲民請命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냉혹한 평 가로 갈려진다. 민중운동의 평가에도 ‘只反貪官, 不反皇帝’라는 민중의 투항주의적 한 계를 비판하는 극단적인 관점도 있다. 鍾九鬧漕의 구전 서사시에는 민중의 열망을 담 은 편향된 시각도 있어서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객관적 사실과 어긋나는 점도 있어서 사료로서 이용하는 데는 주의를 요한다.38)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들이 모두 衙門 출신이거나 아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鍾九鬧漕의 주인공인 鍾人杰을 비롯한 그 주모자들은 그 아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그 적 대자였던 蔡紹勛도 아문의 요청으로 鍾人杰을 고소하는 소장을 작성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아문과 깊은 관련을 맺은 것은 평소 이들이 아문과의 묵계 하에 包漕包訟하면 서 이익을 나누고 있는 이른바 紳衿, 衿棍, 劣衿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러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鍾九鬧漕 사건 5년 후 강서성에서 일어난 鬧考도 鍾九鬧漕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 다.

道光27(1847), 包漕와 鬧考. 聚議罷考가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江西貴溪縣文童考試 에서 褫革된 貢生이 현에서 包漕의 금지령을 내리자 불만을 품고 집단행동으로 과장 을 습격한 것으로 밝혀졌지만,39)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번의 고시장 난동사건이 漕倉난동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물으면서 종종 관부를 협제하는 일이 현의 남 형으로 대중을 격분시켜서 사단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生童들이 包漕의 지반을 만들려 고 한 일인지를 묻는 대목이다.40) 道光26(1846), 江蘇昭文縣匪徒金得順 鬧漕案이 包 漕의 未遂에서 벌어진 불만이 촉발한 집단행동이라면 이것도 그와 유사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상주에서는 본건은 褫革貢生이 포조금지령에 대한 불만에서 벌어진 사건

(1806) 三月 二十六日.

38) 鍾九鬧漕에 관해서는 역사인류학적 관점에서 쓴 張小也, 「史料·方法·理论历史人类学视角下的

“钟九闹漕」, 2004.11, 河北學刊, 24-6. 참조.

39) 宣宗成皇帝實錄 卷之四百四十七 道光二十七年(1847) 九月 十一日. 已革貢生倪步蟾、因該縣禁 衿棍包漕。頂撞被責詳革。糾眾罷考.

40) 宣宗成皇帝實錄 卷之四百四十七 道光二十七年(1847) 九月 十一日. 此次鬧考。何以又牽涉鬧漕 之事。種種藉端挾制。或因該署縣濫刑激眾。釀成事端。抑生童等豫為包漕地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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