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Ⅲ. 국제인권보호와 안보리의 역할
실제, 추세 및 평가
안보리의 역할이 국제평화 및 안전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주로 국제 분쟁에서 이루어지는 점에 비추어, 특히 인권보호를 위한 안보리의 역 할을 파악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고찰이 필요하다. 첫째, 주요한 관련 분쟁에 대한 안보리의 관여를 살펴보고, 그 특징과 추세를 분석하는 것, 둘째, 또한 국제사회의 인식과 규범, 그리고 추세의 변화 속에서 안 보리의 역할 변화의 내용과 그 함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 고 이와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안보리의 역할의 제약과 가능성을 평가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9_조사위원회는 형사법적 처벌을 대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또한 최종적으로 법적 책임자를 규명하거나 책임자를 처벌할 수 없으며, 사법기관과 같은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인권보호와 신장에 대한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는바, 가령, 인권침 해사례에 대한 공식적, 권위 있는 기록으로서 대중교육과 향후 인권침해 억지, 인권침해 희생자 및 가족들의 고통에 대한 인정을 통한 심리적 치유 및 지원, 도덕적 제재를 통한 정의의 구축 및 다른 제재를 위한 기반제공, 후임정부를 위한 인권의제 제시 및 법치주의 기반제공, 그리고 단순한 법적 권고를 넘어 포괄적인 개선권고를 할 수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Steven R. Ratner, Jason S. Abrams and James Bischoff, Accountability for Human Rights Atrocities in International Law, 2n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p. 238~239.
1. 주요 분쟁 및 관련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역할
가. 안보리의 적극적 관여(개입)
유엔 안보리는 살펴본 바와 같이 헌장상의 임무의 제약과 창설 초기 시기의 동서냉전의 갈등 속에서 전반적으로 인권문제에 개입하는 데 미온적이었다. 다만 창설 초기 시절부터 부분적으로 국제분쟁사태에서 인권문제를 다룬 경우가 있다. 가령
, 1956년 헝가리 사태(결의문 120호), 1961년 콩고 사태(결의문 161호), 1965년 도미니카 공화국 사태(결의문
203호)
등이 그것이다. 1960년대 및 1970년대에 걸쳐 아프리카의 탈식민주의 관련 유엔의 총회 등의 결의문들은 세계인권선언 및 다른 국제 인권규범을 인용하였다.10 또한 예외적으로 분쟁과 관계없이 평화 시에 발생하는 인권유린 사태에도 개입한 경우도 있다. 가령 1960년대 로데 지아의 식민지 독립운동(liberation movement)(SWAPO)이나(1968년, 안보리결의문
232호),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에서의 혹독 한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을 평화에 대한 위협(1977년, 안보리 결 의문 418호)으로 간주하고,
경제재재를 가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안보 리가 유엔제재를 부과하고 그 이행을 강제함으로써, 결국 그러한 야만 적 제도가 철폐되는 데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탈냉전기에 접어들어 발생한 국제분쟁에서 보여준 안보리의 태도는 새로운 추세를 향한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권유린 및 인도적 사태가 야기된 국제분쟁에서 안보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 하고 국제평화를 위한 역할에서 새로운 선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대 표적인 주요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10_Joanna Weschler, “Human Rights,” The UN Security Council: From the Cold War to the 21st Century, David M. Malone (ed.) (Boulder, Colorado: Lynne Rienner, 2004), pp. 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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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라크 전쟁(1991)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비롯된 제1차 걸프 전쟁이 발
발하자, 안보리는 이라크가 평화를 파기하였다고 확인하고, 이에 대하 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take all necessary means) 승인 함으로써(1991년, 결의문 678호) 결국 전면적인 군사력을 사용하는 집 단안보를 발동하였다. 이 결의문은 이라크의 행위가 걸프지역에서 국 제평화 및 안전을 위협하는 대규모의 난민을 발생시켰다는 우려를 명 백히 하였다.11안보리는 걸프전쟁의 종료와 함께 채택된 결의문 688호(1991년 4월) 에서 많은 이라크 지역에서 이라크 민간주민에 대한 인권억압의 결과 가 “국제평화 및 안보를 위협한다”고 규탄하였다. 나아가서, 안보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압제로부터 쿠르드족(the Kurds)을 보호할 목적 으로 전쟁 종료와 함께 안전피난처(safe heavens) 설치를 결의하였다.
비록 이 결의문이 민간인의 인권유린을 중지시키기 위한 추가적인 조 치는 취하지는 않았지만, 명시적으로 인권억압이 국제평화 및 안전에 대한 위협을 구성한다고 선언한 유엔 최초의 사례인 점에서 의미가 크다.12 한 국가 내에서의 인도적 재난과 국제안보와의 상호관계 인정 은 인권문제에 대한 새로운 선례를 만들었다고 여겨진다(대규모 군사 작전).13
11_안보리의 결의는 주로 미국에 의해 주도되었고, 유엔의 승인하에 미국이 이끄는 다국적 군은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주요국가, 그리고 아랍다국적군은 사담 후세인에 반대하는 아랍국가 군으로 이루어졌다.
12_Joanna Weschler, “Human Rights,” p. 57.
13_탈냉전 후 인권 및 인도적 위기에 관련한 주요 분쟁에 관한 분석은 박흥순, “인도적 위기와 보호책임: 주요사례와 함의,” 국제기구저널, 제5집 제1호 (한국유엔체제학회, 2010), pp. 5~34 참조.
(2) 소말리아 내전(1992)
1991년 이래 소말리아 내전사태로 인하여 무정부상태가 지속되고
전체인구 6백만 명 중 약 150만 명이 급박한 아사사태에 직면하였으며35만 명 이상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PKO 파병 등 안보리의대응은 미온적이었으나, 사태가 악화되자 안보리는 이를 인도적 재난 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개입을 결정하였다. 즉, “소말리아의 분쟁에서 야기된 인권적 비극의 정도가, 인도적 지원의 분배에 관한 장애에 의해 악화됨으로서, 국제평화 및 안보에 대한 위협을 구성한다”고 명시하 였다(결의문
794호).
그리고 헌장 제7장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여 소말 리아에서의 “평화, 안정 및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무력사용을 승인하였다. 즉,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소말리아에서의 인도적 구호 활동을 위한 안정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 도록 하였다. 유엔 안보리의 개입은 1993년까지 내전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인권유린 사태에 대응하여, 고전적인PKO
활동을 넘어, 분쟁당사자의 동의 없는 개입과 중무장 등의 원칙을 포함하는, ‘평화강 제’를 적용한 중요한 활동이 되었다.(3) 동티모르 사태(1999)
동티모르가 19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 투표를 가결한 후, 인 도네시아 정부군 지원을 받는 민병대가 동티모르인에 대한 살해 및 재 산 파괴행위를 감행하였다. 동티모르는 1975년부터 25년 이상 진행된 독립운동으로 이미
25만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안보리는 이러한 만행을 인도적 위기로 규정하고, 호주가 주도하는 다국적군으로서 국제군(INTERFET)을 긴급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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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민병대와 인도네시아 군을 제압하여 분쟁종 식이 이루어지고, 그 후 INTERFET은 UN PKO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과도행정기구(UNTAET)가 설치, 운영되어 2005년 이후 독립국가로 정착하는 데 기여하였다. 2000년에는 인권탄압에 대한 책임자처벌을 위하여 UNTAET 산하에 동티모르 특별재판소가 설치되고, 집단학살, 반인도범죄, 살인, 강간 등에 대한 재판이 착수되었다. 2005년에는 유엔전문가 그룹이 동티모르 화해우호위원회(Truth & Friendship
Commission)의 활동을 지원하여 왔다.
동티모르는 유엔이 국제분쟁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인권유린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로 여겨진다.
(4) 엘살바도르 및 캄보디아
인권문제를 군사적 개입이 아닌 PKO 활동의 임무로서 다룬 경우는
1990년대 초기 엘살바도르의 사태이다.
즉, 안보리는 엘살바도르 내전종식을 위한 포괄적 평화방안으로서 유엔옵서버단(ONUSAL)의 임부 를 부여한바, 결의문
663호(1990년)는 인권상황의 적극적 감시,
구체 적인 인권침해사례조사, 인권위반을 해소하기 위한 권고안 마련 등을 포함하였다. 분쟁초기에 적절한PKO임무 배치와 역할은 최종평화협
정을 이끌어내고, 평화를 회복하는 데에 있어 필요한 상호신뢰를 구축 하는 데 기여하였다. 성공적인 ONUSAL의 인권사태관련 임무는 오늘 날에도 관련활동의 모델로서 여겨질 정도이다.14캄보디아의 경우, 1992년 유엔의 포괄적 평화협정으로 오랜 내전이 종식되고, 그 결과 유엔과도행정기구(UNTAC)의 설치와 함께 인권관
14_Joanna Weschler, “Human Rights,” p. 56.
련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UNTAC은 주로 선거 실시 및 감시에
초점을 맞추었고, 인권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그 후 설치된 캄보디아 ‘특별법정’은 구 크메르정권의 학살 책임자들을 기 소하고 그들을 단죄하기 위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그 밖에도 유엔 안보리는 앙골라, 라이베리아, 그루지아 등에서의 PKO활동에서 인권 문제를 그 임무의 하나로 부여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안보리가 점차 인권문제를 보다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로 다루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5) 리비아(2011)
2010년 12월부터 튀니지를 시발로 하는 아랍의 민주화 바람 속에서,
리비아에서도 카다피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카다피 정권 은 시위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발포를 하는 등 진압에 나서면서 반 군과의 내전으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2011년 3월 유엔 안보리는 결 의안 1973호를 채택하여 리비아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제재를 가하였다.리비아 영공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포함하여“민간인 보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강구”(to take all necessary measures)하 도록 승인하였다. 이 결의안을 바탕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서 방 강대국들은 NATO를 주축으로 공중폭격 등 카다피 정부군에 대하 여 전면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카다피 정권은 8개월여 만에 붕괴되었다.15 안보리는 군사적 개입뿐만 아니라, 카다피 국가원 수에 대한 ICC 회부 등과 체포명령 등의 결과에 이바지함으로써 국제15_박흥순, “보호책임(RtoP)의 이론적 검토: 안보리 결의 1973호를 중심으로” (한국정치 학회 국방안보학술회의 발표문, 20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