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남북통합 정부의 각 부처에 여성담당관실이 설치되어 남북한 주민 모두가 양성평등한 역할을 수행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업무가 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앙정부 이외에도 지방정부에 여성정책국(여성국)과 과·계를 두어 중앙 정부와 연계되어 업무가 실행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남북한 여성간의 상호 이해와 현실에 맞는 교류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여성이해교육 실시 등 여성의 삶에 기초를 둔 교류협력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교육프로그램의 개발 을 통해 남한 전문가들의 북한지역 방문을 통한 교육실시를 확대하고 이를 위한 사전 교육을 강화한다. 또한 남한지역에서의 북한여성지도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통해 북한지역에서의 남한이해교육이 함께 실시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여성의 생활문화 속에서 활성화될 수 있는 여성정책이 이루어져 통일을 한층 앞 당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것이다.
동서독간에 분야별로 집중적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됨으로서 동독이 변화 및 개방을 맞이하는 1989년11월부터였는데 여성 교류도 이 시기부터 여성단체, 직업단체, 연구단체, 노동조합 등을 통하여 집 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서독과 동독의 민간여성교류는 3단계 (통일이전-통일
과정-통일이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지만 통일이전단계인 준비과정은 제한
적이었고 집중적인 시기는 80년대 후반인 86년에서 87년으로서 여성교류는
1989년 11월을 시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활동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1989년 11월 이전 여성교류는 평화 및 환경문제를 주제로 하여 주로 서독의
교회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동독을 지원하는 교류활동이 주축이었으며 그 외에 정보 및 경험을 나눌 수 있는 학술적 교류, 그리고 1972년 「동서독 기본조 약」체결 이후 활발한 인적교류로 인한 동서독 여성들의 방문 등의 형태로 이
루어졌다. 1989년 11월 이후에는 동독의 개혁을 지원하고 통일 후의 여성문
제 해결과 여성발전을 위한 동서독 여성의 조화 형성을 위한 교류, 그리고 자 발적인 여성단체의 조직을 지원하는 교류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평화를 만 드는 여성회, 1999: 248~251).
1. 동서독의 교류협력 현황 가. 1989년 11월 이전의 여성교류
1989년 11월 이전의 동서독간 여성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여성교류에 참
여한 동독의 주요 여성단체는 정부차원의 「독일민주여성단체(DFD)」다. 그 당시 동베를린과 동독에 교회 내 여성단체, 평화를 위한 여성단체, 변화·대화 를 위한 여성단체가 있었지만(한독워크숍)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단 체는 「독일민주여성단체(DFD)」였다. 서독여성단체로는 「독일여성원(DF)」,
「세계어머니조직(WOMAN)」, 「사회봉사카톨릭여성(SKF)」가 대표적이었으 며 교회여성단체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사회봉사카톨릭여성(SKF)」은 통일 이전 40년 동안 동독을 지원해왔다. 「카톨릭독일여성연합(KDFB)」은 1961 년부터 제한적이기는 하나 동베를린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교류나 단체 방문 을 해왔고 동독에 소포 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독일카톨릭여
성단체(KFD)」는 청소년 활동과 관련하여 동독의 교회단체와 정기적으로 만 나고 교류를 해왔다. 또한 「독일개신교여성단체(DEF)」가 1963년 이후 동베 를린을 매년 방문하였고, 약 60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독일에서의 「개 신교여성부조(EFHID)」는 개인적 차원에서 10년에 한번씩 교류를 이루어 나 갔다.
학술적인 교류면에서는 서독의 「여성과 사회연구소(IFG)」가 1986년 초부 터 동독의 「비센사프텐학술원」의 「사회학 및 사회정책연구소」의 여성연구반 과 자료를 교환하면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여성국제학술회의를 통하여 동 독과 접촉을 가졌다. 또한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체결 이후 활발한 인적 교류가4) 이루어졌는데, 동독여성의 경우 연금수령자인 60세 이상의 여자들 은 (남자들의 경우는 65세 이상) 서독과 서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었다.
나. 1989년 11월 이후의 여성교류
1989년 호네커가 퇴진하고 모드로 정권이 들어선 이후 동서독간 통일논의 가 보다 진전되면서 여성교류는 활성화되었다. 개인적인 인적교류와 더불어 우선 서독의 여성단체인 「독일여성원(DF)」은 동독의 개방에 따라 동독여성 단체와 새로운 공동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상호이해를 위해 1990년 4월
“장벽은 허물었는데 이제 무엇을?”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여 동서독
사회정책을 비교하면서 제1차 국가조약에서 여성정책이 고려되지 못한 점을 비판하였다. 「독일여성원(DF)」은 다각도로 동독여성들과의 교류를 추진하고 상호이해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였다.
여성직업단체로는 「독일여성법조인단체(DJB)」, 「독일여의사단체 (DAB)」,
「독일여성엔지니어단체(DIB)」 등이 직능별로 동독의 여성단체 파트너와의 인적교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노동조합여성단체로 180만명의 여성회원을 가
4) 1971년 베를린 협정의 체결로 동서독간의 왕복교통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은 동서독정부가 직접 협상하게 되어 동독여행이 한결 자유로와 졌다. 분단이후 동서독 주민간의 왕래는 동독측의 잦은 제한조치로 인해 어렵기는 했어도 항상 그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1953년 여권제도 폐지로 방문여행이 보다 수월해 졌었다)
지고 있는 「독일노동조합연합(DGB)」은 여성직업단체들이 실제 통일이후 여 성들이 해야할 과제나 개선방향에 대해서는 실질적 논의가 없었던 것에 반해 여성국을 중심으로 전문가회의를 통해 서로의 문제점, 정보교환, 지원 방안을 논의함으로써 연금법 등 통일입법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약 20만명의 여성 회원을 가지고 있는 「독일사무직노조(DAG)」도 여성국을 중심으로 여성문제 를 논의하였고 특히 “직장 및 사회영역에 있어서의 여성평등정책 및 가정과 직업의 조화를 위한 미래지향적 여성정책”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외의 여성교류를 이룬 조직으로「여성고용자연합(VWA)」이 있으며, 「독일공
무원단체(DBB)」의 연방여성대표들은 여성실업, 탁아소 폐쇄 등과 관련하여
1991년 중반기까지 탁아소 재정지원을 규정한 통일협정의 기간을 연기할 것 을 요구하였다. 「독일여성문제단체(DFK)」는 “문화계에서 여성활동의 활성화 와 여성교육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여러 분 야의 여성교류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989년 이후 여성단체나 개인적인 차원의 인적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갔던 반면 베를린 장벽 붕괴 이 후 급진전된 제도적 통일과정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 으로써 여성이슈를 반영할 수 있는 활동의 한계를 가져왔다. 이는 통일이 되 는 시점에서 경제적 문제와 통일찬반문제가 우선적으로 다루어짐으로써 여성 문제는 중요이슈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 예로 구동독 여성단체들이 연합 하여 형성된 「독일여성연합(UFV)」의 역할과 활동의 저조를 들 수 있다(한독 워크숍).
다. 동서·독 여성교류협력의 특징
동서독 여성교류협력의 특징은 양 독간의 교류가 구동독 여성들로 하여금 동독내에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역할수행에 기여함으로써 여성교류의 사회통 합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동독에서 여성단체는 정부차원의「독 일민주여성단체(DFD)」가 중심이었는데 1970년대 말 1980년대에는 평화나 환경운동을 주제로 생겨난 비공식적인 여성단체들은 구서독의 여성단체나 국 제여성단체와 연관을 맺었고 교회와 도서관은 의사교환을 위한 중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한독 워크숍). 평화나 환경문제 외에 비공식적이지만 정치적
문제 및 가정의 사회화, 교과서에서의 성역할, 교회와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 위, 여성에 대한 폭력 등 사회문제를 주제로 한 많은 토론은 동독여성들의 의 식화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과정에서 서독단체들의 민주화 및 사회체제 개혁을 위한 동독시민들의 의식 및 조직화교육은 「노이에스 포럼」이라는 단 체에서 여성들의 의식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동서독여성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통일과정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 고 통일직전에 급진전된 제도적 통일과정에서 이들의 소외는 동서독 여성운 동의 특성과 경험 그리고 정치문화상의 차이에 대한 관점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통일 이후 여성관련 정책이 여성에게 유리하 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사회통합차원에서 그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특히 통일이 서독의 기존정책을 구동독이 일정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이었기에 구서 독여성들의 지위가 약화되었다5)(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1999: 251). 구서 독 여성운동의 주요 이슈를 보면 이들 여성들에게는 직업, 탁아, 성적 자유를 주요 사업과제로 삼았던 반면 구동독여성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이슈들은 이 미 실천된 것이었다. 또한 구동독여성의 경우는 여성차별에 대한 논의가 없는 반면 구서독은 그렇지 않아 여성으로서의 요구가 다른 차원이었다. 이는 여성 들간의 다른 경험들과 기대들 그리고 정치문화들로 인해 ‘같은 언어로 말하는 데’ 는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통일이후 구동독 여성들의 실업과 사회보장책의 미흡, 동독 여성들의 가치관혼란을 가져왔고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 사회통합 과정에서 발생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은 남북여성교류협력활성화방안을 준비하는 우리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독일 여성교류협력의 시사점
동서독 여성교류협력 경험은 전반적으로 구서독의 다원주의와 시민사회,
5) 특히 동독지역 여성들은 실업 및 탁아문제, 낙태문제의 처벌조항, 교육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회변화에 따른 심리 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