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은 예나 지금이나 정서적인 테마이다.67) 독일에서의 미디어 비평은 1960년대 아도르도에 의해 대표되기는 하나, 매스미디어의 영향에 대해 공적으로 표현한 첫 번째 인물 은 아니다. 1932년에 히틀러의 포효를 이미 전 유럽에서 들어야 했을 때, Bertolt Brecht는 라디오의 기능에 대해 미디어의 일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라디오는 분배 장치로부터 커뮤니케이션 장치로 바뀌어야 한다. 라디오는 공공 생활의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장치일 것이며, 엄청난 채널 시스템일 것이다. 즉 라디오는 송신될 뿐만 아니라 수신되어 야 하고, 청취자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게 하고, 청취자를 고립시키지 말고 관련시켜야 한다.”68)
이미 약 70년 전에 브레히트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모든 매스미디어의 딜렘마에 대 해 알고 있었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말할 기회를 갑자기 가졌다. 그러나 그것을 숙고하지 않으면, 말할 것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다.” 마샬 맥루언은 그의 1964년 저서 ‘마적인 채널 들’을 통해 미디어이론과 기술이론의 초석을 세웠다. “그는 뉴 미디어를 긍정한다. 우리 삶의 의사소통적 기술화를 그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69) 그의 이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 간 육체가 기술을 통해 확장되었다는 테제이다.
“ 새로운 기술의 모든 발명은 자연적인 신체의 확장이고, 이러한 확장은 다른 유기체들과 신체 확장의 새로운 관계 혹은 균형을 요구한다. ... 오디오적인 유럽에서 텔레비전은 보는 것을 강화하였고 유럽인들을 점점 더 미국적인 포장형식과 의류형식으로 내몰고 있다. 비주얼 문화가 강한 미국에서는 말해진 언어의 비주얼적이지 않은 세계, 식사문화, 조형 예술의 TV보기가 오디오적인 인식의 문을 열었다.”70)
1970년에 Hans Magnus Enzensberger는 맥루언의 테제들을 일반성을 통해 대체로 무시 하기 위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러한 생각을 다루는 것은 거의 쓸모가 없다. ... 미디어의 구조 에 대한 성찰 없이 미디어가 임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71) 엔첸스베르커에게 있어서 뉴미디어는 규모 면에서 인쇄처럼 더 이상 평가될 수 없다. 그는 뉴미디어를 기술적이나 심리학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 다루었다. “역사상
67) Hübner, Tobias (2015). Entzauberter Zauber - Eine kurze Geschichte der Medienkritik.
(https://medienistik.wordpress.com/)
68) Bertolt Brecht, Der Rundfunk als Kommunikationsappart, in:Gesammelte Werke 18. Schriften zur Literatur und Kunst I, Frankfurt am Main 1967, 128. (127-134)
69) Dieter Baacke, Medienpädagogik, Tübingen 1997, 30.
70) Herbert Marshall McLuhan, Die magischen Kanäle. Understanding Media, Düsseldorf/Wien/New York/
Moskau 1992, 61.
71) Hans Magnus Enzensberger, Baukasten zu einer Theorie der Medien. Kritische Diskurse zur Pressefreiheit, hg. von Peter Glotz, München 1997, 122.
미디어문화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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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과정에 다수가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그 과정 의 실제적인 수단은 대중 자신들의 손에 있다.” (99) 그에 의하면 책은 어려운 미디어이고, 언어를 책의 형성을 통해 분리하고, 독자와 저자를 분리하며,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허용하 지 않기 때문에 전자 미디어에 의해 해체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글로 작성된 문헌은 불과 몇 세기 동안만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책의 지배는 오늘날 이미 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영향을 끼친다. 비교도 안 되는 더 긴 시간이 책의 지배를 앞서는데, 구두 문학이 그것 이다. 이제 책의 지배는 전자 미디어의 시대에 의해 해체될 것이고, 전자 미디어는 경향에 따라 다시 말하기로 간다.” (125)
1980년대 초에 뉴욕대학의 미디어 생태학 교수 Neil Postman이 주목받고 있다. 그의 테 제는 전자 미디어가 사회가 만든 어린이 보호공간에 의해 전천히 점점 파괴되고 있다는 것인 데, 이전에 어린이와 성인 사이를 구분한 성인들의 모든 비밀을 전자 매체가 공개하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포츠만에게는 책이 다시 이상적인 미디어인데, 인간이 자신의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질을 높여야 하고 이로써 어린이들을 위험에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어린이는 성인성을 습득해야 하는데, 읽기와 쓰기 및 품성을 습득함으로써 가능하다. ... 뉴미디어는 상이한 연령집단 사이의 차이가 유동적으로 나타나게 영향을 끼치고, 그러면 차별화된 사회질서의 이상에 배치되게 한다.”72)
이러한 상이한 테제들을 언급하는 것은 미디어 연구의 이질적인 스펙트럼을 자료화하고, 그러한 스펙트럼은 미디어 교육의 수업지도안에 오늘날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 독일에서 미디어비평의 제도화
1953년 함부르크 한스-브레도브 연구소(Hans-Bredow-Institut)에서 발간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Rundfunk und Fernsehen)이라는 잡지에서 텔레비전비평의 위치 부여에 대해 Adorno의 논문 텔레비전에 대한 프롤로그(Prolog zum Fernsehen)에서 논의된 바 있다.73) 제도화 단계의 초기부터 담론과 실천 사이의 간격이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관찰된다.
이와 더불어 1950년대 말에 다양한 일간신문에서 텔레비전비평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비평가들의 자기의식이 약했기 때문에 비평가와 비평 대상 사이에 불균형이 나타나기도 했다
72) Neil Postman, Das Verschwinden der Kindheit, Frankfurt am Main 1987, 105.
73) Kleiner, Marcus S. & Nieland, Jöfg-Uwe (2010). Wege und Sackgassen der Institutionalisierung der Medienkritik in Deutschland. In: Marcus S. Kleiner (Hrsg.), Grundlagentexte zur sozialwissenschaftlichen Medienkritik, 490-513.
Ⅷ
미디어 이론과 문화 비평75
(Saur & Steinmetz 1988). 1960년대에는 예를 들어 고전적인 작품비평과 더불어 공공 미 디어로서 텔레비전의 구성과 조직에 대한 비평이 등장한다. 미디어비평이 사회비평적인 생각 이 아니라 제도나 정책적인 문제를 다루게 된 것이다(Hickethier 1994, 156).대학에서 미디어비평 관련 학부나 연구소 없이도 비평적 의식은 증가하였다. 문인들과 젊 은 영화제작자들은 비평을 위해 다른 미디어를 골랐다. 예를 들어 귄터 그라스, 페터 한트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 롤프 디터 브링크만 등은 미디어에 대한 저널리스적인 논쟁을 시작했다. 알렉산더 글루게의 1966년과 1968년 영화나 폴커 쉬렌도르프의 소설 영화화 (1967)는 그때까지 익숙하지 않은 독일의 이미지들을 제공했다. 특히 엔첸스베르거는 그의 미디어비평 에세이들에서 일련의 테마들을 논의하였는데, 오늘날까지 미디어비평을 위한 담 론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슈피겔지의 언어(1957)는 슈피겔지의 언어와 이 데올로기에 대해, 미디어 이론에 대한 조립상자(1970)에서는 뉴미디어의 기술적이고 사회적 인 가능성에 대해, 빌트지의 승리인가 언론자유의 재앙인가(1983)에서는 빌드지에 대한 비평 의 가능성에 대해, 텔레비전에 대한 모든 탄신은 왜 불필요한가(1988)에서는 텔레비전의 프 로그램 부재에 대해 논의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점차 비평적인 기여를 하였고, 이러한 발전은 결정적으로 정치적인 잡지의 등장을 자극했다. 텔레비전의 기술적인 확대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은 주 도적인 미디어가 되었고 이로써 ‘정치’에 의해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 에서 미디어비평은 미디어의 일반적인 비평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형태의 미디어비평 은 무엇보다도 대학들에서 확장되었다. 특히 Hosrst Holzer 등 일군의 학자와 ‘미학과 커뮤 니케이션(Asthetikund Kommunication)’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 었다. 대학에서 미디어비평의 제도화 초기를 대변하는 Horst는 빌트지와 슈피겔지의 내용 분 석을 배경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 영역의 하위구조화에 대해 요구한다. Holzer는 이론적이고 실제적으로 포순이 없게 계속 연구할 것을 제안하는데,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인 결과 에 대한 비평적 연구들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Holzer 1971, 101).
이에 따라 Lutz Hachmeister는 1993년에 ‘새로운 미디어비평을 위하여 0후기 텔레비전 사회에서 세대 변화와 시스템 변화’, Friedrich Krotz는 1997년에 ‘사용능력과 미디어능력
–미디어 발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서 ’Stiftung Medientes‘, Werner A. Meier는 2004년에 ’미디어 집중의 사회적인 결과‘, Christiane Eilders 등은 2006년에 ’능동적 대중–유럽 차원에서 텔레비전의 시민사회적인 통제의 제도화‘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8쪽 목차). 한편, 영국에서 시작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에서도 1990년대와 21세기미디어문화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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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미디어비평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체성과 주체성의 구성, 이데올로기 의 분석과 비평, 대중문화의 분석, 텍스트비평, 문화비평, 헤게모니이론, 이데올로기 비평 등 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74)
Ganguin(2004)의 논문에서는 미디어능력의 일부로서 ‘미디어비평’을 중심으로 고찰한 다.75) 이때 중심적인 질문은 미디어비평이 현대의 사회적이고 기술적인 테두리에서 어떤 중 요성을 갖는지 및 미디어비평이 어떤 차원들을 가지는가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미디어비평 개념들을 먼저 알아본다. 이 개념들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대안적인 신 개념 화를 제안한다.
■ 미디어비평의 중요성
미디어비평 능력은 사회적인 관련성에서 더 강하게 얻는다. 그러나 미디어사회의 시대에서 미디어를 비평적으로 다루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어 증가하는 미디어 개념들에서 분명해진다.
■ 다양한 미디어비평 개념의 미시 및 거시 분석
미디어비평이 어떤 영역들을 포함하는가라는 중심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4개 미디어능력 모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해 보자. 그림에서 미디어비평에 대한 개별적인 생각들을 일 별할 수 있고 상세한 내용을 비교할 수 있다. Tulodziecki의 설명을 제외하고 모든 생각이 공통적인데, 실용적인 적용의 측면에서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미 디어비평의 작동에 이용될 수 있는 관찰되어야 할 행위들이 직접적이지 않다. 미디어능력의 의미에서 미디어비평 개념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이러한 능력이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는지 여전히 모호하다.
74) Nieland, Jörg-Uwe (2010). Die Cultural Studies-Debatte –ein Gewinn für die Medienkritik?. In: In: Marcus S.
Kleiner (Hrsg.), Grundlagentexte zur sozialwissenschaftlichen Medienkritik, 390-414.
75) Ganguin, Sonja (2004). Medienkritik –Kernkompetenz unserer Mediengesellschaft. Ludwigsburger Beiträge zur Medienpädagogik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