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8년 종합무역법의 수퍼 301조의 의의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미국 무역정책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는 미 의회의 주도로 입법된 ‘1988년 종합무역법(Omnibus Trade and Competitiveness Act of 1988)’의 핵심 조항인 ‘수퍼 301조’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수퍼 301조는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1974년 무역법’의 301 조를 더욱 강화한 것으로서 그 이전에 비해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인다.
첫째, 일방주의적 성격을 지닌 조항이라는 점이다. 기존 301조는 불공정 무역관행과 그 시정 절차를 다자주의 제도인 GATT의 틀 내에서 규정 했다면, 수퍼 301조는 불공정 무역관행을 보이는 대상국가에 대한 판단 을 GATT가 아닌 미국이 직접 판정하도록 규정하였다. 나아가 GATT의 분쟁해결절차를 이용하지 않고 미국이 일방적으로 보복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둘째, 무역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기존 301조의 권한을 대통령에게 일임했으나, 수퍼 301조는 집행의 각 단계를 규정된 시한 내에 행정부에 의무화함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을 제 한하였다. 이전에는 대통령이 무역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인지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면 수퍼 301조는 대통령이 오히려 보복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의회에 소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겨 줌으로써 이러한 정책이 실제로 이행될 가능성을 강화하였다.155)
153) Tyson, Laura D’Andrea. 1992, p. 109.
154) Kunkel, John. 2003, pp. 100-102.
155) 백창재. 2015, pp. 79- 83. 1988년 종합무역법의 입법 과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다음을 참조. 백창재, 2015, pp. 80-114.
요컨대, 수퍼 301조는 미국의 국내법으로 무역 상대국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제재조치를 취하거나, 제재를 취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자국 의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열어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상대와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통상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행정부에 대하여 의회가 압력을 행사 함으로써 더욱 강경한 조치가 나올 가능성을 높인 것이었다. 1989년 5월 미 국은 수퍼 301조에 따라 일본을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하고, 슈퍼컴퓨터 와 인공위성에서의 일본의 정부조달 관행을 우선협상관행으로 지정하였다.
(2) 슈퍼컴퓨터의 301조 특정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슈퍼컴퓨터 산업에서도 미국은 전통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3년까지 슈퍼컴퓨터 시장 에서는 미국 기업인 Cray Research와 Control Data Corporation만이 존 재하였다. 그러나 1983년에 들어 일본 기업인 Hitachi와 Fujitsu가 시장 에 진입하였고, NEC가 1985년에 시장에 진입하면서 미국과 일본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기업들의 성장 이면에는 일본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이 있 었다. 예컨대, 일본 통산성이 주도했던 VLSI 프로젝트는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이 수퍼 컴퓨터 산업에도 뛰어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일본 통산성은 직접적으로 1981-1989년 동안 ‘과학적 그리고 기술적 사 용을 위한 고속 전산시스템(High-Speed Computing System for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Uses)’ 프로그램을 통해 6개의 일본 기업들 에게 1억 2천 달러가 넘는 금액을 지원하고 있었다.156)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1980년 중반에 들어 일본 기업들의 약진 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미국의 제품의 품질이 더 우수하다는 일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들은 일본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동시에 일본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자, 미국 기업들의 위 기감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위기감은 일본 기업인 NEC가 ‘휴스턴 지역
156) U.S. Congress, 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 1991a. Competing Economies:
America, Europe, and the Pacific Rim. OTA-ITE-498.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pp. 264-265.
연구 컨소시엄(Houston Area Research Consortium)’에 슈퍼컴퓨터를 공 급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고조되었다.157)
특히 자국 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는 일본의 차별적인 정 부 조달(government procurement) 관행이 문제로 부상했다. Cray와 같은 미국 기업들은 일본 정부가 슈퍼컴퓨터 조달 계획에 대한 공고를 내놓지 않고, 입찰 과정에서도 성능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업체를 선정하지 않는다 고 비판하였다. 또한 Cray는 일본 기업들이 계약을 따내기 위해 합리적인 가격보다 80-90% 낮은 가격에 입찰에 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158)
미국 슈퍼컴퓨터 산업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 는 일본의 불공정한 관행을 다루기 위해 ‘시장중시형개별분야(MOSS)’
협의의 틀에서 일본과의 양자협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87년 8월 미 국과 일본은 슈퍼컴퓨터 합의(1987 Supercomputer Agreement)에 도달 하게 된다. 이 합의에 의해 일본의 정부조달 과정이 더욱 투명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Cray가 제시한 다른 두 가지 불공정 관행, 즉 가 격을 지나치게 내리는 일본 기업들의 관행과 능력 및 성능에 기초하지 않는 입찰 평가 기준 등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159)
87년 합의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1989년 초반 에 들어서면서 미국 기업들은 정부가 301조를 통한 더욱 강력한 조치를 통해 일본 시장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예를 들어, Cray는 자신들이 세계시장의 63%, 미국 시장의 84%, 그리고 유럽 시장의 81%를 점유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시장의 점유율은 15%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면서 일본의 불공정 관행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기간 일본 기업들은 유럽 시장의 10%밖에 점유하지 못한 반면, 일본 시 장의 85%를 점유하는 등 유독 일본에서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또한 1989년까지 일본 정부가 실시한 51개의 슈퍼컴퓨터 정부구매 계약 중 5건만이 외국 제품을 구매한 것이었다.160)
157) Bayard, Thomas Q., and Kimberly Ann Elliott. 1994. Reciprocity and Retaliation in U.S. Trade Policy. (Washington D.C.: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p. 105.
158) Tyson, Laura D’Andrea. 1992, p. 77.
159) U.S. Congress, 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 1991a, pp. 25-28.
160) Cray Research, Inc. 1991. “The Japanese Public Sector: Problems and Prospects for US Supercomputer Vendors.” (Minneapolis: Cray Research Inc). 재인용: Tyson, Laura D’Andrea. 1992, p. 78.
이런 상황에서 두 가지 사건이 미국 기업들의 위기감을 고조시 켰다. 하나는 일본 기업인 NEC가 이제는 미국의 제품을 넘어서는 세계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고 발표한 사건이었다. 두 번째 는 1989년 4월에 미국 슈퍼컴퓨터 산업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Control Data Corporation이 시장을 떠나기로 결정한 사건이었다. Control Data 의 대표들은 슈퍼컴퓨터 산업은 산업 그 자체만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다른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경우 미국은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61)
Cray와 같은 대기업뿐 아니라 다른 슈퍼컴퓨터 산업 종사자들도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강경 대응을 지지하였다. 예를 들어, 한 청문회에서 전 기전자기술자협회(IEEE: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 는 “일본식의 경쟁 방식은 곧 미국의 고성능 전자산업에 중대한 (significant)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162) IEEE는 1987년에 일 본과 맺은 슈퍼컴퓨터 합의는 명목상의 상호성을 반영할 뿐 실질적으로 상 호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IEEE는 미국 정부가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3)
한편 다른 산업의 주요 행위자들도 미국 정부가 강경한 조치를 통해 일본에 대해 구체적인 결과를 받아오길 원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 시 행정부가 일본을 301조의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한 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예컨대, 전미제조업협회(NAM: National Association of Manufacturers)는 수퍼 301조를 통해 일본을 압박하려는 미국 정부의 조치가 실용적인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조치라고 보았다. NAM은 이런 맥락에서 “정부가 훌륭한 일을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NAM과 같은 이 익집단들은 수퍼 301조를 통한 강경대응이 미국 제조업 전반의 맥락에서 도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164)
161) Zeng, Ka. 2007, p. 147.
162) U.S. Congress, House Committee on Government Operations, 1992. Is the Administration Giving Away the U.S. Supercomputer Industry? : Hearings Before Legislation and National Security Subcommittee of the the Committee on Government Operations, House of Representatives, 100th Congress, 2nd Session.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p. 125.
163) U.S. Congress, House Committee on Government Operations, 1992. pp. 140-141.
164) U.S. Congress, Senate Committee on Finance. 1990. Super 301: Effectiveness in Opening Foreign Markets.. Hearings Before the Subcommitteee on International
사회 수준의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결 정자들은 일본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고민 이면에는 슈퍼컴퓨터 산업이 경제·안보적 측 면에서 중요한 산업이라는 전략적 고려가 작용하였다.165)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슈퍼컴퓨터 산업은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고, 다른 산업에도 긍 정적인 파급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이 분야에서 생산된 지식은 경제의 다른 부문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책결정 들이 보기에 이 분야에서 일본은 불공정한 방식으로 자국 산업을 지원할 뿐 아니라 미국의 기업들을 차별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슈 퍼컴퓨터 산업을 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166)
둘째,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슈퍼컴퓨터 산업이 국가 안보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에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슈퍼컴 퓨터는 미항공우주국(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이 진행하는 항공우주산업 및 에너지부(Energy Department)의 핵무기 프로그램과도 연계된 중요한 산업이었다. 따라서 핵심 기술을 외국에 의존하는 현상을 줄이고 국가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서 민간부문의 슈퍼컴퓨터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였다.167) 전반적으로 미 의회는 행정부가 자신들이 새로 준 수퍼 301조라 는 무기를 활용하여 일본에 대한 강경조치를 취할 것을 압박하고 있었 다. 의회는 301조가 일본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부 시 대통령이 이러한 의회의 기대에 부응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무 역대표부와 상무부는 미국의 국내 통상법을 일본에 일방적으로 적용하기 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모든 정책 결정자들이 일본 에 대한 강경 대응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
Trade of the Committee on Finance, House of Representatives. 101th Congress, 2nd Session.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pp. 1-3.
165) Markoff, John. 1989. “Supercomputers Worry U.S. as Japan Challanges American Dominance.” New York Times. May 1.
https://www.nytimes.com/1989/05/01/business/supercomputers-worry-us.html (검색일: 2019. 7. 15).
166) Bayard, Thomas Q., and Kimberly Ann Elliott. 1994, p. 102.
167) Bayard, Thomas Q., and Kimberly Ann Elliott. 1994, p. 102.; Mastanduno, M..
1992. “Setting Market Access Priorities: The Use of Super 301 in US Trade with Japan.” World Economy 15, pp. 743-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