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남북경협의 태동기
한국 정부는 1988년부터 남북관계, 특히 남북 경제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다. 먼저 이 해 7월 7일, 노태우 대
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분단의 벽을 헐고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할 것”을 천명했다.
이른바 7․7 선언이다. 이어 그 해 10월에는 「남북경제개방조치」를 발표해, 북한과의 교역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무려 40년 만에 남북한 공식교역이 재개되기에 이르렀 다. 즉 1988년 11월 (주)대우가 최초로 북한산 물품(도자기)의 반입 승인을 획득했고, 같은 해 12월말까지 4건의 북한산 물품 반입 승인 을 얻었다.
다음 해인 1989년에 한국 정부는 남북경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 법 적 및 제도적 기반의 마련에 착수했다. 이 해 6월에 「남북교류협력 에 관한 지침」을 제정해서, 부분적이지만 제3국을 통해 북한 주민과 접촉 및 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했다. 또한 다음 해인 1990년 8월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
(시행 2010.11.18. 법률 제10303호, 개정 2009.5.28., 일부개정)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1992년부터는 위탁가공교역이라는 새로운 남북경협 형태 가 등장했다. 이 해 9월 코오롱상사가 처음으로 북한에서 위탁가공 한 물품인 셔츠(6,216벌, 3만 8천 달러)를 국내에 반입했다. 이어 1996년부터는 남한기업의 대북 투자협력이 시작되었다. 이 해 (주)대 우는 북한의 삼천리 총회사와 합영회사를 만들어 평안남도의 남포 공단에 입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와 함께 1995년에는 북한에 대한 사상 최초의 인도적 지원이 개 시되었다. 다만 이후에 중단되었다가 2000년부터 재개, 본격화되었 다. 이어 1998년에는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시작되었고, 2000년에는 남북이 개성공단 개발 사업에 합의했다.
나. 김대중 ‧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경협 초기(1990년대)에는 모두 다 민간 기업 위주의 소규모 거래였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경협사업이 주력사업으로 부상했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 로 한국정부의 역할이 대폭 강화된 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북경협이 한 차례 도약하는 중요한 계기 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남 북경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남북경협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라는 주체의 등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남북경협은 개별 민간기업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남북경협은 그 속성상 민 간기업의 힘만으로 진행하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던 것이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한 당국, 특히 한국정부가 경제협력의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 기서 한국 정부는 남북경협의 기획자, 조정자, 사업당사자로서 폭넓 은 영역에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경협은 내용적으로 보면 중심축 이 민간의 경협에서 이른바 ‘공적 경협’(정부차원 혹은 민관합동의 경협)으로 이동했다. 공적 경협은 개성공단 사업, 철도도로연결 사 업, 금강산 관광 사업 등 3대 경협 사업 및 후속의 경공업․지하자원 협력사업이 대표적이다. 물론 일반물자교역, 위탁가공교역, 내륙지 역 투자사업 등 민간기업 차원의 경협도 지속되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경협에서는 여러 층위의 남북 한 당국 간 회담이 핵심적 추진동력으로 작용했다. 남북경협을 논의 하기 위한 남북한 당국 간 회담의 지속적 개최는 공적 경협을 중심으 로 한 남북경협의 제도적 틀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다. 이명박 ‧ 박근혜 정부 시대의 남북경협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대에 남북경협은 최대의 위기 상황에 봉착 했다. 이명박 정부 시대 들어 남북경협은 개성공단사업을 제외하고 는 중단되었다. 이는 북한에 대한 남한의 최초․최대 경제제재조치 인 5․24 조치의 영향이 가장 크다. 지난 2010년 이 조치가 취해짐에 따라 직접적으로는 일반물자교역, 위탁가공교역, 내륙지역 투자사 업 등이 중단되었다. 또한 5․24 이전에 중단되었던 금강산 관광 사 업도 앞으로는 재개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대의 남북경협 위축 상황은 5․24 조치만으 로는 전부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 시대 개막 이후 남북관 계가 경색되었고, 이는 남북경협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예컨대 북한산 모래반입, 남북 IT 협력 업계는 남한 정부의 사실상의 압력 으로 사업이 중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대 들어서도 남북경협의 위기적 상황은 지속되었 다. 2013년에는 개성공단 사업이 잠정 중단되었다가 3개월 여 만에 재개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2월에는 개성공단 사업이 전면 중단되 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제 남북경협 제로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표 Ⅱ-1> 남북경협사업 중단의 직접적 계기
중단시점 북한 조치 및 사건 남한 조치 금강산 관광 사업 2008.7. 남한 관광객 피격 사건 금강산 관광 중단 일반물자교역, 위탁가공
교역, 투자사업 2010.5. 천안함 사건 5‧24 조치 (남북교역 중단) 개성공단사업 2013.4. 사업의 잠정 중단 선언
및 북한 근로자 철수 남한 주재원 철수 개성공단사업 2016.2. 북한의 4차 핵실험 및
장거리 로켓 발사 개성공단 전면중단 자료: 양문수, “북한의 체제전환과 남북경제공동체,” 이병천 외 엮음,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불화와 공존 (서울: 돌베개, 2016), p. 523.
위의 <표 Ⅱ-1>에도 나타나 있듯이 남북경협의 사업들이 순차적 으로 중단되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 다. 즉 우발적 사고이든 의도적 행동이든 북한 당국에 의해 돌출적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대해 남한 정부가 남북경협 사업 중단으로 응수한 것이다. 특히 북한에 의해 야기된 상황이 일반적인 예상 범 위를 벗어났고, 남한의 대응 또한 예상 범위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달리 보면 당시의 남북관계의 게임 구조, 즉 어느 한쪽이 강경하 게 나오면 다른 한쪽도 강경하게 대응하는 패턴이 남북경협 사업에 까지 침투한 것이다. 아울러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남북경협 사업에 대해 남북한 당국이 직접적으로, 더구나 사업 중단이라는 극단적 형 태로 개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