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해체되던 1988년에 집권한 노태우 정부는 동아시아 또는 세 계전략의 하나로 공산권 국가와 국교를 수립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북 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때 추진한 북방정책은 “중국, 소련, 동 구제국과 기타 공산국가 및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정책과 외교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함으로 한반도 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공산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 의 증진과 남북한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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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관계의 발전추구,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 산국가와의 외교정상화와 남북한 통일의 실현을 위한 정책과 이러한 정책실현을 위한 방법”93)이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 헝가리, 폴란드, 유고 등 동구권 국가들과, 1990년 체코, 불가리아, 몽고, 루마니아, 소련과, 1992년 중국과 수교 를 했다.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 하고, 1991년에는 남북관계 발전의 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기본 합의서」를 채택했다.김영삼 정부는 미국의 세계적 패권과 미국주도의 세계화가 강력하 게 추진되는 상황에서 등장해 세계화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했다. 세계 화 정책은 정치적으로 탈냉전과 함께 구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 를 급속도로 개선하고, 경제적으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낮춰 자유 무역주의에 동참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에 직면했다. 김영삼 정부는 별도의 동아시아 또는 동북아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1998년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동아시아공
93) 김달중, “북방정책의 개념, 목표 및 배경,” 국제정치논총, 제29집 제2호 (1990), p. 43.
동체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의 오 부치 수상과 1998년 10월 8일 10개항으로 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 공동선언은 양국 협력을 효과적 으로 추진하는 기초는 정부 간의 교류와 더불어 국민 간 깊은 상호이 해와 다양한 교류에 있다는 인식하에 양국 간 문화와 인적 교류를 확 충한다는 것으로 정부는 한국 내 일본문화 개방을 결정했다. 이를 통 해 한일관계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 은 1998년 아세안+3 정상회담에서 동아시아비전그룹(East Asia Vision Group: EAVG)을 주창했고, 2000년 동아시아연구그룹(East Asia Study Group: EASG)을 제창해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2003년에 취임한 노무현 대통 령은 3대 국정목표의 하나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제시했다.
노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근대 이후 세계의 변방에 머물던 동북아가 이제 세계 경제의 새로운 활력으로 떠올랐다”라고 하면서, 동북아시 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의 통합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 동북아의 다자협력과 남북관계 개선의 선순환구조의 형성을 도모했 다. 그 결과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이 본격적으로 가동되 었고,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9·19 공동성명은 북핵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다자안보체제에 대 한 내용도 담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대구상은 한반도와 동북아를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보면서, 한국 및 한반도를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중심지 로 만드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한반도경제권과 동북아경제공 동체 형성,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다자안보체제가 필요하다고 보
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공동체를 전제하지 않고 동아시아공동 체를 말하는 것은 좀 공허하다. 동아시아공동체가 성공하려면 동북아 공동체가 먼저 성공하거나 적어도 병행하여 추진되어야 한다”94)라고 하면서, “유럽연합과 같은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동북아에도 구축되 어야 동북아시대는 완성된다”라고 주장했다.95) 노무현 대통령은 동 북아공동체와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통합해 유럽연합과 같은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은 동북아의 중심을 잡는 역할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북아중심국가론, 동북아경제중심, 자주국방론, 동 북아균형자론이라는 여러 가지 개념이 등장했다. 또한 해양세력과 대 륙세력을 잇는 가교국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거점국가, 동북아 공 동체 형성의 촉매국가라는 개념도 등장했다.96)
이명박 정부는 대외비전으로 성숙한 세계국가(Global Korea)를 제 시하고, 한국이 세계외교의 중심으로 진입했다고 평가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론의 맥을 이은 이명박 정부는 세계화가 급속하게 진전 되고, 우리의 내부적 국력도 신장되었으며, 우리 국민의 해외진출과 교류가 확대되고 있다고 보았다. 국익의 글로벌화 현상이 가속화되 고, 국익창출을 위해 우리 스스로가 국제무대의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행동해나가는 것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성숙한 세계국가는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하고 동시에 세계와의 공존을 도모해나가기 위한 외교 비전이자 전략”으로 규정되었고, “더 넓은 시야, 보다 능동적인 자세 로 전 지구적 관심사에 대해 적극 협력하고 세계평화와 발전에 적극
94) 노무현,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움 기조연설,” (부산, 2007.11.13.).
95) 배기찬, “동북아시대구상의 현실과 과제,” 한국과 국제정치, 제24권 제1호 통권60호 (2008), pp. 165~166.
96) 동북아시대위원회·NSC사무처,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구상-비전과 전략,” 2004.
적으로 기여하는 세계국가를 지향하자”97)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지역정책으로는 신아시아외교를 주장했다. 이것의 배경은 경제, 자원, 인구 등 각 영역에서 아시아 지역의 중요성이 크 게 증대되고, 국제무대에서 우리가 중추적 동반자외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대내외 여건이 성숙되어, 심화되는 아시아 권역별 통합 움직 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98)
박근혜 정부는 G2로서 중국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지역전략으로 동북아평화협력구상과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장했다. 동북아평화 협력 구상은 동북아 다자협력프로세스로서 역내 다자협력 필요성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를 확산하고, 기능별 분야 협력을 내실화하는 것 이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유라시아대륙의 잠재력 실현을 위한 구 상으로 하나의 대륙을 위한 연계성 증진, 창조의 대륙을 위한 파트너 십 강화, 평화의 대륙을 위한 신뢰와 평화의 통로 구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들은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 계가 있었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외교다변화와 글로벌 네트워크 확 대를 추진했는데, 아태지역 외교로서 아세안과의 협력강화, 동남아주 요국들과 최상의 관계구축, 인도 및 호주와의 미래지향적 협력강화, 정상회담을 통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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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포괄적 동반자관계 심화 등을 추진했다.97) 국정백서 편찬위원회 편, 이명박 정부 국정백서 4: 글로벌 리더십과 국격 제고(서울:
대한민국 정부, 2013), p. 36.
98) 위의 책, p.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