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초기부터 평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으나, 사회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평화운동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평화연구와 평화정책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들어 시작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실체적 모 습을 갖추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운동은 전쟁 종식과 항구적 평화를 지향했으며, 광범위한 계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 특 징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파시즘의 몰락 및 민주주 의 승리는 전후 평화운동 탄생의 배경으로 작용했으며, 평화를 보장 할 수 있는 정책과 위협요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 되었다.168)
1950년대 이후의 평화연구는 세계적인 냉전체제를 기반으로 동서 양 진영 및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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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대립구조의 완화와 핵전쟁 방지를 위한 대안의 마 련에 주목했다. 그러나 국제분쟁은 민족, 종교, 그리고 이데올로기 갈 등과 대립으로 점차 성격이 복합화했으며, 대량살상 무기와 군사기술 발달로 초래된 새로운 갈등의 해결을 위한 평화운동과 평화연구의 과 학화를 위한 움직임도 나타났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군축 및 안 보전략을 연구하는 평화연구소들이 경쟁적으로 설립되었으며, 평화 운동의 전문화 경향이 나타났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의 영향 으로 안보전략 차원의 평화 보장책에 한계가 드러났으며, 미‧
소 타협 에 의존하는 평화공존체제에 대해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같은 상 황을 배경으로 비판적 평화연구를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 새로운 노력들이 나타났다.169)1980년대 유럽에서는 평화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80
168) 조한범 외, 동북아 평화문화 비교 연구(서울: 통일연구원, 2004), p. 32.
169) 위의 책, pp. 33~34.
년대 초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에서 대규모의 인파가 평화 를 위한 시위에 참가해 핵무기의 철거를 요구했다. 이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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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이 해관계에 따른 핵무기 협상에 대한 유럽인들의 불만과 비판이 원인이 었지만, 과거 평화운동에 있어서 사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이후 평 화운동은 핵무기 및 동서 진영 간의 안보대결에 대한 비판을 넘어 발 전지상주의, 환경파괴, 사회 양극화, 그리고 체제와 이데올로기 등 폭 넓은 분야로 범위를 확장했다.지구촌 차원의 냉전체제가 해체됨으로써 진영 간 대립에 주목했던 냉전기의 평화연구는 약화되었다. 냉전적 대립구도의 소멸에 따라 이 념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갈등구조는 해체되었지만 민족, 종교, 지역 등의 새로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부상했으며, 중동을 중심으로 대 규모 인명피해를 동반하는 물리적 충돌도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같은 변화는 평화연구의 방향이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복 합적인 갈등의 관리와 조정이 새로운 평화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모 든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을 문명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메카니즘이 평화연구의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170)
평화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화의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갈퉁(J. Galtung)의 경우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 화(Positive Peace)를 구분해 평화의 개념화를 시도했다.171) 소극적 평화는 전쟁 회피 개념이며, 물리적 폭력의 부재를 의미하는 개념이 다. 소극적 평화에 대한 인식은 제1,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한 인류가 새로운 전쟁을 방지해야 한다는 절박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형 성되었다. 소극적 평화는 전쟁의 부재를 평화상태로 규정하기 때문에
170) 위의 책, pp. 34~36.
171) J, Galtung, “Peace Research: past Experiences and Future Perspectives,” In Peace and Social Structure: Essays in Peace Research, Vol. 1. edited by Johan Galtung (Atlantic Highland: Humanistics Press, 1990).
휴전과 전쟁의 차이가 불분명하며, 기존 국제질서의 현상유지를 당연 시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적극적 평화의 개념은 사회정의의 구현, 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하 는 메카니즘의 정착, 그리고 국가 간 협력 체제의 구축 등을 평화상태 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확장된다. 적극적 평화는 인권 보장, 민주적 참여, 경제발전, 삶의 질 보장 등 넓은 의미의 평화를 위한 적극적 여건들이 갖추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적극적 평화에 대한 위협은 전쟁과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은 전쟁과 물리적 갈등 을 넘어 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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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독재‧
권위주의 통치, 고문‧
암살, 인권침해 등 다 양한 유형의 폭력을 포함한다.평화문화는 적극적 평화가 개개인의 생활세계에 내면화된 상태로 볼 수 있다. 행위자들이 투명한 제도와 절차를 통해 폭력을 제거하고 갈등을 조정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사회의 문명화된 형식을 평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자들이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정하 고 해결하는 상태를 평화문화가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172)
평화경제의 개념에 대한 일반적 합의를 찾기는 어려우며, 자유주의 경제철학은 평화경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18세기 후반 에 시작된 산업자본주의체제에서는 자유로운 원료 수입과 생산품 수 출이 필요했으며, 세계경제는 자유무역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를 기반 으로 자유무역이 평화를 증진시킨다는 사상이 확산되었으며, 아담 스 미스(Adam Smith)에서 출발해 밀(John Stuart Mill),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등 자유주의자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자유주의 평화사상에 따르면 자유무역 국가들이 경제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서 물리적 충돌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으며, 비 물리적인 협상수단의 활 용을 선호하기 때문에 전쟁이 방지될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쟁탈
172) 조한범 외, 동북아 평화문화 비교 연구, p. 15.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 산업자본주의체제 형성 이후에도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이 전쟁에 참전했다는 점은 자유주의 평화사상의 한 계로 지적될 수 있다. 또한 산업자본주의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선진기 술을 확보한 국가와 저발전 국가 간에 무역 불균형 구조가 내재해 있 었으며, 이는 종속이론의 비판을 야기했다.
전쟁 부재를 의미하는 소극적 평화를 적용할 경우 평화경제는 전쟁 경제(war economy)의 상대적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전쟁과 인과관계를 갖지 않는 경제를 의미한다.173) 현대 사회에 서 안보와 경제의 완전한 분리는 어렵다는 점에서 전쟁경제의 상대개 념으로서 이상적 의미의 평화경제를 찾기는 어렵다. 전쟁경제학은 전 쟁이 발생한 상황에서 자원의 최적 배분원칙을 밝히는 경제학 분야로 정의될 수 있다. 평화경제학은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이 전쟁으로 비 화하거나, 현재(status quo)상태를 유지하도록 관리하거나, 해소될 수도 있는 각각의 상황에서 평화상태로 진전시킬 수 있는 최적 자원 배분 원칙을 밝히는 경제학의 분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같은 관점에 서 평화경제란 지속가능한 평화상태를 도출하기 위한 적극적인 자원 재배분의 정책노력 과정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174)
분쟁과 전쟁의 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평화 경제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체제를 정 착시키기 위한 1919년 파리 평화회의와 베르사이유 협정 체제를 들 수 있다. 성공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체제와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들 수 있다.175)
173) Jenny H. Peterson, Building a peace economy? Liberal peacebuilding and the development-security industr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14).
174) 김영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 확대 가운데 평화경제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방향,” (통일부‧통일연구원 주최 2019 한반도 평화경제 국제포럼, 2019.10.22.), p. 8.
1919년 파리 평화회의와 베르사이유 협정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안정적인 평화체제의 구축을 시도했던 노력의 핵심은 독일과 오 스트리아 등 패전국이 다시 전쟁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가혹한 조건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는 패전국 독일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 게 함으로써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의도를 내포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경제적 제재는 독일 국 민의 집단적 좌절과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히틀러는 이를 이용해서 권력을 장악했다. 결국 파리 평화회의와 베르사이유 협정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징벌적 평화체 제가 보여준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주도의 브레턴우즈체제와 마샬플랜은 패전국의 경제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포용적 평화체제를 추구했다는 특징을 보였다. 브레턴우즈체제의 핵심은 무역전쟁을 방 지하는 국제무역기구(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 ITO) 설립, 안정적 국제외환시장을 보장하는 국제통화기금(IMF), 그리고 패전 국과 저개발국 경제개발을 지원하는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World Bank)의 설립 등 이었다. 브레턴우즈체제로 인해 장기간 세계적 차원의 무력 분쟁이 방지되었으며,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했다는 평가가 가능 하다. 1948년 이후 미국의 재정지원을 기반으로 패전국 독일을 포함 해 전후 유럽경제를 복구하기 위한 대규모 경제부흥 프로젝트인 마셜 플랜은 성공적인 평화경제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 의미의 평화개념을 적용할 경우 평화경제는 전쟁과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구조적 폭력과 연계성을 지니지 않는 경제를 의미한 다. 이 경우 평화경제의 영역은 전쟁과 군사적 위협이 없는 평화상태
175) 김영한, 위의 글, pp.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