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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 관련 정치권내 갈등내용의 변천

Dalam dokumen 통일인프라 구축 및 개선 방안 (Halaman 102-105)

V. 통일 거버넌스 ’ 효율화 방안

1. 통일문제 관련 정치권내 갈등내용의 변천

북한ㆍ통일문제를 둘러싼 정치세력간 갈등은 시민사회의 갈등보다 심하 지는 않지만 상당히 강한 정도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획일화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볼 수 없었던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는 ‘민족통일’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서는 초당적 국론합의를 통한 대처 필요성 논리가 지배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대립구도에는 큰 변 화가 발생했다. 과거 반독재는 통일과 융합되어 시민사회가 국가에 대항하 는 강력한 이념적 명분이었으나,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보와 아울러 민주주 의의 공고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반독재와 통일의 양 요소는 분리되었다.

반독재와 분리된 통일의 이데올로기적 동원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함께 대북․통일노선에 있어 기존의 냉전적 논쟁 구도의 해체와 아울러 강경론과 온건론이라는 새로운 대결․갈등구도가 형성되었다. 주요 대립적 입장은 대북압박․붕괴론과 포용․변화유도론으 로 구분할 수 있다.1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기존의 냉전적 관계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추진이라는 관계의 급격한 변전 가능성에 대한 보수집단의 우 려가 조문파동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잠복되어있던 정상회담 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 북한 지도부 불인정의 문제로 표출되었다. 이후 인 공기 게양 사건을 통해 보수정당은 북한에 대한 쌀 지원을 비롯한 제반 인 도적 수준에서의 대북지원을 북한변화를 확인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도록 한다거나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에 따른 교류ㆍ협력만을 인정하는 내용으 로 담론구도를 주도하여 정부의 탈냉전적 온건정책으로의 변전을 반대하 였다. 뿐만 아니라 인도적 쌀 지원이 결국 남침역량을 강화하는 군량미로 전용될 가능성을 시사함으로써 냉전적 강경입장을 다시 한 번 강하게 복원 시키려 하였다.

1이에 대해 상세하게는 이원섭, 새로운 모색, 남북관계의 이상과 현실 (서울:

한겨레신문사, 1997), pp. 67~68 참조. 강경론과 온건론의 대결구도는 1994년

8월부터 1997년 말에 이르는 동안 북한 붕괴론’이 국내외 북한연구자들의 주

요 논쟁대상이며 동시에 지배적 견해였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사회 주의권의 체제전환, 북한의 대외적 고립 가속화, 이에 따른 경제난과 김일성의 사망 등 일련의 위기징후가 중첩되면서 조기 붕괴 예측 흐름이 지배적으로 되 어갔다. 그러나 1997~98년 공식적 권력승계가 이루어지고 위기요인들이 부분 적으로 완화되면서 ‘붕괴’가 아니라 ‘변화’여부의 전망․예측 연구가 주조를 이 루었다. 이정희, “통일관련 사회단체의 이념적 차별성 연구: 남북관계와 대북정 책의 인식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 제42집 4호(2002), p. 131.

김대중 정부에서도 강경론과 온건론간 대결․갈등구도는 지속되었다.

강경론과 온건론은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평화․긴장완화 기조의 지속으 로 보수와 진보라는 좀더 선명한 갈등구도로 고착되었다. 보수 대 진보 갈 등은 김대중 정권이 기존 정부와 다른 지역적 권력기반에 근거하게 된 것 과 맞물려 지역갈등까지 중첩되어 대북․통일정책을 둘러싸고 더욱 복잡 해진 중층적 갈등구도가 형성되었다.2

김대중 정부에서 보였던 정당간 대립갈등 현상은 정책 자체의 당파성에 기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역적 갈등과 균열이라는 지지층 분열에 따 라 정당의 정략적 손익계산서가 달랐던 조건에서 더욱 확대되어갔다. 대북 정책이 국내 정쟁의 소재로서 각 당에게 충분히 활용 가능한 자원으로서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에서 여야 정당의 대북․통일 정책을 둘러싼 대립․갈등은 남북관계의 주요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내 정치적 주도권 장악을 위해 활용되었다. 그 대결은 특히 4․13 총선을 사 흘 앞둔 시점에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언급된 것을 계기로 매우 격화되

었다. 6․15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내치에서 안정을 확보

하지 못한 정부․여당이 정국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남북관계를 의도 적으로 과속하고 있다는 혐의를 강하게 받았고, 반대세력의 형성을 조장한 측면도 부인하기 어렵다.3

대북ㆍ통일정책에서의 탈냉전적 정치세력의 담론주도 내지 통일정책 구

2이념적 갈등에 지역갈등이 중첩된 결과, 광주와 호남지역 주민들의 90.0%가 김 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반면, 부산․경남지역 주민은 약

77.4%가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정도로 정책지지율의 차이가 극심히 드러났다.

한국언론재단, 남북화해시대의 국민적인 과제와 언론의 역할 (서울: 커뮤니케 이션북스, 2000). ‘남남갈등’을 여야갈등, 이념갈등, 지역갈등이 중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고 여당, 진보(또는 개혁), 호남의 삼각동맹과 야당, 보수, 영남의 삼 각동맹이 서로 대치하는 국면으로 파악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우성대, “대북정 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 형성 방안,”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남북정상회담 1 주년 기념 대토론회: 평화협력과 국민대화합 실현을 위한 과제와 방안 (2001.5.30).

3박형중 외, 대북포용정책과 국내정치여건 조성 방안 , pp. 73~74; 6․15 정상 회담 두 달 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71.4%가 대북정책이 국내정치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였다. 중앙일보 , 2000년 8월 14일.

상의 실현 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보수정치세력 간의 갈등은 김대중 정부 에 들어와 더욱 확대․증폭되었고 한층 더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의 확대ㆍ증폭의 배경은 한편으로 김대중 정부의 기반이 기존의 정치세력과 다르다는 점과 그에 따른 보수정치세력의 대북ㆍ통일정책에 대한 강한 견 제이며, 다른 한편 대북관계의 전향적 개선을 위한 정치적 실천이 대중적으 로 커다란 영향을 미쳐 매우 높은 정치적 파고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기본적으로 햇볕정책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는 의욕에서 동북아경제중심국 안을 구상하였다. 초기에 북한핵 위기와 한․

미관계의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 속에서 북ㆍ미간 중재자 역할을 하려했 으나 예상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북핵문제와 남북관계 분리론 도 한ㆍ미관계의 문제를 1차적 기준으로 하고, 결국 ‘남북교류와 협력을 핵문제 전개와 연계’하는 입장으로 변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의 대화와 인도적 수준에서의 지원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에 밝힌 대로 대 북관계를 국내정치에 활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그나마 고수하고 있어 특 별히 커다란 갈등계기를 제공하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대구U대회 직 전의 인공기 훼손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으로 갈등이 표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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