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다양한 성격을 지닌다. 민중주의적 강령으 로서 미국 우선주의는 미국 민중의 이익이 워싱턴의 기득권에 의해서, 또 그 기득권의 전통적인 글로벌리즘(패권정책)에 의해서 훼손되어 왔다 고 주장한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트럼프는 이러한 민중주의적 강령을 대중 유세와 트위터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2016년 대선 과정에 집중해서 보면 미국 우선주의는 트럼프의 정치적 부상과 승리를 가능케 한 정치적 프로그램이고, 그 실체는 앞서 지적된 것처럼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실패, 구체적으로는 중산층의 붕괴와 경제적 양극화를 배경으로 한 경제적 민족주의이고, 둘째는 백인
27) “The Content of Trump’s Speech,” Korean JoongAng Daily, September 25, 2017; “[글로벌 포커스] 트럼프의 유엔 연설, 해야 할 말 한 거다,” 중앙일보, 2017.09.22.
인구의 감소와 맞물리고 테러와 이민, 난민 문제 등에 의해 촉발된 백인 우선주의이며, 셋째는 정치적 양극화와 기존 정치권의 기능부전에 도전 하는 트럼프 우선주의이다.
대외정책의 수사, 언술체계 혹은 담론으로 미국 우선주의를 조명할 수 도 있고, 사실 미국 우선주의라는 호명 자체가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주제 로 한
The New York Times
의 인터뷰 과정에서 탄생하기도 하였다.대외정책 담론으로서 미국 우선주의의 주요한 내용은 아래에서 구체적 으로 살펴보겠지만, 테러(이민과 난민)의 위협, 자유무역을 통한 미국의 경제적 손해, 그리고 명예의 훼손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들은 투키디데스 국제정치 이론의 핵심 요소인 공포와 이익, 명예의 세 가지 요소와 합치한다.28)
가. 불구국가와 미국 우선주의: 뉴욕 타임즈 인터뷰(2016.03.27.)29) 미국 우선주의는 트럼프가 만들어낸 구호가 아니다. 미국의 제2차 세 계대전 참전을 반대하던 반개입주의(이후로는 고립주의로 비판받는) 세 력의 구호가 미국 우선주의였고,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미국 우선주의로 명명한 이는
The New York Times
의 생어(David Sanger) 기자이다.생어는
The New York Times
의 동료 해버먼(Maggie Haberman)과 2016년 3월 26일에 진행한 트럼프와의 전화 인터뷰 말미에 부시 대통령 부자의 대외정책이 아버지 부시(George H. W. Bush)는 전통적인 현실 주의, 아들 부시는 민주주의 확산을 내세운 신보수주의 혹은 ‘변환적 (transformational)’ 국제주의였던 데 반해서,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미28) Richard Ned Lebow, “Fear, Interest and Honour: Outlines of a Theory of International Relations,” International Affairs, vol. 82, no. 3 (2006), pp.
431~448.
29) “Transcript: Donald Trump Expounds on His Policy Views,” The New York Times, March 26, 2016.
국의 적은 물론 미국에 무임승차한다는 이유로 동맹도 불신하는 ‘미국 우선주의’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지적이 맞는지 물었 다. 이에 트럼프는 긍정적으로, 자신은 고립주의자가 아니라 ‘미국 우선 주의자’라고 대답한다. 그 이유는 미국이 나토나 일본, 한국과 같은 동맹 은 물론 중국과 같은 ‘훨씬 영리하고 교활하고 강경한’ 상대에 의해서 ‘수 년간 무시와 조롱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수탈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주류 언론의 대표라 할
The New York Times
가 아직 대선 후보 경선이 완료되지 않은 3월 26일의 시점에서 전화로 트럼프를 인터뷰하 면서 동맹에 대한 그의 불신과 반감에 주목하여 그의 대외정책을 ‘미국 우선주의’로 명명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생어는The New York Times
의 대표적인 국제문제 전문기자로, 미국의 주류 자유주의 적 패권 엘리트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날의 인터뷰는 주류 리버럴 엘리트가 공화당의 선두 주자이지만 아웃 사이더인 트럼프가 과연 기존 패권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얼마나 그 전통을 파괴할 것인지 등을 검토하는, 일종의 엘리트가 아웃 사이더를 시험하는 혹은 ‘면접’하 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적에 대한 대응은 보통 강대국의 과업이고, 적이나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이익에 맞게 국제환경 자체를 조성하고 관리하는 것은 패권국의 과업이다. 이것이 바로 NSC-68이 미국 외교의 목표로 설 정한 것이고, 냉전의 종언 이후 미국 전략가들이 1990년대에 부단히 강 조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동맹은 단순히 공동의 적에 대 항하는 수단이 아니라 미국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조성하는 필수적인 수 단으로 군사력에 못지않은 미국 패권의 ‘전략적 자산’이다.30)
이와 같은 패권의 전통적 논리에서 보면, 동맹을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동맹국의 경제적 부담 사이의 거래, 그것도 일회적인 거래의 대상으로
30) 이혜정, 냉전 이후 미국 패권, pp. 15~88.
보는 트럼프의 시각은 대단히 위험한 반패권적 정책에 다름 아니었다.
해버먼과 생어의 트럼프 인터뷰는 바로 이 문제, 동맹에 집중되었다. 첫 질문도 일본과 한국과의 동맹 이슈로, 일본이나 한국에게 방위비 분담증 액을 요구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거나 이들 의 독자적 핵무장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트럼프의 (해버먼과 생어의 시각 에서) ‘무책임한’ 발언을 따지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의 독자적인 핵무장 허용 여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피하면서, 더 이상 부유하지 않은 미국이 이제는 충분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한국과 일본을 군사적으로 보호하고 있고, 이에 따라 미국의 군사력 자체는 쇠퇴하였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군사적 공 약을 못 믿으면 독자적 핵무장을 추진한다는, 즉, 미국의 공약을 확고히 해서 이들을 미국의 동맹으로 묶어놓는 것이 패권의 정석이라는 질문에 도 트럼프는 동요하지 않았다. 미국과 상관없이 그럴 날이 올 수 있다고 핵 터부를 깨면서 트럼프는 “미국이 전 세계의 경찰국가가 될 수는 없다”
고 지적했다. 이 발언은 비록 현재가 아니라 ‘언젠가는(at some point)’
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대단히 ‘이단적’이었다. 전 지구적, 심 지어는 우주적 군사력 투사능력을 통해서 공해에서부터 사이버 공간과 우주공간까지 모든 공간적 영역에서 그 어떤 경쟁 상대의 도전도 허용하 지 않는 것이 냉전 이후 미국 패권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동맹에 대한, 그리고 경찰국가로서의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공약이 패 권국가 미국 신뢰성의 기반이었다. 그런데 부동산업자 트럼프는 판을 깰 수도 있다는 위협, 예측불가능성을 협상의 기술로 찬양해왔고, 대선 후 보 트럼프는 구체적인 전략은 없이 예측불가능성을 대외정책에도 적용 하려 했다. 해버먼과 생어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 다. 메르켈(Angela D. Merkel) 수상의 휴대폰까지 도청하는 첩보수집 의 대안에 대한 질문이나 구체적인 중동, 이슬람국가 정책에 대해서 트럼 프는 일관되게 오바마의 공개적인 사과나 정책 천명을 비판하며 그런 예
측가능성 자체가 미국 외교를 실패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나토가 낡았 다는 주장이나 부유한 사우디아라비아를 왜 보호해야 하냐는 주장에 겹 쳐진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는 기존 동맹에 대한 공약의 경우에도 예측가 능성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기존 패권의 전통과 정통의 전면적 부정이었다.
중국 문제 역시 패권의 전통과 트럼프의 이단을 나누는 중요한 이슈였 다. 주류 패권 엘리트의 시각에서도 중국은 엄청난 도전이다. 하지만 이 도전은 정치, 경제, 이념 등의 다양한 차원의 문제가 얽힌 복합적인 것이 다. 경제적으로만 보아도 무역 역조나 일자리 문제와 같은 중상주의적인 도전 뿐 아니라 중국의 취약성으로 인한 세계경제 성장의 둔화나 중국발 세계금융위기의 구조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에게 중국은 정부보조금과 환율조작으로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 최 악의 불공정한 경쟁자일 뿐이다. 생어가 최근 중국의 경제 성장 둔화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생각을 묻자, 트럼프는 미국이 중국처럼 7% 대 성 장이면 최고의 호황일 것이라고 일축했다. 생어의 미국은 패권 국가이지 만, 트럼프의 미국은 공식 실업률 5%는 완전한 날조이고 실제 실업률은 20%에 달하는, 중국에게 일자리를 빼앗기고 존경은커녕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불구국가’ 미국이기 때문이다.31)
그럼 대체 미국이 언제 위대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레 이건을 존경하지만 그 때도 무역정책은 잘못되었으니 그리 위대하지 않 았다는 대답에, 그럼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나 트루먼 (Harry S. Truman), 아니면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시절이 냐는 역사적 탐문이 뒤따랐고, 트럼프의 대답은 그보다 훨씬 이전 19세 기 말에 미국은 정말 경제적으로 강력한 성장을 이루었고 이를 기초로
31) Donald J. Trump, Crippled America: How to Make America Great Again (New York: Theshold Editions, 2015), pp. 77~88.
1940~1950년대에는 정말 미국이 전 세계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이었 다. 이에 대해 생어는 다시 냉전 초기는 핵의 공포가 대단했고, 특히 맥아 더는 한국전쟁 기간에 핵 공격을 주창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 게 생각하느냐고 ‘집요하게’ 마치 선생이 학생을 시험하듯 물었다. 최후 의 수단으로 핵 공격을 언급한 것이 아니냐고 역사적 무지를 드러내다가 트럼프는 어찌되었든 핵 카드를 이기기 위해서 쓴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박하고는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언론의 취재 열기는 미친 것 이며 그 행태는 대단히 불공정하다고 불평했다. 그리고는 다시 예의, 체 계 없이 이슈에서 이슈로 전환하는 특유의 논법으로 중국의 불공정한 대 미 정책을 비판하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나.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국익센터 연설(2016.04.27.)32)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The New York Times
와의 인터뷰(2016.03.27.) 에서 미국 우선주의로 명명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국익센터(The Center for National Interest)에서의 연설에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 의의 기치 아래 자신의 대외정책을 소개했다. 미국 우선주의가 집권 이후 자신이 이끌 행정부의 주요한 지침(the major and overriding theme) 이라고 천명하고는 그는 냉전 이후의 미국 대외정책, 특히 오바마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주류 엘리트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 패권은 냉전 이후에야 비로소 지구 적 차원에서, 그리고 단순히 반공의 상대적, 대결적 이념이 아니라 경제 적 지구화나 인권 등 보편적 원칙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의 대외정책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비록 패권의 모순이나 위선에서 자유 롭지는 않지만, 전임 부시 행정부의 이념적, 전략적 과잉을 최대한 교정
32) “Transcript: Donald Trump’s Foreign Policy Speech,” The New York Times, April 27,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