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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미사일 능력 발전을 위한 첨단상용기술 활용 가능성

무기체계의 발전 속도는 그 시대의 과학기술 발전 속도에 비례한다.

같은 이치로 어느 국가의 핵전력(능력, 태세) 발전 속도는 그 나라가 보유한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에 비례한다. 이 두 명제는 과학기술이라 고 하는 공통된 핵심용어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당 시,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이 중에는 최 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핵공격을 받았던 일본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 킨 독일, 그리고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핵개발에 성공하고 여전히 핵 강대국으로 남아있는 러시아(구소련)가 포함된다. 이들 국가들의 공통 점은 당시에 과학기술이 발달되었었다고 하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국가들을 포함하여 현재의 핵보유국들의 공통점도 과학기술이 발달된 국가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결정한 여러 요인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을 찾으라고 하면 당연히 핵무기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보다 독일이나 일본 또는 소련이 먼저 핵을 보유하였 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핵을 개발한 국가들과 개발 조건이 다르다. 오히려 뒤늦게 시작한 중국이나 인도, 파키스탄에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과학기술이 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주요 강대국인 미국, 소련, 독일, 일본, 영 국,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산업기술의 영향과 함께 과학기술이 상대적으 로 발달되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핵무기 개발 진입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뒤늦게 핵무기를 개발한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과학기술 수준이 높지 않다가 1950년대 이후 핵개발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먼저 핵을 개발한 국가에 비 해서 핵무기 개발과 소형화에 걸린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이 어느 정도 공개된 뒤였기 때문에 시간 단축이 가능했던 것이다.

북한도 중국보다는 늦어졌지만 1950년대부터 관심을 갖고 꾸준히 핵개발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핵무기 운반수단 인 탄도미사일의 개발속도에 비해 핵개발 속도는 더딘 편이다. 탄도미 사일 기술은 대체로 중국과 구소련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거나 역설 계 등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었던 반면, 핵 관련 기술의 개발이 늦어진 것은 1970년대에 이미 핵 비확산에 관심을 갖던 핵보유국들의 기술유 출 방지로 인해 핵기술의 습득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 된다. 그래도 북한은 영국의 칼더 홀 흑연감속로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자체기술로 5MWe 흑연감속로를 제작하여 플루토늄의 추출까지 성공 하고 세 차례나 핵실험을 하는 등 핵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노 력은 플루토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우라늄 농축에 있어서도 결실을 맺게 되었다. 북한은 알려진 것만 2,000기가 넘는 원심분리기를 영변 핵시설 단지에 설치하였다. 또한, 2010년 5월에 발표한 것처럼 북한식의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보도51하는 등 외부의 도움이 차단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핵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얻은 자신감이 결국 영변의 실험용 경수로 건설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51_“열핵반응장치가 설계·제작되고 핵융합반응과 관련한 기초연구가 끝났으며, 열핵기

술을 우리 힘으로 완성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과학 기술 역량이 마련되었다,” 󰡔로동 신문󰡕, 2010년 5월 12일.

가. 기술적 도약이 우라늄 농축과 핵전력 증강에 미친 영향

중국의 핵개발 사례를 살펴보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핵전 력의 꾸준한 증가가 있어 왔다. 1960년대 최초 핵실험 이후에 수소폭 탄 핵실험까지 걸린 기간이 불과 2년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핵 능력의 고도화에 이르렀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 후의 핵탄두의 소형경량화의 진척, 다탄두화(MRV, MIRV), 그리고 정밀유도기술(MaRV)의 개발은 오랜 시간 동안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경제성장과 함께 외부 기술의 유입 이 증가하고 ‘세계의 공장화’라고 불릴 정도로 제조업이 발달하며 자연 스럽게 핵과 미사일에 사용되는 첨단기술도 향상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미국의 콕스 리포트(Cox Report)52에서 지적한 것처럼, 해킹 등을 통해 꾸준히 미국과 같은 선진 핵보유국의 기술을 획득하려 노력하였고, 일각에서는 중국이 그러한 기술을 입수하여 자국의 핵개 발에 활용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물론, 중국은 음모론이라 치부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주장을 불식시키기에는 중 국의 핵과 미사일 기술이 너무나 단기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52_미국과 중국의 군사·경제문제에 관한 특별위원회 보고서로서, 1980년대로부터 1990년 대에 걸친 미국 내에서의 비밀활동에 관한 보고서이다. 크리스 콕스(Christopher

Cox, 캘리포니아 공화당 하원의원) 의장의 이름이 보고서에 사용되었다. 핵탄두가

탑재된 대륙 간 탄도미사일 및 WMD 제조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정보가 중국에 넘어갔는지 여부에 대한 조사보고서이다. 주요 주장 5가지는 다음과 같다. ➀ 중국은 미국의 일곱 가지 최신 열핵무기 관련 설계정보를 훔쳤다, ➁ 훔친 비밀사항은 중국 의 핵무기 설계·개발·시험 속도증가에 기여했다, ➂ 중국의 차세대 핵무기는 훔친 미국의 설계정보요소를 포함하며, 미국이 사용하는 핵무기에 유효성면에서 필적하 는 수준이다, ➃ 훔친 미국의 정보를 이용한 소형 탄두는 2002년에 배비 준비가 완료 되었고, 차세대 미사일에 다탄두미사일 기술을 결합할 수 있다, ➄ 이러한 도난은 독립된 사건이 아닌 중국 국가안전부에 의한 미국 무기연구소들에 대한 수십 년의 첩보활동의 결과이다. 또한 새로운 대책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위법한 활동은 계속되 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결국 중국 내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간 외부의 산업 기술과 해킹 등을 통해 군사기술의 도약을 이루었기에 가능하였을 것 으로 예상된다. 또한, 중국이 해외에 매년 내보내는 유학생들이 습득한 선진 과학기술이 이러한 기술적 도약에 한몫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일견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떠한 경로를 이용하여 핵과 미사일 관련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을 알아내는 노력은 북한의 향후 핵과 미사일 개발을 차단하거나 지연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 할 수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시 작되었다고 하는 증거와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주로 소련에 핵 과학자를 파견하거나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 지만, 1970년대 NPT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북한이 관련 기술을 소련으로부터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관계는 냉전이라는 구도 속에서도 국제조약의 틀을 넘어 선 기술적 원조까지도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 라도 핵 비확산을 둘러싼 핵강대국들의 기조 변화 속에서 북한이 과거 만큼 원활히 소련이나 중국으로부터 기술적 도움을 계속해서 받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냉전의 종식은 북한에게 소련의 핵과 미사일 과학자를 영입 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와 함께 많은 소련의 핵과 미사일 관련 과학자들이 북한으 로 넘어가다가 적발되는 사례가 있었다.53 적발된 것 이외에 적발되지

53_“모스크바 라디오 방송은 러시아가 러시아의 미사일, 우주과학 전문가들을 북한으로

유치하려던 북한 측의 시도를 저지시키고 북한의 관계 외교관 1명을 추방했다고 15일 보도,” 󰡔연합뉴스󰡕, 1999년 11월 17일.

않고 건너간 과학자들이 더 많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54 또한, 당시 분실된 핵탄두 및 각종 무기류들이 북소 간의 육지로 연 결된 국경을 넘어서 북한에 수출되거나 밀반입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2012년과 2013년에 퍼레이드에서 보여 준 북한의 핵배낭 은 당시 소련에서 분실된 수많은 핵배낭의 일부일 가능성도 있다.55 왜냐하면 현재 북한의 핵 능력을 고려했을 때 그 정도로 소형화된 핵 탄두를 제조할 가능성도 낮거니와 퍼레이드에서 전시된 수량의 핵탄 두를 제조할 만큼의 핵물질을 보유했을 가능성도 매우 낮기 때문이다.

다른 핵보유국과 달리 북한은 제1차 핵 위기가 고조된 1990년대 초 이전부터 국제사회로부터 핵확산의 주범으로 관심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 원하는 핵과 미사일 기술을 해외에서 들여오는 것이 그 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북한의 불법 무기 거래가 국제사회의 초미 의 관심사가 된 것도 그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스커드와 노동 미사 일을 자체 기술로 개발한 북한이 중동의 불량국가나 테러리스트들에 게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수출하면서부터 북한은 자국으로부터의 불법 무기 수출뿐만 아니라, 북한으로의 불법 무기 및 민감한 기술이 유입되는 것에도 일정부분 제약을 받게 된 것이다.

북한이 해외로부터 핵과 미사일 기술을 도입한 경로는 1990년대 초 소련의 핵과 미사일 과학자를 영입한 것 이외에 파키스탄의 압둘 칸

(Abdul Qadeer Khan) 박사를 통한 우라늄 농축 기술의 확보가 대표

54_“러시아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개발과 수출, 발사실험에 대해 반대하고 있지만 옛

소련지역의 과학자들이 북한의 미사일개발에 참여하고 있다고 자유아시아방송 (RFA)이 보도,” 󰡔연합뉴스󰡕, 1999년 4월 3일.

55_“1990년대 소련에서는 정권붕괴가 임박해지자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등

에 배치했던 소련의 전술 및 전략핵무기(SS-18, SS-19, SS-24, SS-25) 가운데 80 내지 100여 기가 무정부 상태 속에서 분실되거나 도난당했다,” 󰡔뉴데일리󰡕, 2014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