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성과 표현 기법에 반영된 형상화의 방식
2.3. 설명과 이해를 위한 표현 장치
2.3.1. 傳述과 變用
도학자들에게 있어서 문학의 목적은 載道와 敎化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 성하기 위해서는 도학자들은 언어의 彫琢을 통해 표현을 세련되게 다듬기보다 는 도학의 이념이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朱子 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道를 밝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성인의 말은 평탄하고 쉬워 명확해야 한다335)고 하여 문학 표현의 평이함과 명확함을 강조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載道와 敎化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이러한 창작 태도는 시조 창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도학자들은 도학의 이치와 깨달음을 명확하게 傳言하기 위해서 새로운 의미 를 창작하기보다는 그들이 신봉했던 유교 경전에 의거하여 詩意를 구현하는 述 而不作의 원리를 따랐다. 述而不作은 傳述하며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는 않는 다336)는 뜻으로, 孔子가 五經을 편찬할 때 표명한 편찬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즉 孔子 자신은 上古 시대 聖人의 글을 傳하여 敍述하였을 뿐 새로운 학문을 창시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述而不作의 원리를 답습했던 시조 작가로는 周世鵬을 들 수 있다.
그는 <五倫歌>를 비롯하여 <學而歌>, <浴沂歌>, <動察歌> 등 유교 경전의 이념에 기반한 시조를 다수 지었는데, 그의 시조 창작 방식은 작자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337) ‘述而不作’이라는 儒家의 보편적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았 다. 유교 경전 中庸·論語·孟子에 담긴 이치 또는 聖賢의 고사를 그대로 옮겨와 시상을 전개하고 있을 뿐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말로 노래를 지은 것이 아니라, 聖賢의 격언을 飜出해서 祖述하는 데 역 점을 두어 그들의 要旨로 노랫말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유교 경전이 갖는 공신 력에 기대어 노래의 순정성을 회복하고, 노래를 듣고 부르는 선비들이 그런 정 신적 감화 속에서 본연의 性情에 귀결되기를 바랐던 것338)으로 볼 수 있다.
335) 朱子語類 卷139. “聖人之言, 坦易明白. 因言以明道, 正欲使天下後世由此求之.”
336) 論語, 「述而」. “述而不作, 信而好告, 竊比於我老彭.”
337) 武陵雜稿 卷6, <答黃學正仲擧書>. “如僕之歌, 皆述而不作. 雖若涉於自爲, 而實出乎聖賢至善至約 之要旨.”
338) 길진숙, 조선전기 시가예술론의 형성과 전개, 소명, 2002, 211면 참조.
호고 닛디 마애 먼벋 즐거오니 내게 옷 이시면 미아 아나마나 富貴浮雲티 보고 曲肱而枕오
<學而歌>
받 가뎌 하라바 問津늘 웃지 마라 사미 외여서 鳥獸벋것
매 닛디 몯여 오락가락 노라
<問津歌>
<學而歌>는 유교 경전인 論語에서 격언을 발췌하여 우리말로 옮겨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데, 속세의 부귀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만 탐닉하는 즐거움을 노 래하고 있다. 초장은 論語 學而 의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 亦樂乎.”, 중장은 “不患人知不知己, 患不知人也”, 종장은 論語 述而 의 “不義 而, 富且貴, 於我, 如浮雲.”과 學而 의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를 우리말로 飜出하여 노랫말로 구성하였다. 경전을 작자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 신의 목소리를 내보려는 시도 없이, 聖賢의 가르침을 온전히 傳言하고 있을 뿐 이다.
이와 달리 <問津歌>는 論語 微子 의 고사를 서사적으로 압축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초장과 중장은 論語에 있는 孔子와 長沮·桀溺 사이의 고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 詩意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 해서는 먼저 論語 微子 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孔子가 楚나라의 葉땅을 떠나 蔡나라로 가고 있었는데, 陳나라와 蔡나라의 大 夫들이 그를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피하여 샛길로 가다가 길을 잃었다. 孔 子는 밭일을 하고 있는 長沮와 桀溺을 보고는 子路를 시켜 나루터가 어디 있는 지 물어보도록 하였다. 子路가 長沮에게 다가가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묻자, 長 沮는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子路가 孔子라고 말하자, 長沮 는 孔子라면 나루터가 있는 곳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가르쳐 주지 않 았다. 子路는 다시 桀溺에게 물었다. 桀溺은 子路가 孔子의 제자임을 알고서
“온 세상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거늘 누구와 함께 그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인사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하는 인사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말한 뒤에 밭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子路가 돌아와 그들의 말을 아뢰니, 孔子는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으니, 내가 이 세상 사람 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천하에 道가 행해지고 있다 면 내가 바꾸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탄식하였다.339) 결국 長沮와 桀溺은 孔子에게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데도 왜 은거하지 않고 뜻을 펴기 위해 天下를 周流하느냐는 뜻으로 빈정대면서 나루터를 가르쳐 주지 않았고, 孔子는 이들의 말을 비판하여 사람으로 태어나서 은거하여 鳥獸와 벗하며 살 수는 없 으니 세상에 나아가 道를 구현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초장과 중장 은 작자가 孔子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하여 그 뜻을 압축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종장에서 작자는 이러한 孔子의 견해를 敬承하여 마음에 이어나가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세태를 개탄하였다. 다시 말해, 학자들로 하 여금 세상의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 治人에 힘쓸 것을 闡明한 것이다.340)
高應陟 역시 유교 경전의 이념과 자득한 깨달음을 시조로 지으면서, 載道와 敎化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述而不作의 원리를 따랐다. <鳶魚曲>을 예로 들 어보면, 경전 中庸의 이념을 그대로 傳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티미러 도라보니 짓 도텨 노피다鳶飛
리미어 펴보니 비 도텨 논니魚躍 우리도 그 이 낫거니 아니 놀고 엇뎌료
<鳶魚曲>
이 시조는 ‘鳶飛魚躍’의 典故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만물이 저마다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천지도 조화를 이루게 되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노래한 작품이다. 초·중장에서 하늘을 쳐다보니 솔개는 날갯짓하며 높이 날고 있고, 아래를 살펴보니 물고기는 물속에서 노닐고 있다고 노래하였다. 특히 ‘짓
339) 論語, 「微子」. “長沮桀溺耦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爲誰.’ 子路曰, ‘爲孔 丘.’ 曰, ‘是魯·孔丘與.’ 曰, ‘是也.’ 曰, ‘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 ‘爲仲由.’ 曰, ‘是 魯·孔丘之徒與.’ 對曰, ‘然.’ 曰, ‘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 豈若從辟世 之士哉.’ 耰而不輟. 子路行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 不與易也.’”
340) 高應陟은 이 시조 작품과 동일한 詩意를 <鳥獸不可同羣賦>를 통해 표출하였다.
도텨’, ‘비도텨’와 같은 우리말 수식 어구를 통해 솔개와 물고기의 모습이 생 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솔개와 물고기로 대표되는, 천지의 만물 이 모두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조화롭게 사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도 함께 즐기 자고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高應陟은 中庸章句 第12章에 있는 詩經 의 시구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순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솔개는 날아서 하늘 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는 中庸의 道가 위아래 에 잘 드러난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中庸의 道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크다 고 할 수 있지만, 또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작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中庸의 道가 온 우주의 섭리를 포괄하는 반면, 이 세상의 가장 작은 사물 속에도 깃들 어 있기 때문이다. 高應陟은 이와 같이 우주생명의 섭리 속에서 깨달은 이치인 中庸의 道를 설명하기 위하여 中庸의 ‘鳶魚’章을 그대로 가져다가 시조를 지 었던 것이다. 경전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작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려는 시도 없이 경전의 내용에 의거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傳述하고 있을 뿐 이다.
그러나 高應陟은 경전 大學의 이치를 傳述하면서도 작자 나름의 變用을 시 도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述而不作’의 보편적 원리를 수용하면서 작가적 개성을 반영한, 즉 ‘述而作’에 가까운 모습으로 시조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도학적 이념에서 벗어난 글을 함부로 지었다는 것은 아니다. 경 전에 의거하여 시조를 지었지만, 작시원리의 측면에서는 前代의 시조 창작에 나 타난 관습적 어법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 그것과 구별될 수 있는 變奏를 보이 고 있다.
瞻彼淇隩니 빋날 有斐君子ㅣ
切하고 磋텃니 모 일니 므어시며格物知至 琢고 磨텃니 허믈을 몯보로다意誠 心正身修
며 親賢樂利거아 綠竹興도 낟브도다
<君子曲>
이 시조는 기본적으로 儒家에서 추구하는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인 君子의 모 습을 설명하기 위해 大學에 있는 ‘至於止善’章의 내용을 가져다가 시조로 노
래하였다. 초장과 중장을 보면, “저기 淇水의 모퉁이를 보니 빛나는 것은 문채 가 뛰어난 君子, 切磋하니 모를 일이 무엇이며 琢磨하니 허물을 찾을 수 없구 나.”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은 大學章句 傳3章에 인용되어 있는 詩經
<淇澳>시341)의 시구를 그대로 차용하여 切磋琢磨하여 높은 덕을 갖추게 된 君 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變用과 관련하여 여기서 주목할 점은 原 詩의 시구를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綠竹猗猗’ 부분을 생략한 채 시상을 전개하 고 있다는 것이다. 즉, 原詩에서는 ‘淇水 모퉁이를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 하다’라고 했지만, 시조의 초장에서는 ‘淇水 모퉁이를 바라보니 빛나는 것은 문 채 나는 君子’라고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原詩에서는 푸른 대나무를 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시조에서는 바로 문채 나는 君子를 본 것으로 변용되어 있는 것이 다. 중장에서는 切磋하면 모르는 것이 없게 되고, 琢磨하면 허물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모르는 것이 없고’, ‘허물이 없는’ 상태는 切磋琢磨했을 때 군자가 갖추 게 되는 모습인 것이다. 즉 ‘切磋’는 학문하는 방법으로써 格物致知로 연결되어 지적으로 모르는 것이 없게 되고, ‘琢磨’는 스스로 행실을 닦는[自修] 것, 곧 誠 意, 正心, 修身으로 연결되어 허물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종장에서 는 하물며 切磋琢磨한 君子가 親賢樂利하니 푸른 대나무에서 얻은 흥취도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노래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다시 大學章句 傳3章에 인용되어 있는 詩經 <烈文>의 시구 ‘親賢樂利’와 <淇澳>시의 ‘綠竹興’이라는 두 시구 를 결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親賢樂利’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切磋琢 磨하여 높은 덕을 쌓은 君子는 현명한 이를 현명한 이로 모시고 친한 이를 친 근히 하며, 백성들은 즐거운 것을 즐기고 이익이 되는 것을 이익으로 취하게 되 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덕을 잊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고, ‘綠竹興’은 푸른 대나무의 흥취, 곧 대나무의 무성함을 통해 武王이 훌륭한 덕을 성취한 것을 기 린 일을 가리킨다. 이러한 뜻을 가진 두 시구를 활용하여 작자가 의도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냈다. 즉, 君子가 切磋琢磨하고도 또 親賢樂利까지 하니 푸른 대 나무에서 얻은 흥취, 즉 武王이 훌륭한 덕을 성취한 것도 덕을 쌓은 君子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노래한 것이다.
결국 君子는 학문을 講磨하고 자신을 수양하여 언제나 자신의 明德을 밝히고 있어야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341) 詩經, <淇澳>. “瞻彼淇澳, 綠竹猗猗. 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