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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대한 태도 표명과 假託

2. 賦의 이념 지향과 진술 양상

2.3. 세상에 대한 태도 표명과 假託

高應陟은 과거를 통해 立身揚名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일찍부터 과거 공 부를 그만 두고 유교 경전에 담긴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권유로 과거 공부를 시작하여,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이듬해에 咸興敎授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후 懷德縣監, 臨陂縣令, 咸陽郡守 등의 외 직을 주로 맡았고, 또 尙州提督, 安東提督, 成均館 司成과 같이 교육을 감독·장 려하기 위한 직책도 맡았다. 평생 동안 정치적으로 큰 부침을 겪지는 않았지만, 관직 생활 중에 遞職, 彈劾과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出處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고민과 갈등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賦를 통해 표출하였다.

그런데 高應陟은 出處의 문제를 賦로 지을 때 주로 假託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假託은 비유의 일종으로, 작자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여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탁하여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표현기교를 말한다. 유학자들 은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詩經의 내용을 그들의 사상과 접목하여 교 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比·興이고, 달리 표현하면 假託인 것이다.240)

우선 出의 문제와 관련해서 <聖賢不關門賦>에 나타난 高應陟의 견해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 중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賦 작품 과 달리 창작동기를 알 수 있는 발문이 부기되어 있다.

선생이 陣地에 나아가 紀效新書를 가르치고자 했으나, 제자가 諫하기를 선생이 직접 가서 가르치는 예는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개탄하여 이르기를 “예로부터 門 을 닫고 세상에 나오지 않은 성현이 어디 있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붓을 잡고 이 賦를 지었다.241)

高應陟은 임진왜란 당시 진지로 직접 나아가 중국 明나라의 병법서인 紀效 新書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직접 가서 예를 가르친 적은 예로부 터 없었다고 하여 문하생이 만류하자, 예로부터 이러한 상황에서 杜門不出했던 성현이 어디 있느냐며 탄식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작자는 혼란한 시대

240) 김성수, 앞의 책, 83면.

241) 杜谷集 卷2, <聖賢不關門賦>에 “先生欲往諸陣, 敎紀效新書, 門下人諫以無往敎之禮. 先生嘆曰,

‘自古, 豈有關門聖賢.’ 仍令執筆書此賦.”라는 발문이 부기되어 있다.

상황 속에서 聖人과 賢人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늘이 스스로 다스릴 수 없으면 天不能以自制

반드시 성인에게 권세를 빌려주고 必假乎於聖權

총명한 덕을 주어서 錫聰明之懿德

하늘을 대신하여 베풀게 하였도다. 俾代天而承宣 강경함을 없애고 순함으로 돌아가게 하여 鋤强梗以歸順 외로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풀어 생기있게 하였네. 濟惸獨而惠鮮

성인도 홀로 다스릴 수 없으면 聖不能以獨治

여러 현인들로 하여금 先後를 정하게 하였네. 命羣賢而後先

天祿을 받고 天職을 함께 하여 食天祿兮共天職

임금과 신하가 뜻을 모아 주선하면 魚水一堂而周旋 백성들은 기름진 혜택을 많이 입게 되니 生民沐其膏澤 나라의 명맥은 그로 인하여 번성하도다. 國脉以之瓜綿 이것이 하늘이 성현을 낳은 본뜻이니 是天生聖賢之本意

어찌 자연에서 은거하겠는가. 烏可使杜門於林泉

성인은 하늘에게서 받은 권세와 총명함으로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구제하여 야 하고, 현인은 성인 대신 일의 선후를 정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백 성들이 많은 혜택을 입고 나라의 명맥이 그로 인해 번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聖賢의 역할인 것이다. 따라서 聖賢들은 자연에서 은거하지 말고,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재주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세상으로 나와 훌륭한 업적을 쌓은 인물들의 典故를 들어 세상으로 나와 하늘에게서 받은 재주를 발휘해야 하는 당위적 이유를 설명한다. 論語,

孟子, 史記 등에 있는 典故를 통해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假 託이라고 볼 수 있다.

舜임금은 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舜衡門於歷山

九男의 섬김을 받아들였으니 應九男之廣延

사방의 문과 성곽을 열어 闢四門而郭

바람이 땅 끝까지 통하는 것과 같았네. 如致風動於入埏 禹임금은 치수할 때 4년 동안 손발이 부르텄고 禹胼胝於四載

집 앞을 지나도 들어가지 못했네. 過家門而不前 孔子는 세상을 돌아다니느라 자리가 데워질 겨를이 없었고 孔不暇於席暖 쓸데없는 조롱박 신세를 부끄럽게 여기셨네. 恥匏瓜之徒懸 孟子는 밥을 얻어먹는 것을 사양하지 않았도다 孟不辭於傳食

따라오는 제자가 많은데도. 擁後車之數千

伊尹은 湯임금의 초청에 번연히 나아갔으며 伊翻然於湯幣 呂尙은 낚시를 거두고 文王의 신하가 되었네. 呂收釣於文佃

舜임금은 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堯임금의 禪讓을 받았다. 堯임금에게는 9남 2 녀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하인과 소, 양, 곡물 창고까지 마련하여 舜의 농가에서 섬기게 하니 천하의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禹임금은 백성들을 위해 홍수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는데, 龍門을 굴착할 때 손발이 부르틀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였다. 또 30세가 될 때까지 혼인을 하지 못하다가 우연히 ‘女嬌’라는 여인을 만나 혼인을 하고도 10년 동안이나 집에 들르지 못했다고 한다. 孔子는 세상에 道를 행하기 위해 늘 분주히 천하를 돌아다니느라고 한곳에 머무를 겨 를이 없었기 때문에, 孔子가 앉은 자리는 데워질 겨를이 없었다. 또 孔子는 晉나 라 中牟宰 佛肹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가려고 할 때에, 子路가 不善한 사람에겐 왜 가시려 하느냐고 묻자, 孔子는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 신세로 있을 수 없다는 답을 하였다. 孟子는 “뒤에 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이며, 從者 수백 명을 거느리 고 諸侯王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라는 彭更의 물음 에 “그 道가 아니라면 한 그릇의 밥이라도 남에게 받아서는 안 되지만, 만일 그 道라면 舜임금은 堯임금의 天下를 받으시되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 대는 이것을 지나치다고 여기는가?”라고 답하였다. 伊尹은 湯임금이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초빙하자 번연히 마음을 바꾸고 세상으로 나아갔다. 呂尙은 위수에 서 낚시하며 등용되기를 기다린 끝에 文王을 만나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舜임금과 禹임금, 孔子와 孟子, 伊尹과 呂尙은 모두 문을 닫아두지 않고 세상에 나아가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하늘의 뜻을 저버릴 수 없고, 또 동포의 어려운 처지를 소홀히 여길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藏賦>에서도 高應陟의 出處觀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작품은 1582년에 지은 작품으로 그가 예안현감을 제수 받고 지은 것이다. ‘藏’자의 破字를 통해 元亨利 貞이 갈마들며 운행하면서 천지만물이 창성함을 설명함으로써 ‘감춤[藏]’의 중요

성을 밝혔다. 나아가 이러한 자연의 이치처럼 인간사에서도 또한 ‘감춤’이 중요 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보배로움을 감추고서 마침내 상서로운 일을 이루었던 고금의 사례들을 제시하였는데, 傅巖의 들판에 몸을 숨기고 版築의 일을 했던 傅說, 渭水에 몸을 숨기고 낚시질을 하였던 姜太公을 예로 들었다. 傅說은 傅巖 의 들판에 몸을 숨기고 성벽이나 제방을 쌓는 일을 하다가 殷나라 高宗에게 재상으로 발탁되었고, 姜太公은 牧野에 있다가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제후들과 군사를 합하여 紂王의 군사를 이곳에서 대파할 때 도움을 주 었다.

강을 건널 때 배와 노 같았던 濟川舟楫

傅說은 版築했던 언덕에 몸을 감췄고 傅說能藏於版築之崗

牧野에서 八陣法을 쓴 牧野八陣

姜太公은 渭水 가에 몸을 감췄도다. 呂望能藏於渭水之旁

모두 보배를 품고서 잘 감추어 咸懷寶而善藏

마침내 온갖 상서로운 일을 이루었으니 竟致效於百祥 (이것이) 어찌 한갓 내 몸의 편안함 뿐이겠는가. 豈徒一身之康寧 또한 나라를 살지게 하여 오래도록 이어오는 일이로다. 抑亦肥國而線長

이와 대비하여 감추지 못하여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던 漢나라 武帝나 唐 나라 明宗과 같은 사례도 제시하였다. 어리석은 자들은 보배를 품어두지 못하고 길가에 버려두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재앙을 내렸다.

저 어리석은 자들은 알지 못하네 彼昏不知

보배를 길가에 버려둔 것을. 委至寶於路傍

날마다 낭비를 일삼으니 惟日事乎耗費

애석하구나, 나라가 망하고 자신에게 재앙이 내린 것이. 哀國破而身殃 漢나라 武帝는 백성을 부유하게 할 줄 몰라 漢武不知藏富於民

나라를 황폐하게 만들었네. 致四海之榛荒

唐나라 明宗은 검소하지 못해 唐明不能藏身於儉

남쪽으로 피난하는 처량함을 면치 못했네. 未免南來之凄凉

작품 말미에서는 論語 子罕 편에서 孔子가 제자 子貢에게 했던 “나도 역 시 좋은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242)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宦路에 나아가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