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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양상과 저술

16세기 중후반 도학의 학문적 磁場 속에서 살았던 평범한 도학자이자 문학 작가인 高應陟의 작품세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학 작품 창작 의 배경이 되었던 독서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師承 관계를 통해 학문을 도야하지 않고, 독학으로 도학적 깨달음을 自得하고자 했던 高應陟의 학문적 삶 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가 탐독했던 서적은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문집에 산 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오직 大學, 中庸, 論語, 周易 등의 유 교 경전과 性理書에 盡力했음을 알 수 있다.

91) 김학수, 앞의 논문, 79면.

92) 旅軒集 卷8의 <臥遊堂說> 및 <明鏡新堂題詞>을 보면 張顯光과 朴雲 집안의 교유 양상을 확인 할 수 있다.

93) 健齋逸稿 下, <先府君遺事>. “乙未春, 先君患濕病篤, 一日謂孤等曰, ‘玉山張某吾友人也. 吾死之 後, 汝等往從之.’”

94) 旅軒全書 卷1, <年譜>. “先生氣象宏偉, 容止異常. 鄭新堂之子慤, 至盧上舍家見而異之曰, ‘吾平生 未嘗見如此兒, 將爲間世人物.’ 因曰, ‘吾何以贈汝.’, 上舍戱之曰, ‘苟欲相贈, 雖所乘馬可也.’ 鄭公歸卽 送馬, 先生謝還之.”

古今의 抄錄하여 모은 글과 자신이 지은 詩賦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과거 보는 것을 멈춘 채 3년 동안 四書와 五經에 마음을 가라앉혀 연구하고 性理大全에 정 신을 기울여 옛 것을 생각하며 익숙하도록 읽어서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었으며, 천하의 사물과 古今의 모든 글을 모두 大學을 가지고 評論하게 되었다. 심지어 莊周·屈原·韓愈·柳宗元·蘇軾·黃庭堅·李白·杜甫 등 大家의 하늘을 놀 라게 하고 땅을 들썩이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中庸과 大學에 제외되고 배치된다 고 하여 조금도 보지 않았다.95)

이 글은 門人 崔晛이 지은 <杜谷先生言行錄>의 일부분이다. 이 글에서 高應 陟은 과거 시험 준비에 힘을 기울이지 않고, 四書五經이나 性理大全과 같은 유교 경전을 읽으며 道를 自得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崔晛은 그의 독서활동 을 가리켜 四書五經 뿐만 아니라 性理大全을 자세하게 통달하여 手舞足蹈하 였을 정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高應陟이 그만큼 오랜 시간 유교 경전에 沈潛하여 성현의 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高應陟이 탐독 하였던 性理大全은 周敦頤의 <太極圖說>과 邵雍의 <皇極經世書>를 비롯하 여 성리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에 理學의 연원으로 서 공부하는 학자들이 먼저 보아야 할 책96)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高應陟은 四書五經이나 性理大全을 도학의 기본서로 여겨, 그 이치를 깨닫고자 탐독하 였다. 또한 大學의 이치를 통해서 천하의 사물과 古今의 모든 글을 평론하였 다는 언급을 볼 때 高應陟이 四書五經 중에서 大學을 가장 중시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高應陟은 莊子, 屈原, 蘇軾, 黃庭堅, 李白, 杜甫와 같은 문장가들의 글은 아무리 뛰어난 문장이라 하더라도 大學과 中庸에 배치된다고 하여 조금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러한 문장가들의 글에는 大學과 中庸의 道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의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문 장가들은 文을 통해 道를 담아내려고 했다기보다는 문장의 기교나 화려한 수사 에만 치중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 도 확인된다.

95) 杜谷集 卷6, <杜谷先生言行錄>. “盡焚古今抄集及所製詩賦, 停赴擧三年沈潛乎, 四書五經旁通乎, 性理大全溫故熟讀, 不知手舞而足蹈, 天下事物古今諸書皆以大學評論. 至以莊騷韓柳蘇黃李杜諸家雖驚 天動地, 而外馳於庸學略不經眼.”

9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9-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탐구당, 2003, 309면.

性理學에 관한 여러 서책 이외에 일찍이 詩文에 힘쓰지 않았지만, 재주는 뛰어나 고 뜻은 호탕하여 붓을 들어 휘두르면 문장이 되었다. 문장을 다듬는 데 힘쓰지 않 고 聲律을 구하지 않아도 意致가 통달하고 문장의 기세가 충만하니, 비록 세상에서 문장에 노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일을 하 고 있을 때나 음식을 마주하고 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시켜 붓을 잡게 하고는 입 으로 불러 주기를 거침없이 하였으나, 또한 字句를 수정하지 않았다.97)

위 인용문을 보면, 高應陟은 시문을 짓는 데 힘쓰지는 않았지만 시문을 짓게 되면 자구나 문장을 다듬거나 성률을 맞추지 않아도 意致가 통달하고 문장의 기세가 충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문장력이 뛰어났다는 설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문장의 기교나 화려한 수사는 부족하더라도 儒家의 뜻[道]

을 잘 드러낸 시문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의문시되는 부분은 문장의 형식미를 중시하는 변려문을 반대하고 고 문운동을 주창하였던 韓愈와 이를 지지했던 柳宗元의 글도 읽으려 하지 않았다 는 점이다. 이것은 高應陟이 朱子學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朱 子는 일찍이 韓愈의 학문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韓愈가 文과 道의 관계에 있어서 道를 중시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글을 읽어보면 아첨하고 희롱하거 나 기꺼워하며 방탕, 허랑하여 실속없는 데서 나온 것이 스스로 적지 않다고 비 판하였던 것이다.98) 예전에 둘째형이 항상 韓愈의 글을 誦讀하면서 그에게 읽기 를 권했을 때 高應陟이 “聖賢의 글이 있거늘 하필 韓愈의 글을 읽으며 학문을 하여 그릇되게 공부를 허비하리오.”99)라고 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柳宗元 역시 文을 성인의 道를 전하는 도구로 보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 道는 文辭를 빌리지 않고서는 밝혀질 수 없다100)고 하여 문장의 기교를 더욱 중시하고 道를 드러내는 데에는 소홀했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高應陟은 柳宗 元의 글을 읽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97) 杜谷集 卷6, <杜谷先生言行錄>. “性理諸書之外, 未嘗從事詞翰, 而才高意豪, 落筆成章. 不事彫琢 不求聲律而意致通達, 馳驚汪洋, 雖世之老於文詞者, 亦無以尙之. 至於執事之時, 對食之頃, 令人握管口 授如流亦不點竄.”

98) 朱子大全 卷17, <讀唐志>.

99) 杜谷集 卷6, <杜谷先生言行錄>. “仲氏常誦韓文亦以勸公. 公曰, ‘自有聖賢書, 何必學韓枉費工夫.’”

100) 柳宗元集, <報崔黯秀才論爲文書>. “然聖人之言, 期以明道, 學者務求諸道而遺其辭. 辭之傳於世 者, 必由於書, 道假辭而明, 辭假書以傳.”

이처럼 高應陟은 경전의 탐구를 우선시하며 그 이치와 깨달음을 얻는 데에 盡力하였다. 특히 그는 四書 중에서도 大學을 入道의 첫 번째 순서로 삼고,

論語, 孟子, 中庸을 차례로 읽어서 六經에 통달했다. 또 경전의 이치를 窮 究하여 마음속에서 도리를 깨닫는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삼았다.101) 따라서 高 應陟이 탐독했던 유교 경전의 내용이 문학 활동의 기저에 놓인다는 점을 고려 하면서 그의 독서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독서 양상은 크 게 네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 高應陟은 大學을 탐독하여 修己治人의 방법을 體得하고자 하였다. 그는

大學을 읽기 시작한 이후, 大學에 담겨 있는 道를 기준으로 독서물을 선택 했고, 또 천하의 사물과 고금의 모든 글을 大學으로 평론하였다. 또 아무리 뛰어난 문장이라 하더라도 大學의 도학적 이념에서 벗어난 글은 읽으려 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도 그는 大學의 講學을 그치지 않았고, 특히 格 物致知와 誠意正心을 깨닫고자 노력하였다.102) 格物致知는 ‘知’의 공부이고, 誠 意正心은 ‘行’의 공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明明德을 위한 실천 방법 이다. 예를 들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마땅한 줄 알아야 하고, 그런 생각을 정성스럽게 하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듯이, 格物致知[知]와 誠意正心 [行]을 통해 자신의 明德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타인에게로 확대되면 新民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또 종국에는 至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103)

高應陟은 朱子의 大學章句와 大學或問을 합해 한 책으로 만들어 읽으면 서 그 이치를 깨닫고자 사색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발문을 지어 널리 배포하기 까지 했다. 李後白은 이 발문을 보고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천거하고자 하 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104) 이후 高應陟이 臨陂縣令으로 재직 중에 臺諫의 탄핵 을 받았을 때에도 李後白은 大學의 발문을 지은 高應陟이 그럴 리 없다고 하

101) 杜谷集 卷6, 高騁雲, <祭文>. “遂以大學, 爲入道之序次, 及語孟中庸, 俯而讀, 仰而思, 以達於六 經. 躬行力究, 妙契心得, 爲一生事業.”

102) 杜谷集 卷6, <杜谷先生言行錄>. “仲氏力勸赴擧, 嘉靖辛酉登第. 公猶以爲此非大丈夫事業也. 兩部 庸學講究不輟. 格致誠正之言, 道器費隱之妙, 不絶於口, 辨分毫釐.”

103) 최석기, 「杜谷 高應陟의 大學章句 改訂과 의미」, 한문학보 제4집, 우리한문학회, 2001, 12면 참조.

104) 杜谷集, 卷6, <年譜>. “赴咸興敎授. 以北方不尙文敎, 請修文會堂, 因記之刻大學章句或問合爲一 部, 跋以尾之. 闕後監司李公後白見而嘆曰, ‘此眞眞儒’, 始有薦用之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