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時調를 통한 도학적 삶의 구현 과정
1.3. 현실에 대한 태도와 그 대응 : <唐虞曲>, <浩浩歌>, <陶山歌>
高應陟은 도학의 관점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또 그에 대 한 해결책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士族으로서 도학에 대한 탐구와 이에 대한 깨 달음을 바탕으로 出處의 문제를 결정하고 節義의 문제를 고민하였던 것이다.
즉, 어느 시기에 어떤 상황에서 벼슬에 나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 어떤 義理 의 관점에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날 것인가,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중대한 이념적 가치가 침해당할 때 자신의 신념으로서 義理를 어떻게 지킬 것 인가 하는 문제를 도학자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 였다. 이러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시조로는 <唐虞曲>과 <浩浩歌> 3수를 들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던 高應陟 시조의 작품 세계가 이론적·철학적인 근거로서의 ‘性 理學’과 그 학문방법의 기본원리로서 ‘知行論’과 같은 학문적인 영역을 구현한 것이었다면, 이 절에서 논의될 작품들은 성리학의 철학적 근거를 설정하기 이전 의 義理論的 신념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들이다.
唐虞 라다 오며 三代 그리다 보랴 니갓티 오라건니 이제아 보며 오랴
아리 江山主인 되여 方寸唐虞호리라
<唐虞曲>
이 시조를 보면, 작자는 태평성대인 堯舜 시절을 그리워해 보지만 그런 시절
281) 杜谷集 卷5. “日用事物, 所謂有也. 當然之理, 所謂無也. 以父子有親言之, 父子, 物也, 所當親者, 理也. 故引而伸之, 於萬事皆然. 有物必有則, 是一也. 異端欲觀道於物外, 俗儒欲舍道而逐物, 是二而已.
故云.”
이 당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체념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차라리 자연 에 은거하여 ‘江山主人’이 되어 마음속으로라도 태평성대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 래하였다. 초·중장에서 현실 세계를 ‘唐虞’, ‘三代’와 같은 이상세계로 만들어나가 고 싶었지만, 현세에서는 이룰 수 없는 좌절감을 표출하였다. 작자는 관직에 나 아갔을 때뿐만 아니라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에도 현실 세계의 부조리함을 바꿔보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실세계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江山 에 은거하여 수양을 통해 ‘마음속의’ 태평성대를 이루리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 이다. 이는 出處의 갈등을 드러낸 賦 작품들이 결국에는 ‘수양’의 문제로 귀결되 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浩浩歌>는 宋나라 때의 문인인 馬存의 <浩浩歌>를 번역하여 시조로 지은 것으로, 세상의 작은 이익에도 구애받지 않고 호탕하게 살겠다는 뜻을 노 래한 작품이다.282) 이 시조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 은거하여 부귀영화에 구속되 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出處의 역정에 따라 단계적이고 구체적으로 드 러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즉, <浩浩歌> 제1수에서는 ‘出處’의 문제에 대 한 고민을, 제2수에서는 관직에 나아갔을 때의 삶의 자세를, 마지막 제3수에서 는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서 자연에 은거하는 삶의 궤적을 주제로 하고 있다.
넓고 큰 기분으로 노래하자, 浩浩歌
천지만물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天地萬物如吾何 나를 써 주면 띠 풀고 太倉의 곡식 먹을 것이고, 用之解帶食太倉 써 주지 않으면 베개 밀쳐 버리고 산속으로 돌아가리. 不用拂枕歸山阿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
渭水의 어부 한 줄기 낚시 드리우고, 渭川漁父一竿竹 有莘의 들에서 밭 갈던 늙은이 몇 마지기 논매던 일을. 莘野耕叟數畝禾
①기쁘게 와서 일어나 商나라의 단비가 되었는가 하면, 喜來起作商家霖
②분노한 후에 곧 周나라 武王의 창을 잡았다네. 怒後便把周王戈
㉡또 보지 못하였는가, 又不見
嚴光이 다리를 뻗어 황제의 배 위에 얹었는데도, 子陵橫足加帝腹
282) <浩浩歌>와 관련해서 장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필사본 杜谷集」에 기록된 발문을 토대로 시 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발문에는 “馬存의 노래를 번역한 것으로 취하면 동자로 하여금 그것을 노래 부르게 했다(譯馬子才歌, 醉則使童子唱之).”라고 되어 있다.
황제가 선뜻 꿈쩍도 않으니 어찌 감히 꾸짖으리오? 帝不敢動豈敢訶
③上帝 이 때문에 황망하고 촉박해져, 皇天爲忙逼 별자리 서로 부딪쳐 스쳐가게 했다네. 星宿相擊摩 가련토다, 재상 侯覇는 어리석게도, 可憐相府癡 먼저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다네.283) 激請先經過 浩浩歌 天地萬物이 엇디야 삼긴게고
시저리 시면 太倉애 祿米 누키고 머그리라 시절리 리시면 綠水靑山이 어 듸가 업시리오 渭川漁夫도 낫대 나 이오 莘野耕叟도 두어 고랑 바치로다 말 며 嚴子陵도 帝腹애 발 언즈니 구믈기도 몯거든 셩식음 내실너냐
어릴샤 뎌 宰相아 제 지브로 오라샤
<浩浩歌> 제1수 제1수는 高應陟의 出處觀을 드러낸 작품이다. “넓고 큰 기분으로 부르리라, 천지만물이 어찌 나를 생기게 한 것인가”라고 시작하는 이 작품은 중장에서는 典故를 들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써주면 太倉의 곡식, 즉 나라 창고의 곡식 을 띠 풀고 먹을 것이고, 써주지 않으면 자연에 은거하겠다고 전제한 후에, 渭 水에서 낚시질하던 呂尙, 莘野에서 밭 갈던 伊尹을 예로 들어 때가 되기만을 기 다렸다가 군왕을 잘 보필했던 선례를 제시한다. 이어서 後漢 때 嚴光의 고사를 예로 들어 군왕이 등용하고자 하여도 나아가지 않았던 사례를 보여주며 시상을 마무리 짓는다.
嚴光은 동문수학했던 光武帝의 명을 받들어 宦路에 나아가지 않고 속세를 떠 나 숨어버렸다. 그러던 중 光武帝가 嚴光을 찾아내어 함께 잠을 자다가 嚴光이 황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쳐 놓았고, 이튿날 太史가 客星이 임금의 성좌를 범한 것이 매우 위급하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황제는 친구 嚴光과 함께 누워 있었을 뿐이라고 답하며 이를 꾸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재상 候覇는 어리석게도 光武帝의 명령조차 거역한 嚴光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 집에 오라고 하였다.
皇甫謐의 高士傳에 의하면 候覇는 嚴光과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는데, 嚴光을 만나고자 하여 심부름꾼에게 편지를 전해 자기를 찾아와 달라고 하였다. 이에 嚴光은 天子도 세 번이나 불러서 나갔는데 신하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283) 번역은 김학주의 해석을 수정, 보완하였다. 김학주 역저, (신역)宋詩選, 명문당, 2003.
일이라 질책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嚴光은 세상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던 인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조는 다양한 인물의 典故를 통해 작자 자신의 出處觀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를 기다려 관직에 나아가 仁義로 군왕을 잘 보필할 수 있다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조는 단형시조의 정형을 깨뜨린 파격의 사설시조라고 볼 수 있 다. 따라서 원전인 馬存의 <馬子才歌>와 비교를 통해 그 시조화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단 高應陟은 시조로 형상화할 때에 詩意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 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君不見’, ‘㉡又不見’ 부분을 생략하였다. 그리고 나머 지 부분은 渭水에서 낚시질하던 呂尙, 莘野에서 밭 갈던 伊尹, 光武帝의 배에 다리를 얹었던 嚴光의 고사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呂尙이 周나라의 재상으 로 武王을 도와 殷나라 紂王을 공격한 일을 가리키는 ‘②怒後便把周王戈’ 부분 과 伊尹이 출사하여 재상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는 ‘①喜來起作商家霖’ 부분, 또한 嚴光이 光武帝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자 이것이 하늘의 星座에도 영향을 미쳐 客星이 帝座를 심히 범했고, 이 갑작스런 별자리의 변화 때문에 上帝가 허 둥댔다는 ‘③皇天爲忙逼 星宿相擊摩’ 부분은 생략하여 시상을 압축적으로 제시 하였다.
넓고 큰 기분으로 노래하자, 浩浩歌
천지만물이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天地萬物如吾何 屈原은 억울하게도 汨羅水에 몸을 던졌고, 屈原枉死汨羅水 伯夷와 叔齊는 首陽山에서 공연히 굶어 죽었네. 夷齊空餓西山坡
①대장부의 뜻 높고 빼어나 얽매여서는 안 되니, 丈夫犖犖不可羈 자신의 몸을 어찌 자신을 망치는 데에 쓸까? 有身何用自滅磨
내 성현들의 마음 살펴보건대, 吾觀聖賢心
스스로 즐기는 것 말고 어찌 또 다른 것 있겠는가? 自樂豈有他 백성들이 궁한 처지에 몰리게 되면, 蒼生如命窮 나의 올바른 길도 어긋나게 된다네. 吾道成蹉跎
②그저 모름지기 천하의 사람들을 위로해야 할지니, 直須爲弔天下人 어찌 그것을 원망하여 孔子와 孟子를 욕할 필요 있겠는가? 何必嫌恨傷丘軻
浩浩歌 天地萬物이 엇디야 삼긴게고
屈原은 므슨 일로 汨羅水에 디며 夷齊 긔 므싀 일 西山애 가 굴믈 것고 聖賢의
은 절로 즐겨 거
百姓이 거복니 내라 혈마 엇디료
<浩浩歌> 제2수
제2수는 관직에 나아갔을 때의 삶의 자세를 노래한 것이다. 제1수와 마찬가지 로, “넓고 큰 기분으로 부르리라, 천지만물이 어찌 나를 생기게 한 것인가”라고 시작하는 이 작품은 중장에서는 屈原과 伯夷叔齊의 典故를 들어 시상을 전개하 고 있다. 屈原은 楚나라의 충신이었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참소를 받아 懷 王과 멀어지자 <離騷>를 지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였고, 이후 襄王에 게 잇달아 참소를 당해 내쫓기자 다시 <漁父詞>를 짓고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伯夷와 叔齊는 周나라 武王이 殷나라를 평정하여 천하가 周나라를 섬기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 지만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망친 인 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高應陟은 이러한 典故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 지 않고 <馬子才歌>의 ①부분을 생략한 채 시조로 노래하였다. 그리고 성현은 그저 스스로 道를 수행하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궁지에 몰리 게 되면 나라고 어찌 하겠는가’라고 압축하여 시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시조 의 이 부분만을 보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馬子才 歌>를 시조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략한 ②부분을 보면 종장의 의미가 분명해진 다. 宦路에 나아갔을 때 백성들이 궁지에 몰렸다면 반드시 그들을 仁義로 위로 해야 한다는 것이 종장에 담긴 속뜻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관직에 있는 사 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仁義를 실천할 것을 주장한 孔子와 孟 子를 욕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넓고 큰 기분으로 노래하자, 浩浩歌
천지만물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天地萬物如吾何 玉堂과 金馬門 어느 곳에 있다더냐? 玉堂金馬在何處 구름 낀 산의 동굴 높이 솟아있구나. 雲山石室高嵯峨 머리 숙여 밭 갈려 하니 땅 비록 적지만, 低頭欲耕地雖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