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漢詩의 내적 지향과 형상화 양상
1.3. 현실 참여를 향한 義理의 표출
高應陟은 嶺南士林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 심성의 수양과 학문 탐구에 전념하 였다. 하지만 士族으로서 현실의 세태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는 않았 다. 그가 살았던 16세기에서 17세기는 士林派와 勳舊派의 대립으로 인한 士禍와 黨爭이 발생하고, 또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등 역사적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던 시 기였는데, 이러한 당시의 현실적 난국을 도학의 신념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학의 義理論的 차원에서 어느 시기, 어떤 상황에서 出仕할 것인 가 退處할 것인가 하는 出處의 문제를 부단히 고민하였고, 또 節義의 차원에서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 여하였다.
물론 高應陟은 士林派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士禍와 黨爭으 로 인한 직접적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또한 관직 생활에 있어서도 臨陂縣令으 로 재직할 때 臺諫의 탄핵을 받거나 河陽縣監으로 부임하였다가 파직을 당하기 는 했지만, 주로 지방의 수령이나 교육을 담당하는 관직을 맡았기 때문에 黨爭 으로 인한 정치적 부침이 컸다고는 볼 수 없다.
191) 大學 傳7章에 “所謂修身, 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 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라고 하였다.
192) 大學 傳8章에 “所謂齊其家在修其身者, 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 之其所畏敬而辟 焉, 之其所哀矜而辟焉, 之其所傲惰而辟焉.”라고 하였다.
그러나 高應陟은 상소를 통해 현실 정치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물론 성리학적 義理論을 토대로 현실 참여에 대한 의지를 시로 표출하였다.
주제 작품명 형식
현실 참여를 향한 義理의 표출
(18수)
渡洛江, 觀裴吉殿策 五言絶句
蜂王, 有感庚午以前, 有感辛未, 贈調度使, 着綦吟, 喜麥, 題
蒙村, 聞倭奴渡海喜而作 七言絶句
贈鄭亞使思愼, 憶雙柳 五言四韻
稽琴, 明死生篇勉武學, 次松雲韻送日本, 歎時 七言四韻
遣憤 五言長篇
鐵秦檜 七言長篇
먼저 각각 다른 시기에 창작된 <有感> 시 두 편을 통해 高應陟이 당시의 세 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일하는 종은 늘 도망가겠다 말하고 役奴每說逃亡去 벼슬아치는 항상 歸去來를 말하네. 宦客常稱歸去來 가고 오는 것을 나는 믿지 않으니 去去來來吾不信 참되게 왔다가 참되게 가라고 일찍이 말했도다. 眞來眞去口曾開
<有感> 庚午以前
이 시는 鶴峰 金誠一이 한가로움 속에서 터득한 바가 있기 때문에 후세에 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작품이다.193) 제목 옆에 ‘庚午以前’이라고 부기되 어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는 작자의 나이 40세 이전, 즉 懷德縣監으로 부임하기 이전 어느 시기에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종이 늘 도망가겠다고 말하는 것같 이 벼슬아치는 항상 ‘歸去來’를 입에 달고 있다. 이런 벼슬아치들은 실제 歸去來 하겠다는 뜻도 없이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작자는 이런 이들이 하 는 말을 믿지 않는다. 진정 歸去來를 하려는 사람은 말만 앞세우지 않고 행동으 로 먼저 옮긴다. 결국 退處의 문제뿐만 아니라 말로만 정치하는 자들에 대한 비 판도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金誠一은 이 시에 담긴 이러한 깨달음을 높이 평 가한 것으로 보인다.
193) 이 작품에는 “右閒中所得, 金鶴峯誠一誦之曰, 可傳於後世云.”이라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꾀꼬리가 어찌 사냥 말의 고단함을 알며 黃鸝豈識田中馬 소쩍새가 어찌 솥의 얕고 깊음을 알겠는가. 蜀魄安知鼎淺深 단지 사람의 마음은 꾸밈이 많으니 只爲人心多億詐 無情한 새도 되고 有情한 새도 되누나. 無情禽作有情禽
<有感> 辛未
이 시는 자연물인 꾀꼬리와 소쩍새에 의탁하여 사람들이 본성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현실 세태를 개탄하고 있는 작품이다. 한가로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꾀꼬리는 사냥터에 나간 말의 고단함을 이해할 수 없다. 또 소쩍새를 가리켜 ‘積多鼎鳥’, 즉 ‘솥 적다고 우는 새’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승구는 소쩍새가 아무리 ‘솥 적다 솥 적다’라고 울어 봐도 그 솥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꾀꼬리 와 말이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 알아주지 않고, 소쩍새는 아무리 ‘솥 적 다’ 울어대도 솥이 깊은지 얕은지 알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詩 意는 전구와 결구에서 인간사의 문제로 환원된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꾸며서 어떤 때에는 나를 알아주는 有情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無情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를 담아냈다.
이러한 정치 현실 속에서 高應陟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다음의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구슬픈 소리에 목 메고 달은 지는데, 哀聲鳴咽月黃昏 속마음 하소연하고자 하나 감히 말하지 못하네. 欲訴中情不敢言 瀟湘斑竹의 바람은 처량하여 피눈물 나고 班竹風凄啼血淚 汨羅水의 물결은 차가워 충혼을 원망하네. 汨羅波冷怨忠魂 구름 짙은 雲夢澤에 기러기 떼 떠나가고, 雲深夢澤離群鴈 비 내려 컴컴한 巫山에 원숭이 짝을 잃네. 雨暗巫山失侶猿 숨어서 鍛爐194)한 그때는 뜻을 다하지 못했는데 隱鍛當年無盡意 이제는 거문고 타는 것을 뉘와 함께 의논하리. 如今絃上與誰論
<嵆琴>
194) 鍛爐 : 嵇康은 가난하여 向秀와 함께 山陽縣의 큰 버드나무 아래서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두들기 는, 鍛爐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晉書 卷49, <嵇康傳>. “初, 康居貧, 嘗與向秀共鍛於大樹之下, 以 自贍給.”
이 작품은 晉나라 때 嵇康이 타던 거문고인 ‘嵆琴’을 詩題로 하고 있다. 嵇康 은 晉나라 때 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는 것을 즐겼 다. 한번은 그의 친구 山濤가 자기의 관직을 대신하도록 그를 천거하였는데, 그 는 絶交書를 지어 보내 거절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 글에서 자신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서 15일 혹은 한 달씩이나 머리와 얼굴을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서는 아주 늦게 일어나곤 하여 몸에는 이가 항상 득실거리고, 오랫동안 방종한 생활을 한 탓에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예법이나 조정의 규율, 즉 名敎에 직접적 으로 위배될 것을 우려하여 예법에 관한 일을 다스리기에 합당치 못하다195)고 핑계를 대며 사양하였다. 세상에 나아가지[出]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시의 수련을 보면 거문고의 슬픈 소리를 듣고 자신의 시름을 털어놓고자 하지만 털어놓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함련에서는 瀟湘斑竹과 屈原의 고 사를 들어 시상을 전개하였다. 즉, 舜임금이 蒼梧에서 죽은 뒤 왕비인 娥皇과 女英이 사모하는 정을 억누르지 못해 湘江에 빠져 죽었고, 屈原은 楚懷王이 그 의 재주를 중히 여겼으나 참소하는 무리들로 인해 왕과 멀어지자 <離騷>를 지 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고 후에 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따라서 이 함련 은 왕에게서 멀어진 심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경련에서는 楚나라 文王이 雲夢澤에 사냥갔을 때의 고사를 인용하고, 또 楚나라 懷王이 巫山의 신녀를 만 나 雲雨之情을 나눴던 고사를 가져와 ‘기러기 떼가 떠나고’, ‘원숭이가 짝을 잃 는’, 이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나와 마음이 통하고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작자 자신을 떠나간 일을 애석해하고 있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嵇康 자신이 山 陽에 숨어서 鍛爐한 때에는 뜻을 다할 수 없었는데 준비가 다 된 지금 같으면 누구와 함께 의논하겠느냐고 반문한다. 따라서 이 시는 작자 高應陟과 함께 뜻 을 펼칠 수 있는 누군가가 정치 현실에서 멀어진 상황에서, 정치 현실에 나아가
195) 晉書 卷49 <嵇康傳>. “어릴 적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형들에게 지나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유가의 경전은 공부하지 못했다. 성격은 부주의하고 게으르며 근육은 무디고 살은 헐렁거렸다. 얼굴은 늘 한 달 이면 보름을 씻지 않았고, 특별히 가렵지 않으면 목욕도 하지 않았다. 매번 소변이 마려울 때는 참고 일어나지 않고 오줌을 방광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것이 극도로 팽창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이렇게 방종하고 제멋대로 행동한지 이미 오래 되어 성질은 고집스럽고 산만하니 예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게으름과 오만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加少孤露, 母兄見驕, 不涉經學. 性復疏嬾, 筋駑肉緩. 頭面常一月十五日不洗, 不大悶癢, 不能沐也. 每 常小便而忍不起, 令胞中略轉乃起耳. 又縱逸來久, 情意傲散, 簡與禮相背, 嬾與慢相成).” 원문 및 번역 은 최세윤, 「嵇康 ‘越名敎'의 상징성과 '任自然'의 의미」, 중국문화연구 제10집, 중국문화연구학회, 2007에서 재인용하였다.
지 않겠다는 작자의 의지를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미련에서 인용한 竹林七賢 嵇康의 고사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魏나라가 망하고 司馬炎에 의해 晉나라가 세 워지던 과정에서 수많은 권모술수에 따른 살육이 일어났다. 이에 염증을 느낀 지식인들은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지식인들이 바로 竹林七賢 이었다. 따라서 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嵇康의 고사를 詩題로 삼아 불합리한 정치현실에서 은거할 수밖에 없는 高應陟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黨爭을 일삼아 道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亂世라면 굳이 세상에 나가 이리저리 부딪히기보다는, 물러나 자연 속에 동화되어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196) 高應陟과 교유관계가 있는 金範도 <甁笙> 시 에서 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阮籍을 소재로 시를 지어서, 勳舊와 士林의 정 치적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당대 현실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전원에 몸을 맡긴 채 소요하면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197)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지식인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高應陟이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은 임진왜란을 겪었던 격 동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憂國의 심정 에서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고자 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高應陟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나라의 앞날에 불길한 일이 생길 수 있음을 예견한다.
기이하게도, 저 가을 강위로 怪底秋江上
옅은 구름이 연기처럼 일어나네. 輕陰起似烟
음양의 조화를 살펴보니 欲觀奇耦化
人道는 풍랑 속에 배를 탄 것 같구나. 人道浪乘船
<渡洛江> 庚寅
이 시는 高應陟이 60세 때인 1590년에 지은 것으로, 눈앞에 펼쳐진 낙동강의 모습을 보고 그 심회를 읊고 있다. 평상시와 달리, 이 날은 강 위에 옅은 안개 196) 강정화, 앞의 논문, 261면.
197) 后溪集 卷1, <甁笙>. “阮生의 일생은 술을 너무 좋아하여 竹林에서 술 마시면 천 잔을 비웠네.
어찌하면 鄭泉을 좇아 술그릇이 되어 내 영혼 술병 속에 들어 醉鄕에서 노닐까(阮生身世太顚狂, 竹 林一飮空千觴, 寧隨鄭泉作酒器, 魂入壺中遊醉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