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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성과 표현 기법에 반영된 형상화의 방식

2.3. 설명과 이해를 위한 표현 장치

2.3.3. 譬曉와 隱喩

도학자들은 도학의 이념을 講學하거나 講論할 때 譬曉의 설명 방법을 활용하 였다. 도학의 이념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관념이어서 쉽게 깨달을 수 없는데, 이 때 비유를 통해서 깨우치게 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柳成龍의 경우 尙州牧使

로 부임하여 明倫堂에서 講學 활동을 하는 중에 譬曉의 방식을 통해 문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매월 1일과 15일마다 문생들을 인솔하여 孔子의 사당에 참배하 고 물러 나와서는 明倫堂에 모여 독서한 내용을 講論했는데, 이때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은 비유를 들어가면서 반복하여 깨우치게 했다349)고 한다. 또한 高應 陟의 경우도 尙州 風詠樓에서 다른 도학자들과 講論할 때 譬曉의 방식으로 자 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道라는 글자는 길[路]로 설명할 수 있다. 이제 무릇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 고자 한다면 입·귀·눈·코[七竅]를 으뜸으로 삼아서 함께 거행한 후에야 나아갈 수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길을 모르는 자는 입으로 그것을 선각자에게 물어서, 선각자가 길을 가르쳐주면 귀로 그것을 반드시 듣게 되고, 귀가 그것을 들었다면 눈이 반드시 밝게 될 것이니, 이와 같다면 눈·혀·입·코·귀[五竅]가 또한 함께 거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귀로 듣고 눈이 밝게 된 뒤에는 발이 반드시 움직이니, 이것이 바 로 머리 아래에 발이 붙어있는 뜻이라. 그런즉 ‘知行’의 뜻 또한 한 글자[道]의 중심 에 갖추어 있지 아니한가.350)

이 예시문은 高應陟이 지은 <道字說>의 일부이다. 인용된 작품을 보면, 그는 道를 실현하는 과정을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빗대어 譬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道’字를 破字하면서 道를 깨닫는 과정을,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선각자에게 모르는 길[道]을 물어서 나아가는 과정으로 구조화하여 설명하고 있 는 것이다. 선각자에게 길을 물어서 나아가는 과정은 곧, 길을 입으로 묻고, 귀 로 듣고, 발로 내딛는 과정으로, 이것은 ‘知’와 ‘行’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가 ‘道’字에 들어 있어서 ‘머리[首]’ 아래에 ‘발[辶]’이 붙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道를 깨닫는 과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공간’ 또는 ‘이동’과 관련된 용 어를 통해 그 개념이 구조화되면서 일상적이고 친숙한 개념으로 전환되고 있다.

그런데 風詠樓에 함께 있던 斯文 金宇宏이 그의 말이 잘못 되었다고 하여 문 제를 제기하였고, 이에 講論을 벌이게 된다.

349) 西厓集, <年譜>. 萬曆八年庚辰. “每朔朢, 率諸生謁先聖廟訖, 退坐明倫堂, 講論諸生所讀書. 微辭 奧旨, 反覆譬曉.”

350) 杜谷集 卷3, <道字說>. “道之爲字, 主於路也. 今夫不知路者欲行, 則曾之七竅必先竝擧, 而後可以 行, 何者. 不知路者, 口以問之於先覺, 先覺敎之, 則耳必聽之, 耳旣聽之, 則目必明, 如是則五竅亦不竝 擧乎. 耳聽目明而後, 足必行, 此所以首下着足之意也. 然則知行之義, 不亦備於一字之中乎.”

지난날 高應陟이 일찍이 尙州 風詠樓 위에서 이 뜻을 開陳하였다. 그때 斯文인 金宇宏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잘못되었다. 길을 가는데 반 드시 七竅를 써야한다면 코는 어디에 쓰이는가?”라고 하였다. 高應陟이 바로 대답 하지 못하고 한참 있다가 답을 생각하여, “코의 쓰임은 길을 가는 데에 매우 긴절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金宇宏이 이르기를, “왜 그런가? 길을 가는 자가 코로 냄새 를 맡을 수 있는가?” 高應陟이 답하기를, “코가 귀, 눈, 입의 다섯 구멍[五竅]보다 중요합니다. 길을 가는 자가 코로 숨을 쉬지 못하면 어찌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입과 귀, 눈이 있더라도 써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자리에 가득히 앉은 사람이 말을 듣고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었다.351)

金宇宏은 高應陟이 말했던 내용 중에서 ‘七竅’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七竅 중 에서 코의 쓰임을 밝히지 않은 것을 문제시하였다. 이에 高應陟은 한동안 답을 하지 못하다가 코는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는 우스꽝스러운 답 변을 하였다.

이와 같이 高應陟은 譬曉의 방식으로 도학의 이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시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유교 경전을 究索하여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와 깨달음을 다시 시조로 형상화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가 大學 원 전의 의미 자체를 직설적으로 傳言하는 것이 아니라, 도학자인 자신의 깨달음에 의해 選取된 경전의 의미를 시조로 형상화하였다. 이 점은 그의 시조를 이해하 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경전의 의미는 初學者인 청자들에게 는 추상적이고 난해할 수밖에 없는데, 高應陟은 이것을 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상적이고 친숙한 상황에 빗대어 설명함으로써 그 교 화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高應陟 시조에 나타난 이러한 譬曉의 설명 방식은 ‘개념적 은유’352)와 관련될 수 있다. 그의 시조에 드러난 은유의 양상은 특별한 의미나 효과를 얻기 위해 일상적이고 표준적이라고 여겨지는 단어의 의미로부터 일탈하는353) 언어적·수 351) 杜谷集 卷3, <道字說>. “昔者應陟嘗陳此意於商山風詠樓上. 時斯文金宇宏在座上語曰, ‘君言誤矣.

行道必用七竅, 則鼻亦何用乎.’ 應陟不能卽答良久, 曾得答曰, ‘鼻之爲用, 甚切於行路.’ 金曰, ‘何也. 行 路者, 其可鼻以嗅之乎.’ 應陟答曰, ‘鼻最重於耳目口之五竅矣. 行路者鼻息絶則何以行路乎. 雖有口與耳 目何用乎. 滿座聞言絶倒.’”

352) ‘개념적 은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저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김종도, 은유의 세계, 한국문화 사, 2004 ; G.레이코프·M.존슨, (수정판) 삶으로서의 은유, 노양진·나익주 옮김, 박이정, 2006 ; 임지룡, 「개념적 은유에 대하여」, 한국어 의미학 제20집, 한국어의미학회, 2006.

353) 이종열, 비유와 인지, 한국문화사, 2003, 44면.

사학적 관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즉, 그의 은유는 단순히 단어적 속성에 주 목하여 ‘비유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개념적 속성의 측면에서 어떤 개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시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의 은유와 달리, 개념적 은유 이론에서는 ‘은유’를 본질적으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나 개념의 차원의 문제로 파악한다. 따라서 한 정신 적 영역을 다른 정신적 영역에 의해서 개념화하는 과정에 바탕을 둔 ‘은유’의 인지 원리를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라고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한 개념 영역을 다른 개념 영역에 의해서 인지하는 개념화 장치”354)로 정의하 기도 하는데, 이 경우 개념적 은유는 두 가지 개념적 영역으로 구성된다. 하나 는 우리가 인지하려고 하는 개념적 영역인 ‘목표영역(target domain)’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적 영역인 ‘근원영역 (source domain)’이다. ‘근원영역’은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부터 나온 것이므로 구체적·물리적·감각 운동적이며, 명확하게 윤곽이 주어지고 구조화된 경험인 반 면, ‘목표영역’은 표현하려는 영역으로서 추상적·심리적·주관적이며, 그 윤곽이 불명확하고 구조화되지 않은 경험이다. 따라서 ‘근원영역’은 우리에게 익숙하며 상상하기 쉽고,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작용하는 직접적 경험으 로부터 유래하는 반면, ‘목표영역’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을 수 없는 것 이며, 사회문화적으로 조작된 현상이다. 또한 근원영역은 낡고 진부한 경험인데 비하여 목표영역은 새롭고 신선하다. 따라서 개념적 은유란 우리에게 익숙한 근 원영역으로써 낯선 목표영역을 개념화하는 인지전략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개 념적 은유는 어렵고 낯선 사물이나 체험을 쉽고 익숙한 것으로 이해하도록 하 는 인지적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高應陟의 시조에 나타난 은유는 ‘개념적 은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개념적 은유를 통한 譬曉의 양상을 <新民曲>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지븨  누어 자 사 겯 두고 火燃積薪커니 설워 아니 올러냐 진실로 야니옷 오면 제나 내나 다랴

<新民曲>

354) Zoltan Kövecses, Metaphor: A Practical Introduction, Oxford:Oxford University Press, 2002. 임지룡, 앞의 논문에서 재인용.

이 시조는 三綱領 중 두 번째인 ‘新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단어의 속성이 아니라 개념의 속성에 주목하여, 주변의 친숙한 상황적 맥락에 빗대어 ‘新民’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초장과 중장에서 한집에 함께 누워 자는 사람을 곁에 두 고 쌓인 섶에 불이 나면 깨우지 않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종장에 서 진실로 깨우지 않는다면 저나 나나 무엇이 다르겠냐고 탄식한다. 이러한 탄 식에는 잠에서 먼저 깬 사람은 옆에 누워서 자고 있는 사람을 반드시 깨워야한 다는 당위적 권계가 담겨 있다. 청자들은 시조에 표현된 상황 맥락을 통해 ‘新 民’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大學 원전을 통해서 ‘新民’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비 해 이해의 측면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大學 원전에는 ‘新民’을 “湯임금의 <盤 銘>에 이르기를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였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라고 하였고, 康誥에 이르기를 ‘새로워지는 백성을 진작시키라.’

라고 하였으며, 詩經에 이르기를 ‘周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天命은 새로운 것’이라고 하였다.”355)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新民’, 즉 “사람 들을 올바로 이끌어 새롭게 하는 것”의 뜻을 가진 세 가지 다른 예를 열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작품에 부기되어 있는 발문을 다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발문의 역할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시조의 주지에 대한 부연 설명인데, 발문과 시조 작품을 결합시켜 작품을 해석하면 비유적으로 쓰였던 詩意가 한 가지 의 미로 1:1 대응되면서, 발문과 시조 작품 전체는 알레고리(allegory)에 가까워진 다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는 인간의 생각이나 사유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시키 는 비유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알레고리는 표현된 것과 말하고자 하는 것의 관계가 상징처럼 다의적이지 못하고 1:1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인 기법으로서는 다소 기계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356) 이러한 알레고리의

355) 大學章句 傳2章.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康誥曰, 作新民. 詩曰, 周雖舊邦, 其命 維新.”

356) 알레고리는 흔히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의 관계를 맺는 비유”로 정의되었다. 이런 정의에 의 해서 알레고리는 “일단 해석이 되면 끝나버리는 일회적이고 독선적인 비유법”이라는 폄하를 받아 온 수사학이었다. 그런데 최근 폴 드 만에 의해 알레고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알레고리를

‘시적이지 못한 비유’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오히려 상징보다 우월한 수사학으로 보는 관점 을 이끌어 냈다. 알레고리는 이제 “말과 뜻, 이미지와 언형물, 허구와 실제, 기호와 지시대상,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