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賦의 이념 지향과 진술 양상
2.1. 개념의 설명적 진술과 問答
高應陟은 大學을 탐독하고 얻은 유교적 이념과 깨달음을 賦로 지었다. 大 學이라는 경전이 가지는 학문적 위상을 표현하여 그 중요성을 드러내기도 하
210) 임종욱은 한국의 賦 문학을 작품 내용상의 성격에 따라 敍事賦, 詠物賦, 抒情賦, 說理賦로 구분하 였다. 그리고 이 중 說理賦는 성리학의 이념을 노래한 것으로 중국의 賦와 비교했을 때 한국에서만 보이는 특수한 양상이 아닐까 한다고 하여 조심스럽게 한국 賦의 특성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임종 욱, 「한국 賦 문학연구 시론-장르적 접근과 내용상의 구분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의 이론과 양 상, 이회, 2001, 32-33면 참조.
고, 또 大學에 담겨있는 致知·誠意와 같은 유교 이념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먼저 <讀書萬卷猶有今賦>를 보면, 大學이라는 경전이 가지는 중요한 가치 가 드러난다. 이 작품은 1600년에 지은 것으로, 책을 만 권이나 읽었지만 오늘 날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는 탄식을 표출하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후에 詞章을 중시하는 분위기와 異說이 만연한 세상에 대한 비판을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 道를 확립할 수 있는 방편으로 大學을 제 시하였다.
넓고 큰 三代의 세상은 멀어지고 灝噩世遠
經典 속 성인들은 다 사라졌구나. 典謨人亡
秦나라의 焚書에 一炬秦火
六經이 재가 되었네. 六籍灰颺
누가 禮를 밝혀서 맞추어 쓸 수 있겠는가 誰能明禮而適用 세상 풍조를 따라 글귀를 따서 문장을 지었을 뿐이라네. 滔滔摘句而尋章 만 권의 책을 읽었어도 宗社는 황폐해졌으니 讀萬卷而墟宗社 가련하도다, 어리석은 梁나라 元帝여. 可憐自代之昏梁 이 어찌 서적을 숭상한다 하겠는가 是豈書籍之爲崇 진실로 이것은 책을 읽다가 양을 잃은 셈이로구나. 眞是挾策之亡羊
高應陟은 유교 경전의 道에 대한 심오한 탐구 없이 ‘물 흐르듯 글귀를 따서 문장을 짓는’ 詞章의 분위기가 팽배한 현실에서, 만 권의 책을 읽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梁나라 元帝의 고사를 가져다가 시상을 전개하였다. 梁나라 元帝는 西魏가 쳐들어오는데도 老子만 강론하고 시만 짓다가 성을 함락당하고 만다. 그로 인해 古今의 도서 14만 권을 불태우며 “수만 권의 글을 읽었는데도 오히려 이 꼴이 되는 것인가?”라고 하며 한탄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高應陟은 元帝를 老子와 같은 책만 중시하다가 결국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서 인용된 莊子 騈拇 에 있는 ‘亡羊’의 고사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즉, 중요 하지 않은 서책에만 탐닉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儒道가 쇠퇴하고 異說만이 분분하여 百家의 허황된 글들이 가득하다고 하여 현 세태를 비판하면서, 특히 老子 학설의 황당함을 지적하였다.
老子는 황당함이 심하도다. 惟老氏甚矣荒唐
不死의 궤변을 부르짖고 倡爲不死之詭說
白雲을 타고 하늘로 들어가네. 乘白雲兮入帝鄕
애꾸눈을 갖고 있어서 獨眼有龍
하찮은 것을 가장 먼저 얻었구나. 最先得其粃糠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뜻은 잊어버리고 忘經國之远圖 淸談의 멀고 아득함에 빠져있구나. 溺淸談之渺茫
社稷의 興亡은 社稷興廢
逍遙의 술잔에 맡겨두고 付諸逍遙之羽觴
백성의 利害는 生民利害
鍊丹의 道場에 두었구나. 置于鍊丹之道場
이 부분을 보면, 老子의 황당무계함과 그 폐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 다. 첫째, 不死의 궤변을 늘어놓았고, 白雲을 타고 신선세계로 날아간다고 한 점, 둘째,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淸談에 빠져 있는 점, 셋 째, 종묘사직의 흥망은 逍遙의 술잔에 맡겨두고, 백성의 利害는 鍊丹의 도장에 두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여기에 쓰인 不死, 白雲鄕, 淸談, 逍遙, 鍊丹 모두 老 莊사상의 핵심개념으로, 高應陟은 이러한 老莊사상이 가진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淸談은 魏晉 시대의 玄學家들이 산림에 은거하여 老莊의 空理를 논 하던 풍조로, 천지만물을 無爲의 근본으로 삼는다고 立論한 이후 유교를 경시하 고 오직 老莊사상만을 崇奉하여 공리공담을 일삼았다. 이들 玄學家들은 淸談에 빠져 있어 나라를 다스릴 계획은 세울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社稷의 흥망은 逍遙의 술잔에 맡겨두고 백성의 이해는 鍊丹의 道場에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逍遙는 세상의 준칙에 얽매이지 않고 物外와 無爲에 멋대로 거니는 것을 말 하고, 鍊丹은 도교에서 말하는 長生不死의 약인 丹藥을 굽는 것을 말한다. 老莊 사상을 신봉하던 이들 玄學家들은 허황된 이론에 빠져 정작 중요한 종묘사직의 흥망과 백성의 이해는 살피지 못하였다.
결국 高應陟은 老莊사상에 빠져서 중요한 책을 탐구하지 못했던 元帝를 거울 삼아, 修己治人을 실현할 수 있는 경전 大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다. 그는 책을 읽어서 허망함 밖에 얻을 수 없다면 만 권의 책이라도 자신을 선 하게 하는 데 유익함이 없고, 또 책을 읽어서 껍데기만 취한다면 결국에는 道를 얻을 수 없다211)고 하면서, 成己成物할 수 있는 大學을 읽을 것을 권면하였다.
이와 같이 高應陟이 大學이 가지는 경전 자체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한편, 특히 八條目 중에서 ‘致知’와 ‘誠意’를 강조하여 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致知’
를 설명하는 작품으로는 <學莫先於致知賦>와 <夢覺關賦>를, ‘誠意’를 설명하는 작품으로는 <人鬼關賦>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大學의 致知와 誠意를 問答의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작자의 일방적이고 고정된 視點 으로만 사실을 진술하면 독자와의 거리가 멀어져 생동감이 떨어지게 된다. 반면 여러 등장인물을 통하여 다양한 목소리로 진술하면 작자와 독자 간의 거리감을 줄일 수 있고 극적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작자가 일일이 관여하지 않아도 대화 를 통해 보다 흥미롭게 사건이 진행시킬 수 있는 것이다.212)
먼저 <學莫先於致知賦>를 살펴보면, 이 賦는 학문에 있어 致知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賦의 제목은 大學或問 傳5章에서 혹자가 학문을 깨달을 수 있는 공부 방법에 대해 묻자 程子가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致知보다 먼저 해 야 할 공부는 없다고 대답했던 고사213)에서 가져왔다.
이 작품은 大人先生과 제자와의 문답을 통해 학문에 있어서 致知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제자가 八條目 중에서 致知가 가장 중요한 이 유가 무엇인지 묻자 대인선생은 致知를 ‘눈으로 보는 것’에 비유하여 그 중요성 을 설명한다. 큰 길에서 길을 잃지 않고 목적지를 잘 찾아가려면 눈으로 먼저 살핀 후에 길을 나서야 하는 것처럼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致知를 먼저 해야 후일 齊家, 治國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大道에 있으면 居大道
크고 넓어서 끝을 알 수 없네. 浩浩不可涯涘
비유컨대 큰 길에서는 눈으로 먼저 보아야만 하는데 比若大路目必先視
눈 먼 자는 알지 못하여 盲者不知
길을 잃고 자빠져 넘어지는 것과 같다네. 失路顚躓
지혜로운 사람은 자세하게 물어서 智者審問
잘못된 길로 들어가지 않으니 不至迷途
211) 杜谷集 卷2, <讀書萬卷猶有今賦>. “讀而虛誕, 萬卷無益於自戕, 讀而皮殼, 是道也何足以藏.”
212) 김성수, 한국 辭賦의 이해, 국학자료원, 1996, 87면 참조.
213) 大學或問 傳5章. “或問於程子曰, ‘學何爲而可以有覺也.’ 程子曰, ‘學莫先於致知. 能致其知, 則思 日益明, 至於久而後有覺爾. 書所謂思曰睿, 睿作聖. 董子所謂勉强學問, 則聞見博而智益明, 正謂此也.
學而無覺, 則亦何以學爲也哉.”
그가 묻지 않았다면 惟彼不問 그 지혜로움 또한 어리석음이 되었으리라. 智亦歸愚
그러므로 해와 달이 높이 있어 是以日月居高
만물을 비출 수 있고 能照萬類
두 눈이 머리에 있어 兩眼居首
온갖 일을 분별할 수 있고 能辯萬事
두 귀는 그 다음으로 兩耳次之
널리 듣고 잘 기억할 수 있으니 博聞强記
눈이 있어도 보지 못 한다면 有目不見
귀머거리, 소경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聾瞽何異
성인이 가르침을 베푸실 때에 聖人設敎
반드시 致知를 먼저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 必先致知者此也
후일 齊家, 治國이 他日齊家而國治
모두 致知로부터 나왔도다. 皆自致知中出
이러한 답을 들은 제자는 致知의 節目, 四書五經의 表裏, 알지 못하면서도 행 하는 자들의 폐습,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의 병통, 德에 들어가는 門에 대 해서 차례로 묻고, 대인선생은 이에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시상이 전개된다. 제 자가 마지막으로 德에 들어가는 門에 대해 묻자 대인선생은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밝지 않으면 움직여도 갈 곳이 없으니 非明則動無所之
장님이 애꾸눈 말을 타고 所謂盲人騎瞎馬
한밤중에 깊은 못가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라. 夜半臨深池者也 움직이지 않으면 밝은 것이 소용이 없으니 非動則明無所用
진흙탕 속의 발 잘린 오리가 所謂泥中斷足鳧
사립문을 넘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不能越荊扉者也 천둥과 번개가 함께 일어나는 것이 豊卦이니 豊卦之雷電皆至 밝음과 움직임이 서로 바탕으로 삼은 것이라네. 而明動相資者也 그런즉 知와 行이 함께 해야 하니 然則知行之相須
발과 눈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라. 豈不爲足目之不可相離者乎
여기서 선생은 德의 門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知行合一을 제시하고 있는데, 적 절한 비유를 들어 ‘知’와 ‘行’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천둥과 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