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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닿는 “마지막 고리”

흩어진 조상의 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 혈연적 측면에서 친족의 재결합을 의미한다면, 그 장소가 왜 칠전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를 고려하기에 앞서 연구자는 우선 칠전리 주민들이 현재 느끼는 위기감에 대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타지로 나간 사람들이 더 이상 마을로 돌아오지 않는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사례Ⅳ-15] 줄어든 구정 귀향객

박영호(70대): “이전이믄 구정엔 사람이 겁나 겁나(매우 많았어). 저 농협 창고 앞에가 차가 그냥… 겁났어. 거만 그랬간? 차가 골목골목 다 들어찼제. (중략) 근데 지금은 아녀.”

연구자: “지금도 농협 창고 앞에 보니 차가 많던데요?”

박영호: “저거믄 텅 빈 거제. 10년 전만 해도 꽉 들어찼어. 근데 앞으론 더 줄거여. 아 사람이 와야지, 그러잖겠더라고.”

[사례Ⅳ-16] 거주자가 줄어드는 칠전리

박상호(80대)는 칠전리가 이전과 달리 밀양 박씨 마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전에는 밀양박씨가 아니면 들어와 살기 어려웠고, 마을 대 부분 사람이 밀양박씨였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이 타성이라는 것이다. 또 한 집도 이전에는 300호가 넘었던 마을이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반복했던 “마을에 빈 집이 꽉 찼어”라는 말과 칠전리가 “완전히 폐촌이 되아 버럈어”라는 말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 준다.

이는 [사례Ⅳ-15]처럼 명절에 나타나는 변화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에서 잘 드 러난다. 칠전리 주민들은 공통적으로 구정이나 추석 때 고향을 찾는 향우들이 계 속 줄어드는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명절이 되면 타지로 나갔 던 향우들이 가족을 데리고 칠전리로 돌아오기에, 길목마다 차가 가득 차고 집집 마다 북적이던 기억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명절 풍경과 달리 지금은

해가 갈수록 칠전리로 돌아오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슷한 양상 은 윷놀이56)에서도 나타난다. 칠전리에서는 명절이 되면 마을 회관에 청년들이 모 여 윷놀이를 한다. 강정원(2009)은 경기도의 한 마을의 세시를 검토하며 윷놀이가 구정의 대표적인 놀이 중 하나로 1970년대 이후 마을 출향인과의 화합을 위한 잔 치로 변하였으나, 1990년대 이후 쇠퇴하여 2000년대에는 사라진 양상을 기술한 바 있다. 칠전리의 윷놀이는 명절 외에도 동회(마을 전체 회의)나 장례식 같이 사 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뤄지는 놀이로, 공식적 자리의 윷놀이는 보통 남 자들이 참여한다. 칠전리의 윷놀이는 여전히 마을 단위로 이뤄지고 있었지만 이전 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놀이의 규모와 지속 시간의 문제이다. 이전에는 윷놀이를 하려는 사람이 많아 누군가 마을 회관 앞에서 덕석 을 깔고 놀면서 자연히 사람이 모였던 것과 달리, 이제는 사람이 많이 줄면서 청 년회에서 나서서 윷놀이 판을 만드는 형편이고, 모이는 사람도 많이 줄어 밤새 하 던 윷놀이가 이제는 자정이 조금 넘으면 끝난다는 것이다. 이는 칠전리로 돌아오 는 향우들의 수가 줄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칠전리의 장래에 대한 주민들의 걱 정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변화는 [사례Ⅳ-16]의 맥락과도 연결된다. 이 사례는 80대 노인이 이전 칠전리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과 현재를 비교한 것이다. 현재 노인이 생각하는 핵 심적인 변화는 과거 밀양박씨 집성촌이던 칠전리에 타성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 여전히 밀양박씨가 70%이상을 차지하는 마을임에도 “절반 이상이

56) 칠전리에서 하는 윷놀이는 바닥에 “덕석(멍석)”을 깔고 그 위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작은 윷을 덕석 위에 던지는 방식으로 윷놀이를 한다. 윷을 던질 때에는 반드시 양철 “종지기(종지)” 안에 윷을 넣어 손바닥 위에 종지기를 엎은 후 이를 흔들어서 던지 도록 한다. 그래서 이때 쓰는 윷을 “종지기 윷”이라고도 부른다. 놀이는 항상 두 명이 팀을 이뤄서 하며, 한 명이 중간에서 심판을 본다. 각 팀은 덕석 양 끝에서 놀이를 하 며,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놀이 내내 쪼그려 앉는다. 놀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 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서서 구경을 한다. 윷놀이는 재미를 위해 참여한 사람이 돈을 거는데, 돈은 양 팀의 팀원이 모아서 심판에게 맡긴다. 이때 구경을 하는 사람은 자기 돈을 함께 걸 수 있는데 이를 “찔림”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말을 움직이는 “말끔”

을 놓는 과정에서 “훈수”를 두는데, “찔림”을 한 사람의 훈수는 더 큰 무게를 갖는다.

놀이에서 윷을 던지는 사람이 훈수를 듣지 않을 경우 “선수는 코치 말을 들어야제” 같 은 다양한 표현을 통해 훈수 두는 사람 말을 들을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 은 윷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있으며, 심판은 그 결정에 따라 말을 움직인다. 한 경기는 보통 20~40분 가량의 시간이 걸리며, 이 윷놀이는 윷을 놓는 4명의 사람과 1명의 심판 만의 놀이가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놀이가 된다. 연구자가 현장에 있을 때 윷놀이가 벌어지면 주변에는 15~20명가량의 주민들이 몰려서 놀고는 했다. 보통 이 러한 윷놀이 판은 남성들이 벌이는 경우가 많고, 이때 여성들은 끼지 않는다. 다만, 여 성들끼리 모이는 곳에서 윷놀이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윷놀이는 남성들만의 놀이 는 아니다.

타성”이라고 인식하는 부분은 다른 노인들의 인터뷰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부분이 다. 또한 인구가 너무 줄어 “폐촌이 되아 버럈어”라고 강조하는 부분은 앞에 지적 한 명절의 상황에서 느끼는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마을에 거주하는 칠전박씨들은 자손들이 타지로 떠난 상황에서 그 빈자리를 타성이 채워가는 것에 대해 위기감 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홀로 남은 부모가 살다 죽은 뒤, 자식이 들어오지 않으면 서 빈집이 계속 늘고 있는 현재의 양상에 대해서 사람 없는 마을이 되는 것에 대 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칠전리 주민들은 마을에서 자라 타지로 나간 사람들이 마을에 살고 있던 부모가 돌아가신 뒤 망자를 어디에 모시는가 하는 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주민들이 불편해 했던 것은 죽은 부모를 마을이 아닌 다른 곳 에 모시는 경우에 대한 것이었다.

[사례Ⅳ-17] 타지로 모신 망자에 대한 두 노인의 대화

김나심: “가네 어매(어머니)는 꼬실라서(화장해서) 읍내 어디다 모셨다는 구만?”

문옥순: “아부(아버지-여기선 남편의 의미)가 여깄는데는 것다 안 묻고 왜 글로 모셨디야?”

김나심: “몰르지. 다 아그들(자식들)이 알아서 하니.”

문옥순: “어째 뒷깍금(뒷산)으로 안가서, 이상타…”

(문옥순, 80대; 김나심, 80대)

위 대화에서처럼 70대 이상의 칠전리에 살던 노인이 죽었을 때, 마을에 묻지 않 고 타지에 묻게 되면 주민들은 여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선산이 없는 경우에 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았으나, 마을 주변에 선산이 있는 경우라면 그곳에 묻 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사례Ⅳ-18]의 경우 부부 중 남편이 먼저 죽어 칠전리 주변에 묻혔으나, 부인은 다른 곳에 묻혔던 것 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두 80대 노인은 상당한 불편함을 표시했다.

때로는 타지에 나간 자식들이 마을 주변에 묻힌 부모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경 우도 있었다. 해당 문중 구성원들은 이에 대해 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사례Ⅳ-18] 문중원의 독단적 이장에 대한 분노 (상황: C 사문중 묘소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대화 중)

“거그는 저기 여그가 묘가 있었는데 자식들이 와서 파가지고 가서 모두 화장시켜갖고 바람에다 날려 부렸어. 아니 그 망할 놈들이… 와서 그 자

식 놈들이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박문호, 70대)

위 사례의 경우 타지에 사는 자식들이 자기 부모의 산소를 파고, 이를 화장하여 그 유해를 산골한 경우라 그 분노는 심했다.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 역시 부정 적인 것을 넘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거부감과 주변에 남아 있던 묘소를 타지로 이장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의미는 다음의 사례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사례Ⅳ-19] 타지로 나가는 묘에 대한 평가

(상황: 노인회관에서 조도 출신 보건소 직원과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이전 에 계시던 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고, 자식들이 화장하여 타지에 모셨 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었다.)

보건소 직원: “아니 묘가 마을에 있어야 찾아 댕기기도 하고 그라제. 그 래야 고향도 다닐거 아녀. 딴 데다 그렇게 가믄 아주 고향에 마지막 고리 를 끊겠다는거 아녀? 그럼 완전 남남 되아버리는거 아녀.”

하순자: “그라게 말여. (중략) 아배가 여기 있는데 여기에 묻어야지 요샌 밖에다 묘를 쓴다는구만.”

(보건소 직원, 30대; 하순자, 70대)

이러한 대화는 칠전리 주변을 벗어나 타지로 조상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어떻 게 여겨지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이장되는 묘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혈연적 의미 외에도 지연적인 의미가 함께 강조됨을 보여준다. 묘를 칠전리 주변 에 둔다는 것은 타지로 나간 후손들이 부모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칠전리로 돌아 온다는 약속으로 읽히는 것이다. 즉, 부모의 죽은 몸이 칠전리 주변에 있기 때문 에 벌초를 하거나, 성묘를 하기 위해서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은 칠전리에 들를 것 이며, 이를 통해 타지에 나간 사람들과 칠전리에 남은 사람들이 계속 교류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중 시제가 있어도 참여하는 사람이 계속 감소하는 현실 속에서, 가까운 혈연인 부모의 묘까지 타지로 옮기게 되면 더 이상 마을에 들릴 일이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담겨 있다. 결국 돌아가신 부모를 화장 하여 도시의 납골당에 모시는 행위는 “고향과의 마지막 고리”를 끊겠다는 과격한 선언으로 읽히는 것이다.

이는 칠전리 주변으로 새롭게 조상의 장소로 묘소를 정리한 집안에 대해 “조상 에 대한 성의가 있다”는 칭찬이 갖는 의미를 재해석하는 지점을 제공한다. 이는 조상을 한 곳에 모신 “성지”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칭찬인 동시에, 칠전리로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