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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소외된 망자의 장소

[사례Ⅲ-2] 다멀의 변화

이강환(70대)은 다멀이 없어진 것은 1960년대 이후로 보고 있었다. 특별 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다멀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이를 보다 간소화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즉 아이가 죽으면 다멀을 쌓지 않고, 그냥 땅을 파고 몰래 묻는 방식으로 변했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자연히 다멀이 없어 졌다 하였다.

[사례Ⅲ-2]는 다멀이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들을 독에 넣고 돌을 그 위에 쌓아주던 행위가 불필요하다고 인식되고, 그보다는 단순히 땅을 파서 묻는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멀을 만들었던 이들의 증언에서처럼 혹시 나올지 모르는 악귀를 눌러야 한다거나 여시가 파먹을 수도 있다는 걱정은 사라진다. 오히려 다멀을 만드는 방식이 번잡하게 여겨졌고, 아이의 시신을 매장 하여 이를 빨리 넘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돌이 많았던 기존의 아장터 보다는 누구나 가서 시신을 묻을 수 있던 공동지가 그 대안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칠전리에서도 유사한데, 칠전리 역시 다멀이 소멸되면서 아장터보다 는 공동지가 이를 대신하는 장소로 나타나고 있었다. 앞의 사례인 [사례Ⅱ-4]에 서도 이것이 확인되는데, 옹기를 옮기고 주변의 돌을 모아야 하는 과정이 생략되 고 땅에 묻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아이를 묻는 곳이 공동지로 변했다면, 현재 양상은 여기에서 한 번 더 변화한다.

[사례Ⅲ-3] 소외된 망자의 범위 확대

“요즘 젊은 사람들 예를 들어서 50 미만이나 장가 못가거나 시집 못가거 나 해서 죽으믄 다 화장해 불잖아. 그래갖고 뭐 납골당에 모시겄냐 어쩌 겄냐. 대부분 납골당에 모시지 않고 뿌려 부러. 바다에다가. 그 녹진 다루 (진도대교) 아니면 저 어디다가. 정 모하면 저 부모 있는 그런데다 이렇 게 산 속에다 뿌린다드냐. 뿌리거나 이렇게. 그 보믄 그 근처에다 뿌리거 나 나무 밑에 그런데다 뭣 한다가더라고.” (박원준, 40대)

이러한 양상은 소외된 망자와 관련된 두 가지 큰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우선 비정상적 죽음 중 전환되지 않는 죽음의 확장이다. 다멀을 만들던 시기 어린 아이에 한정되던 대상자는 마을 주변 공동지에 매장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미혼자 로 확장된다. 현재 이는 다시 미혼자를 포함한 “50대 미만”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는 조상의 장소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의 연령과 범위가 급격히 넓어졌음을 보

여준다.

이러한 양상은 비정상적 죽음을 정상적 죽음으로 전환하는 의례가 더는 중시되 지 않는 현실과도 맞물린다. 한때 칠전리를 담당하던 단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다. 칠전리가 포함되었던 단골판49) 역시 지금은 사라졌다. 진도 상례에서 필수적 인 부분으로 여겨지던 씻김굿 역시 대부분의 장례식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의례를 찾는 사람도, 의례 집전자도 사라지는 현실에서 정상적 죽음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비정상적 죽음은 늘어가는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이제 비정상적 죽음을 맞은 망자가 마을 주변으로 들어오지 않 게 된 점이다. 미혼자를 포함한 50대 미만의 사람이 죽었을 경우 마을 주변에 묻 히지 않고 화장하여 도시 주변 납골당에 모시거나, 유골을 산골(散骨)한다. 특히 연령대가 어릴수록 (보통 30대 이하) 미혼자를 산골하는 경우가 많고, 혼인한 경 우라도 선산에 묻기보다는 화장하여 납골당에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연령 이 높더라도 미혼이면 선산에 묻기보다는 화장하여 마을 밖의 장소를 찾는 경우 가 많았다.

이처럼 현재 칠전리에는 미성년이나 미혼자의 시신은 더 이상 마을 주변으로 오지 않는다. 칠전리 주민들은 성년이 되었어도 미혼자로 죽으면 다른 마을의 미 혼으로 죽은 사람과 혼례를 올리고 함께 묻었다는 과거의 이야기를 자주 이야기 했다. 그러나 최근 마을에서 이뤄진 영혼결혼식은 확인할 수 없었고, 이는 80년대 이전 상황을 회상할 때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됐다. 죽은 이의 연령이 젊을수록

“꼬실러서(화장하여) 뺏딱(뼈)은 낙혀불어(뿌려버리)” 마을 주변으로 돌아오지 않 게 되었다.

또한, 공동지의 양상 역시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매장할 땅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묘지인 공동지는 밀양박씨 중 선산이 없는 사람들이나 밀양박 씨 외의 타성들이 묻히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공동지에 묘를 새로 쓰는 사람 이 없어졌다.

[사례Ⅲ-4] 공동지를 피하는 사람들

“가들은 부모가 밖에서 왔어. 얘넨 물론 여서(칠전에서) 학교도 다녔지 만… 가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마 공동지에 묻혔을 걸? (중략) 지금은 애들이 다 잘 됐어. (중략) 애들이 자기네 아버지를 그토록 모실라개도 49) 진도에서 단골(무당)은 한 마을만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권역을 갖고 있었다.

이를 단골판이라 한다. 단골판을 가진 단골은 매년 자신이 담당하는 마을을 돌면서 수 곡을 했다.

싫다고 하신다더라고. 근데 대단한게 얘들이 매주 찾아온다는거야. 그치 만 얘들이 아버지 돌아가시면 칠전리 주변에 모실까? 여기 선산도 없는 데? 공동지에 모셔? 말도 안돼지. 백이면 백 돌아가시면 밖으로 모실 걸?

자기들 사는 가까운 곳으로…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셨는데 여기 말고…

다른데 모셨고.” (박성진, 50대)

[사례Ⅲ-4]처럼, 타지에서 온 사람으로, 전부터 공동지에 조부모를 모셨던 사람 도 현재 더는 공동지를 이용하지 않는다. 이들의 생활공간이 이제는 칠전리가 아 니므로 칠전리 주변에 굳이 묘를 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자신들이 사는 지역 주변에 있는 묘역에 모시거나, 돈이 넉넉한 경우 공원묘지에 부지를 마련한 다. 결국, 경제적 형편이 어렵고 선산이 없을 때 부모가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제 는 공동지에 묻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공동지에 묘를 썼더라도 개인의 상황이 개선되면 새로 땅을 마련하여 공동지에 모신 조상을 이장한다. 이에 공동 지를 사용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새로 묘를 쓰는 경우는 사라졌다. 이는 점 차 공동지에 대한 접근성이 줄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곧 공동지에 대한 인상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아장터와 공동지 모두에서 나타나고 있다. 과거 소외된 망 자의 장소에 부가되었던 부정적 인식은 상당히 완화됐다. 다멀이 있던 많은 곳에 도 지금은 다멀이 사라졌으며, 때로는 칠전리 주민의 선산이 되거나 다른 시설이 들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이러한 장소에 대한 무서운 기 억의 약화이다.

[사례Ⅲ-5] 공동지에 대한 인식

박규호: “지금은 읎어. 읎어져버렸어, 다. 것도 못하고.”

배진심: “가도 못하고. 지금은 산속이나 다름없지.”

박규호: “칠전공동지는 공동지 안 같어.”

배진심: “그람. 나무가 엄청 많이 퍼져 부렀어. 요 밑에만 한 몇 개가 있 더만. 다 밭이여.”

박규호: “거 묏둥도 별로 읎어.”

배진심: “그런께. 서닌가 너닌가 요 드러감 있어. 저 우게만 막 나무가 다 들어차갔고.”

박규호: “어디가 공동지에다 (묘를 더) 쓰겄어. 묏(묘) 써놓고 관리를 안 해버린께 그까짓거 다 읎어져 부렀제.” (박규호, 70대; 배진심, 70대)

공동지에 대한 평가에 있어 이곳을 무섭다고 여기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전리 공동지가 다른 마을과 다름을 강조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공동지가 마을 의 주요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점차 공동지를 찾는 사람이 줄면서 공동지를 무서운 죽음과 연관하여 기억하는 양상이 약해졌음을 보여준다. [사례Ⅲ-5]은 부 정적인 장소라도 전반적인 맥락이 변하면 해당 장소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과 시 선 역시 빠르게 희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과거 망자의 공간을 구성했던 핵심적인 두 축 중에서 한 축이 마을 주변 에서 사라짐을 의미한다. 소외된 망자가 누울 곳은 이제 마을 주변이 아니다. 사 라진 망자의 공간이 소멸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망자의 공간이 칠전리 밖의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인 반대의 결과가 아니며, 이들도 무관심했던 사이에 이미 변해버린 것이다. 이전에 칠전리 밖 타지로 흩어지던 것이 조상의 장소였다면, 이제는 소외된 망자의 장소가 마을 밖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을 주변 소외된 망자의 장소에 대한 두려움의 기억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많은 이들은 “또깨비”에 대한 연구자의 질 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또한, 이들이 말하는 귀신은 많은 경우 옛날이야기였다.

“요새는 또깨비불도 보이지 않더만”이라는 말은 현재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