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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에서는 묘지정리를 통해 칠전리 주변으로 재편된 조상의 장소가 어떤 의 미로 이어지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흩어진 조상의 묘를 한곳에 모으는 것은 단순 히 조상을 잘 모시고, 전통적 질서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한 시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묘를 새로운 장소에 모으는 작업은 묘역의 집단성을 강화하는 작업이다. 이 장에서는 그 의미를 혈연적 차원과 지연적 차원의 두 부분에서 살피 고자 한다.

1) “성지 조성”으로서의 묘지정리

조상의 장소를 재편하여 마을 주변으로 묘지를 모으는 것은 조상을 영원히 모 신다는 것을 넘어선 의미가 있다. 우선 흩어진 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과정은 전 통성의 핵심인 개별성과 집단성 중에서 후자를 보다 강조하게 된다. 명당을 중심 으로 묘지가 흩어졌을 때, 묘지의 공간적 배치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개별성을 강 조하게 된다. 초창기 선산을 제외한 칠전리 밖의 선산은 대부분 부부 단위이며, 자식이 있을 경우라도 거리를 두고 묘를 쓴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별 성을 넘어 계보적 질서를 보여주고 혈연적 집단성을 보여주는 것이 벌초성묘이다.

이와 달리, 조상의 묘를 한 곳으로 모을 때에는 개별 묘 간의 질서를 한 장소에 구현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집단성이 강조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집단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묘지 정리가 형태상 묘를 모은다는

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실천은 해당 사문중 혹은 가족 간 협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혈연적 집단성의 의미를 강화한다. 10기 이상의 묘소를 옮기는 대규모 이장(移葬) 과정은 기본적으로 많은 “정성”을 요구한다. 여기서 정성은 금 전적인 부분과 구성원 개인의 정신적·육체적 봉사를 포괄한다. 우선 이장에 앞서 개별 가족 혹은 문중은 이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한다. 일단 문중원의 합의를 구하 는 과정 자체도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의견이 통일된 이후에는 금전적 인 문제를 해결하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C 사문중의 사례를 통해 이장 과정을 살펴보자. 이 문중에서 이장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문중 일을 이끌던 두 어른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부터였다. 이장 방 식을 놓고 납골당을 만들 것인가, 봉분을 만들되 좁은 공간을 둘 것인가를 놓고 이견이 있었으나, 이를 진행했던 두 어른의 타협으로 봉분을 작게 만드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C 사문중은 이렇게 의견을 결정하고 난 이후의 진행은 상대 적으로 수월한 편이었다. 이는 문중재산이 이장을 진행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시 기존의 문중 선산 중 적당한 곳으로 장지를 선정하였으며, 이 과정에 서 지관을 부르지는 않았다. 당시 천만 원 이상의 돈을 소모하였는데, 대부분 대 문중인 C 사문중과 내부의 사문중들이 돈을 부담하여 이장을 할 수 있었다. 2004 년 이장 이후, 최근에는 당시 누락된 묘를 추가로 이장하였다. 이 추가 이장 과정 에서도 C 사문중에서는 포크레인 비용을 제공하고, 그 안에 속한 소문중에서 석 관과 비석 값을 제공하여 문중 구성원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최소화 하였 다.

이와 달리 문중 구성원들이 함께 돈을 부담하여 새로 문중묘소를 조성하거나 납골당을 만드는 경우, 참여하지 않는 구성원들이 많아 이를 포기하고 가족묘소나 가족납골당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애초에 이장을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설령 문중 내에서 이를 부담할 능력이 되 더라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계획을 실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처럼 금전적 부담은 이장 계획을 세우는 이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며, 이 과정에서 문중 구성원의 합의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본격적인 이장 과정에서는 금전적인 부분 외에도 문중 구성원 개인들의 많은 참여를 요구한다. 보통 이장은 ① 이장 계획 설립 및 기획, ② 이장 장소선정 및 행정절차, ③ 석재사 계약 및 시설물 건설, ④ 장의사 및 인부 고용과 이장, ⑤ 새 로 모신 선영에 대한 제사 및 마을 잔치로 이루어진다. 각각의 과정에는 비용은 물론 문중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가 필수적이다. 위의 C 사문중의 사례

에서 보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문중 어른 외에 외지에 살던 후손들도 이장전 후로 칠전리에 와서 일을 거들었고, 마을에 거주하던 이들은 외지의 후손들과 인 부들에게 음식을 접대하는 일을 맡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조상의 장소를 정리하는 작업은 금전적·육체적 봉사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 결속하는 것은 죽은 조상만이 아니다. 칠전리 밖으로 이주하여 흩어진 자손 들 역시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함께 뭉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처 럼 큰 노력을 들이는 이유는 조상의 묘를 영원히 보존한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다. 이들은 흩어진 조상을 모으는 것과 함께 흩어진 자손들을 모으는 것에 큰 의 미를 두었다.

[사례Ⅳ-11] 납골당을 만드는 이유

박연호(70대)는 납골당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납골당을 만들어서 조상이 한 곳에 모여 있다면, 자손들이 못해도 1년에 1회 정도 는 만날 수 있고 모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묘가 퍼 져있을 경우 자손들은 어디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납골당이 있으면 자손들이 이곳으로 모두 모일 수 있고, 서로 떨 어져서도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처럼 묘를 모으는 동기는 단순히 조상의 묘를 영원히 보존하겠다는 계획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례Ⅳ-11]처럼, 묘를 한 곳으로 모은다는 것은 선조들의 묘를 보다 수월하게 기억하기 위함과 함께, 지금은 칠전리를 떠나 각지로 흩어진 자손 들이 다시 한 곳에 모일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것에 있었다. 특히 이 지점에 서 칠전리 주민들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묘지 정리에 대한 의무감이었다.

[사례Ⅳ-14] 묘지 정리에 대한 의무감

“나한텐 아직 숙제가 하나 있어. 이거. 묘를 한 곳으로 모으려고. 내 고조 할아버지는 합장해 계시다고. 한 곳에. 근데 증조할머니는 딴 곳에 계셔.

외롭지 않겠어? 그니까 이분들을 합쳐야지. 모아야지. 그러면 나는 화장 해도 상관없어. 화장을 해서 아래다가 작게 묻던지, 아니면 확 갖다 (그 아래다) 뿌려불던지. 근데 이걸 내 자식이나 손자 대 가면 할 수 있겠어?

(중략) 나만 해도 조상에 대한 느낌, 그런게 우리 부모님 때랑은 다르단 말야. 손자대로 가면 어찌 될까? 알 수 없어. 그니까 묘를 정리하고. 자 모여. 해서 한 번씩 오도록 하는 거지. 모이도록 하는 거지. 이건 내가 해 야 할 일이야.” (박성진, 50)

특히 이러한 의무감은 두 가지 측면에 걸쳐있다. 한 가지는 타지에 있는 후손들 이 보다 수월하게 묘를 찾을 수 있도록 하며, 조상의 장소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 록 함이다. 다른 한 가지는 흩어진 후손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 함이다. 이런 점에서 [사례Ⅳ-11]과 [사례Ⅳ-12]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러한 경향은 특히 50대 이상의 연령대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연구자는 칠전리 출 신으로 진도읍 주변에 사는 이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들 역시 공통적으로 점차 선산을 돌볼 사람이 없어지는 현실 속에서 묘지를 정리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었 으며, 그것을 자기 대에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지로 나간 자식들이 벌초를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상의 묘가 어디인지조차 잊을까 걱정하고 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이 한 마을에 모여 살았던 이전과 달리, 서로 사 는 곳이 흩어진 상황에서 친족이 뿔뿔이 흩어질 위험을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이 는 모든 개인이 동일하지 않으며, 그들의 문중 내 지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문 중의 장손일수록 그 부담감 역시 크게 느끼고 있었고, [사례Ⅳ-12]처럼 지금 상 황에서 장손으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의 연장에서 조상의 장소를 정리하는 것은 타지로 나간 친족 구성원 들이 다시 모일 수 있는 공간적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된다. 즉, 조상의 장소를 한곳으로 모으는 것은 흩어진 친족 구성원 간의 돈독한 협력관계가 있어야만 가 능하다. 나아가 새로 만들어진 조상의 장소는 흩어진 친족이 모이는 시공간을 제 공하게 된다.

[사례Ⅳ-13] 친족이 모이는 곳으로서의 조상의 묘소

“지금은 흙으로 시(세) 삽만 떠다가 딱 묏(묘)을 요로케 묻드만. (중략) 가서 본께 밭 하나에다 그 묏을 파다가... 성제(형제) 간 묏을 파다가 묏 이라고 안 뭇고 요 주전자 식이로 요케요케해서 요만치 묻어. 여 쬐까낳 게(작게) 요렇게. 그래갖고 여그다 이름 성명만 딱 앞에다 써놨더만. (중 략) 거 좋은 일이더라? 밭 하나에다 집안 묏 다 쓰고. 벌초하믄 딱 저그 집안 사람들이 나와서 벌초 딱 하고, 술에 밥에 먹고 가고. 서울서도 오 고 읍에서도 오고. 인제 형제간이 여그저그 산께. 그란께 밭 하나에다 묏 을 딱 쓰고. 그런께 우리도 요 우게 선산 있은께 우리도 그럴까(하고).”

(문옥순, 80대)

후손들의 협력과 결속은 조상의 장소를 모으는 일회적인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례Ⅳ-13]은 조상의 장소를 한 곳으로 정리한 것을 넘어, 그 이후로도 집안 사람들이 협력하여 선산을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칠전리를 떠나 진도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