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두 소절에서 망자의 공간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장소에 대해 살펴보았 다. 조상의 장소와 소외된 망자의 장소는 칠전리 주변 망자의 공간에서 대비되는 양극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소외된 망자의 장소가 조상의 장소와 대비되는 이유는 아장터와 공동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여기서 먼저 고민해야 할 점은 다양한 비정 상적 죽음 중에서 왜 어린아이의 죽음이 강조되는가 하는 점이다. 최길성(2010:
425~426)은 비정상적 죽음으로 야기되는 원혼의 종류를 크게 셋으로 구분하였 다. 첫째, 통과의례를 마치지 못하고 일찍 죽거나, 결혼하지 못하고 맞은 죽음이 그것이다. 둘째, 집에서 죽지 못하고 객사한 경우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한 죽 음 혹은 자살자의 영혼이다. 셋째, 제사를 받지 못한 영혼이다. 이중 마지막 형태 가 죽음의 원인과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사(早死), 미혼사, 객사(客死), 사 고사, 자살은 비정상적 죽음의 대표적인 형태로 볼 수 있다.
칠전리 조상의 장소 중 가장 대표적인 큰깍금만 살펴봐도, 한 장소에 많은 전사 자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에 전사한 박후령과 박인복은 물론, 한국전쟁에 병사로 참전하였다 전사한 이들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특히 박후령은 당항포 해 전에서 전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했으며, 무덤엔 그가 쓰던 담뱃대만 묻혔다고 전 해진다. 이들의 죽음은, 위의 구분에 따르면, 객사이자 사고사로 비정상적 죽음에 속한다. 이런 사례는 비정상적 죽음을 맞은 망자 모두가 조상의 장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진도의 경우 비정상적 죽음은 최길성(1986)이 구분한 것처럼 두 부류로 나뉜다.
한 가지는 망자의 연령에 따른 구분이다. 여기서는 어린아이와 미혼자의 죽음을 혼인한 사람의 죽음과 구분한다. 결혼한 경우 아이가 없더라도 다른 후손들이 그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경우가 있으나, 미혼자는 그 범위에 들어가지 못한다.
박종구의 자손들은 그의 증손자이자 박준채의 막내아들인 박처완의 선산을 지금 도 돌보고 있는데, 이들은 혼인하였지만 자식이 없는 경우에 속한다. 즉 직계자손 이 없더라도 가까운 친족의 후손이 남아있다면 그들의 묘지는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다. 그러나 칠전리에서 어린아이와 미혼자의 시신은 아장터에 묻거나 공동지 에 묻으며, 정상적인 상례를 치르지 않고 죽은 날 밤에 바로 묻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다른 한 구분은 집 안의 죽음과 집 밖의 죽음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도 에서도 객사는 집 밖의 죽음으로 사고사와 익사 등을 포함한다. 진도 역시 객사한
사람의 시신은 집안으로 들이지 못했으며, 이들에 대한 상례 절차는 집안에서의 죽음과는 다르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양극적 태도는 사실 공존하고 있으며, 양자의 간극은 의례 적 전환을 통해 뛰어넘을 수 있다. 복장제에 대한 에르츠의 분석(Hertz 1960[1909])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다약족의 사례를 통해 에르츠는 1차장에서 망자의 몸과 망자의 혼령 모두가 부정적이고 기 피해야 할 대상이며, 그 접촉이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겨짐을 지적한다. 이때의 망자는 산 자를 원망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산 자는 망자는 물론 그의 가족들까지 도 피해야 했다. 1차장이 끝나고 남은 살이 모두 썩어 그 몸이 뼈만 남게 되면 상 황은 변한다. 육체의 상태 변화는 망자의 성격이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육체 적 변화는 그 영혼의 변화로 이해되며, 이때 망자는 조상으로 통합될 수 있다. 또 한, 망자의 유족도 기피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통합을 축하하며 상 징적 전환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의례가 바로 2차장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 은 망자가 겪는 전환이다. 죽은 직후 부정적인 상태로 여겨지던 망자는 일련의 전 환 과정을 통해 조상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정상적인 죽음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비정상적 죽음 역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상적 죽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진도에서 단골(무당)이 주관하는 씻김굿은 이러한 전환을 가능케 한다. 각종 사 고사와 그 중 특수한 경우로 구분되는 익사는 각각 혼맞이굿과 혼건지기굿을 통 하여 정상적인 죽음으로 전환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혼맞이굿은 객사한 영혼 을 부르기 위해 길거리에서 하는 굿으로, 안당으로 혼을 모셔와 이후 씻김굿으로 이어간다. 혼건지기굿은 익사한 영혼을 물에서 건져오기 위한 굿으로 망자를 대신 할 제물을 용왕에게 바치고 영혼을 집으로 모셔오기 위한 굿이다(진도군지 2007:
899). 이런 과정을 거친 망자는 그 원한이 씻긴 것으로 여겨지며, 망자는 조상이 되어 선산에 들어갈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박후령의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족보 에서는 그의 장례를 초혼장(招魂葬)으로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과정이 정확 히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는 위의 혼건지기굿을 통해 영혼을 불러왔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련의 의례적 과정을 거치며 객사한 망자도 죽음의 부정함을 씻고 조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미혼자의 죽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녀 미혼자의 짝을 맞춰 “영혼결혼 식” 혹은 “저승혼사”를 올릴 경우 족보에 올라갈 수 있으며, 다른 형제의 자손이 많을 경우에는 양자를 들임으로써 대를 잇고 제사를 올릴 수 있다(진도군지
2007: 899). 이런 경우에도 비정상적인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으로 전환된다.
앞의 사례와 달리 어떤 전환도 불가능한 경우가 바로 다멀에 묻힌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진도 지역에는 이 죽음을 정상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어떤 의례적 장치도 없으며, 이들이 묻힌 장소는 비정상적인 죽음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이런 점에서 조상의 장소는 모든 전환이 끝나 정상적인 죽음의 영역으로 돌아온 망자 를 수용하는 장소가 되며, 아장터는 이러한 전환 자체가 불가능한 어린아이의 시 신을 묻는 장소가 되는 것으로 대비적 성격을 가진다. 종종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 지지 않은 채로 묻힌 처녀·총각의 무덤은 두려운 곳으로 여겨지는데, 칠전리에는 이들을 집단으로 묻었던 장소가 있지는 않았다. 또한, 선산에 함께 묻을 수 없었 기에 처녀·총각의 무덤은 공동지인 경우가 많았다.
조상의 장소와 공동지의 대비는 이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조상의 장소는 혈연적 단일성을 지니고 그 안에 일정한 질서를 내포한다. 공동지는 이러한 혈연 적 단일성이 없을뿐더러 일정한 질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공동지는 다양한 혈통이 어지럽게 뒤섞인 장소인 동시에, 정상적 죽음은 물론 전환되지 못한 비정상적 죽 음까지도 뒤섞인 장소이다. 정리하자면 공동지의 묘는 정상적 죽음을 맞은 조상임 을 확인해줄 근거도 없으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주변에 묻힌 망자들의 성격을 알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듯 혈연적 집단성과 연결되지 않은 공동지의 성격은 혼란스러운 것으로 고정되어, 부정적인 인식을 초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할 때, 공간분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조상의 장소이 다. 즉, 조상의 장소를 구현하는 원칙과 대비되는 지점이 바로 소외된 망자의 장 소가 갖는 특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조상의 장소 내부에서 나타나는 분화 역시 이와 연관된다. 칠전리 주변의 많은 조상의 장소들이 모두 동일하게 인식되는 것 은 아닌데, 여기서 차이를 자아내는 것은 각각의 조상의 장소에서 중심인 망자와 이를 접하는 사람의 계보적 거리이다. 칠전리 대선산에서 조상은 칠전박씨 모두의 직계 조상이다. 하지만 경주김씨의 묘역은 이들과 무관한 사람들의 묘역이다. 이 경우 신분이 확실하고 질서가 존재하는 장소이기에 공동지나 아장터처럼 극단적 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세세한 내력을 모른다는 점에 서 거리감이 두드러진다. 비슷하게 이들과 한마을에 사는 장흥임씨의 묘역 역시 칠전박씨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직계조상을 모신 장소에 비해 거리감을 느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다시 칠전박씨 내부의 묘역에 대한 분류에서도 그 대로 이어진다. 결국, 조상의 장소에서는 묻힌 조상과 이를 접하는 개인 간의 계 보적·인식적 거리가 공간의 내부 분화와 직결된다. 즉, 계보적·인식적 거리가 멀수
록 해당 공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를 모신 조상 의 장소 내에서 나타나는 분화가 거리감 수준에 그치는 것과 달리, ‘정상적 죽음’
과 ‘비정상적 죽음’처럼 죽음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거나, 어떤 죽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장소는 완전히 두렵고 부정적인 장소로 여겨진다. 결국 칠전리 에서 망자의 공간을 구획하는 질서는 이상적인 죽음인 조상이 될 수 있는 죽음을 기준으로 표현되며, 에르츠의 양손 비유에 따르자면 이상적인 죽음의 질서로 혈연 적 공동체를 구현한 공간이 조상의 장소로 오른손에 해당하게 된다. 반대로 이와 대비되는 모든 공간은 부정적인 왼손에 해당하게 되며 이는 소외된 망자의 장소 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