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전리 주민들이 현재 처한 문제에 대해 선택한 해답은 사방에 퍼진 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었다. 이전처럼 명당에 묘를 써도, 후손들이 이를 돌보기 어려 울뿐더러, 이제는 묘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연구자 는 종종 첨찰산 위에 있는 묘지 이야기를 들었다. 첨찰산 정상 근처에 밀양박씨가 묘지를 쓴 곳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명당이라고 하면 그런 곳까지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면 후손들이 벌초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곳에 묘지가 있었는지조차 잊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마을 사람마다 의견의 차이가 보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풍수지리를 중시하며, 묘를 마련할 때 지관의 의견을 구하는 집은 여전히 있다. 또한, 묘를 빨 리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처럼, 조상들의 묘를 지금처럼 그대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을 안에서 묘 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여러 방식으로 교환되고 있으 며, 묘지를 정리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마을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 리고 이때 조상의 장소는 칠전리 주변의 한 장소에 모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묘지 정리의 세부적인 방법은 집안마다 상이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경 향은 묘소를 한 곳으로 모으되, 그 위치는 칠전리 주변으로 정한다는 점이다. 아 래의 [그림Ⅲ-4]와 [표Ⅲ-2]는 현재 마을에서 4세대 이상의 묘를 한 곳으로 모 은 묘역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정리한 것이다.
[그림Ⅲ-4] 칠전리 주변 정돈된 조상의 장소
번호 형태 안장수 제작연대 위치
A 납골당 약 90기 2004 외야골(外野洞) B 납골당 약 100기 2003 맷골(梅花洞)
C 봉분 2004 진골(泥洞)
D 평지장 8묘(20명) 2008 뱀골(巳谷) E 봉분, 평장 10묘 2014 샘골(泉洞) F 평장 5묘(10명) 2015 뒷깍금(后山) [표Ⅲ-2] 재편된 선산의 형태, 연대 및 위치
먼저 묘를 모은 이들이 선택한 장소를 살펴보자. 위 표에서 B, C, E, F 사문중 의 경우 원래 자신들이 갖고 있던 선산을 그대로 썼다. 특이한 건 D 사문중인데, 이들은 과거에는 잘 쓰지 않았던 뱀골에 묘를 썼다. 칠전리 주민들은 뱀골과 진골 에는 예로부터 묘를 잘 쓰지 않았으며, 혹시 불가피하여 쓸 경우 절대 묘비를 세 우지 않았던 곳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 생긴 새로운 묘는 이러한 과거의 시선 에 무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묘를 모으는 방식은 같은 2000년대라 하더라도 차이가 난다. 2000년대 초중반 에는 납골당이 성행했던 것에 비해, 2008년 이후에는 평지장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평지장이라 하여도 D, E, F의 사례는 모두 다르다. E 사문중은 조상의 묘소에서 뼈가 나온 경우 봉분을 만들었고, 뼈가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평장을 하 였다. 다만 모든 묘 앞에 높이 70센티가량 되는 높은 비석을 세웠다. 이에 반해 D 사문중, F 사문중의 경우 모든 이들을 봉분 없이 납골함만 묻는 방식으로 평장 을 하였다. 다만 D 사문중에서 상대적으로 큰 비석을 세웠다면, F 사문중은 잘 보 이지 않게 작은 돌로 만든 표석만 두어 자세히 살펴봐야 알 수 있도록 했다.
2008년 이후 생긴 세 집안의 산소는 이전보다 훨씬 규격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림Ⅲ-5]의 D, E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 시기 이후의 묘소에서는 일정한 너 비로 콘크리트를 굳혀 사각형으로 전체의 영역을 표시하고 그 안에 일정한 간격 으로 직선을 표시하여 단을 만든다. D, E 집안의 경우 모두 4층으로 이를 구성하 였다. 이 선에 맞춰 묘를 배열하기 때문에 묘는 더욱 열을 맞춰 늘어서게 된다.
이는 2004년 만들어진 C 사문중의 선산과 비교할 때 몇 가지 차이를 보인다. 먼 저 C 사문중의 사례에서 같은 대의 조상은 모두 동일한 줄에 모셨다면, D, E는 여러 대의 조상을 한 줄에 놓되, 다만 높은 대의 조상일수록 왼쪽 위에 오게 배열 하였다. 다른 차이로는 C 사문중의 묘는 묘역 안을 콘크리트로 구획하는 것 없이 배열되었다면, D, E 문중의 묘소는 콘크리트로 구획되고, 그 안에 배열된 묘는 모 두 자로 잰 듯 정확한 대칭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D, E, F 문중 간에도 차이가 나타나는데, D 문중의 경우 가장 윗대 조상을 맨 위에 한 분 모시고, 다음 조상들 의 윗 조상부터 아래로 배열한다. 이런 방식으로 세 열을 채우되, 각각의 열은 일 종의 대칭 구도로 기획되어 있었다. E 문중의 경우 한 열에 두 기의 묘를 만들었 다. 설령 다른 세대의 조상이라도 윗대 조상을 왼쪽에 아랫대 조상은 오른쪽에 모 시는 양상은 지킨다. F 문중의 경우 가장 윗대 조상을 제일 위 한가운데에 모셨 고, 그 아래 4대에 해당하는 조상은 그 아래에 가로로 한 줄로 모셨는데, 윗대 조 상을 상대적으로 더 왼쪽에 두었다. 이처럼 어떤 방식으로 조상을 모셨는가의 양
상은 집안마다 차이가 난다. 다만, 묘가 차지하는 공간은 시기가 지날수록 상대적 으로 더 축소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최근의 묘일수록 더 좁은 공간에 더 많은 조상을 모실 수 있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부부를 모실 때 한 묘에 모시는 양상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2004년 만들어진 C 문중 사례 이후 계속해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부인이 많을 경우 본부인이 아닐 때는 다른 지 역에 묘를 썼던 과거의 양상과 달리, 부인이 몇이건 한 장소에 부부를 함께 모시 고, 묘비도 하나만 세우는 것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새로 조성된 조상의 장소는 하나의 방식이 완전히 정착되었다기보다는 시기에 따라, 그리고 집안의 규율에 따 라, 그 시기의 선호되는 방식에 따라 묘역마다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다 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다음은 C 집안의 묘역 정리 양상을 분석한 자료이다. 아래의 [표Ⅲ-4]는 2004 년 이후 최근까지 이어진 C 사문중의 묘소 정리사업 전후 묘지가 있던 곳의 위치 를 현재와 비교한 것이다.
위의 표를 보면 상당히 다양한 곳에 있던 묘를 한곳으로 모았음을 볼 수 있다.
먼저 C 사문중에서는 칠전리를 제외한 진도군 내에서 5지역에 묘를 두고 있으며, 이장 전 묘소 위치
⇒
현 묘소
지역분류 지역 명 명수 지역명
칠전리
칠전 총계 34
칠전리 진골 선산
넘에 갯골(狗尾大路) 2
서록(西麓) 3
웃굴(上谷)
갓골(笠洞) 2
도채비골(道疊洞) 1
샘골(泉洞) 1
옻나무골(漆洞) 4
진골(泥洞)
진골 합계 8
증산(甑山) 6
천마산(天馬山) 1
천방(天防) 10
진도군
고군면 오산리 1
의신면 돈지리 1
중굴리 1
임회면 용호리 1
포산리 1
서울 2
[표Ⅲ-4] C 사문중의 이장 전후 묘지 위치
칠전리에는 천방폭포쪽에 있는 선산 외에도 진골, 웃굴, 칠전서록, 넘에 쪽의 갯골 등 다양한 곳에 묘를 두고 있었다. 족보상 지명으로 구분되는 곳만 14곳이다. 서 울의 경우 상대적으로 최근에 죽어 자손들이 서울 부근의 묘역에 모신 경우였다.
이러한 양상은 C 집안의 이전 묘가 마을 안팎으로 멀리 퍼져있었음을 보여준다.
C 사문중은 이처럼 흩어진 묘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중 논의를 하였고, 문중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두 명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묘지 정리가 현실화 될 수 있었다.
이들은 묘가 차지하는 규모를 줄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특히 봉분을 낮게 만들고 부부는 아내가 여럿인 경우여도 모두 한곳으로 합장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실제 이곳의 봉분은 30센티 이하로 낮게 만들었는데 이는 주변에 남아있는 고묘 (古墓)의 크기가 매우 큰 것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봉분의 크기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벌초 문제였다. 이처럼 봉분을 작게 만들 경우 크게 만든 봉분에 비 해 벌초 비용이 적게 들어간다. 부부합장을 통해 기존의 봉분 3~4개가 필요한 공 간을 1개로 줄일 수 있고, 또한 봉분을 작게 만들면 그 규모를 더 줄이게 되는 것 이다.
또한, C 사문중은 이곳에 묘역을 정할 때는 따로 지관을 부르지 않았다. 이곳으 로 이장을 주도했던 박문호(70대)는 명당을 찾는 것이 잘못된 미신이므로 이를 하 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대신 선조들이 남긴 선산 중 넓고 양지바른 곳을 택했고, 이에 적당했던 진골의 산을 그 자리로 잡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현재 칠전리 주변의 조상묘역을 정리하는 것은 흩어진 묘 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에 그 초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칠전리 내에서 흩어진 묘는 물론 진도 내, 멀리는 전국으로 퍼진 자손들의 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양상 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이는 칠전리가 생활의 중심이었던 과거 상황에서 조상의 장소는 칠전리 주변만이 아니라 명당을 찾아 마을 밖으로 뻗어 나간 것과 달리, 이촌향도와 이후 이어진 급격한 변화로 마을이 공동화된 현재 상황에서는 조상의 장소가 마을 주변으로 모이는 공간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현 재 나타나는 공간적 변화는 개별 문중에 따라 납골당·평지장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